구제하는 일로 서로간에 다투게 된 초대교회

구제하는 일로 서로간에 다투게 된 초대교회


초대 교회가 구제하는 일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게 되고, 이로 인하여 분쟁으로 까지 번지게 된다.
Calvary Chapel



  • 그 무렵에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는데 그리스말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이 날마다 주는 배급에서 빠지므로 히브리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리니라(행6:1. 흠정역)
  • 무엇보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함께 모일 때에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을 내가 듣고 부분적으로 그것을 믿노니(고전11:18. 흠정역)


초대 교회의 모습 속에서 나타난 분쟁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이해를 하려고 하고 있을까? 혹은 "분쟁"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분쟁의 씨앗이 갖는 의미를 무시한 체) 그저 그들의 눈에 보이는 행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초대 교회의 당시 상황을 잠시만 생각해 보자.

지금의 우리네들 처럼 하루 3끼의 식사를 온전히 할 수 있었을까? 누구나 나름대로의 깨끗한 의복과 집에서의 삶이 보장된 상황이었을까? 지금의 우리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고아와 과부"에 대한 성경의 내용이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슥7:10. 개역개정)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1:27. 개역개정)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신26:12. 개역개정)

야고보서의 내용은 사뭇 그 구절을 읽는 이들에게 긴장감까지 줄 정도다.

  •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켜 내는 것.

을 경건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성경은 이토록 고아와 과부에 대해 민감한 사안을 거론하면서까지 언급하고 있을까?


아무런 어려움없이 하루 3끼의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자는 "고아와 과부의 형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루 1끼 또는 1주일에 한 두끼의 식사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형편에 속한 자는 "고아와 과부"에 대해 느끼는 바가 너무나 크다.


초대 교회 당시는 먹고 자는 문제 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시대였다.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신의 자녀를 먹었을 정도다. 이런 일이 유대 땅이 아니라도 인근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었을 만큼 먹고 자는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지금의 우리네들에겐 "병자를 고치는 기적"이 무엇보다 큰 기적이다. 특히 "재정에 대한 기름부음" 또는 "재정에 대한 예언 사역"은 더 큰 관심을 받기에 합당한 삶의 문제다. 그런데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는 사역"과 같은 것은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지금 못 먹으면 어때? 집에 가서 혹은 편의점에서 내가 사 먹으면 되는데."
먹는 문제 정도는 스스로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런 시대를 사는 이들은 "한끼 식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자"를 사실상 원치 않는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눅5:31)


그러나 하루 한끼 혹은 1주일에 한 두끼 정도 밖에 먹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는 사역(자)"이 너무나 귀중하다. 치유를 일으키는 사역보다, 재정을 돕는 예언 사역보다도 더 큰 비중을 갖는다. 왜냐면 당장 눈 앞에서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삶의 가장 큰 문제가 먹는 문제였던 이들이 매우 많았으리라.
그들 중에서 일부는 히브리인이고 나머지는 헬라인이었으리라.

이처럼 귀중한 초대 교회의 사역이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은 배제하고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을 겨냥하여 펼쳐진다면 어떻겠는가?  "삶의 제일 중요한 문제"는 당연히 초대 교회의 공동체를 심하게 흔들 수 있는 막중한 문제가 되었으리라.

우리들은 어떤가?

자신의 삶이 재정적으로 윤택한 이들은 다른 성도들의 경제적 문제가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는다. 건강한 자는 아픈 성도가 죽을 힘을 다해서 교회(공동체)의 문턱을 넘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중증근무력증 환자가 3층에 위치한 교회(공동체)를 향해 계단을 하나 하나씩 오르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계단 하나를 밟을 적마다 뒤로 굴러 넘어질 수 있을거란 위험부담을 감수하여야 한다는 심적 부담의 크기도 모른다.

이런 일들이 우리 삶 속에는 비일비재하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기에, 피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이다.

그래서 나누고 싶은 바가 있다.

어떤 성도가 혹은 어떤 지체가 고민에 빠져있는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시선은 그를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오늘의 이 글을 나누는 주된 목적이다.

"저들은 왜 저런 문제로 심하게 싸우지?"
"저들의 믿음 수준은 형편없구나."
고 여기기 보다는, 그들이 그렇수 밖에 없는 사정을 우리가 헤아려 보기 위해 노력을 해 보자. 그리하면 그들의 싸움 이전에 "원인"을 보게 될 것이다. 믿음의 지체들이 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지 않을까?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시선이 머물 곳은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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