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때문에 믿는 자와 목사님이 전하는 예슈아 때문에 믿는 자의 차이

우리는 쉽사리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 분은 높은 사람이야"
"그런 분이 거짓말 하겠어?"
"그러니 의심할 필요없어."
"깊게 생각해 봤자 의미가 없고, 그저 믿기만 하면 되"


옛적 우리 사회는 대부분 이런 풍토 안에서 살았었다. 요즘도 일부 이런 풍토가 남아있다.

최근 "기획 부동산"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M 본부의 "Y 리포트"라는 방송에서 보도한 내용을 보면,


개발 호재 (지역) 중에서 '개발 가치가 전혀 없는' 땅 만을 파는 이들로 소개되고 있다. 기획 부동산 직원의 말을 철떡같이 믿은 피해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사려는 땅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계약부터 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했다고 뒤늦게 하소연하고 있다.


사기를 치거나 혹은 속이려는 의도를 가진 이들이 하는 말은 이렇다.
"의심하지 마시고, 그냥 믿으세요"
"이런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 절대 아닙니다"

이런 일에 "사전답사 또는 자료 수집" 등의 "조심성 있는 태도"를 보일려고 하면, 속아서 이미 계약을 체결해 버린 사람들은 (아직 피해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말한다.
"아무개 씨는 왜케 사람 말을 못믿어!"
"의심이 많은 것도 병이야. 병!!!"
"세상을 어떻게 살았길래, 그렇게 믿지를 못해? 쯪쯪쯔"
"나를 봐. 사람이 말야. 첫 눈에 그런 것 하나 구분못하고선. 나는 이미 계약서에 서명 다했어"


자신의 행위에 소신이 있는건지 혹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확신이 없어서 인지는 몰라도, 속아서 이미 계약을 해 버린 자는 (물귀신 작전처럼)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함께 "속이는 자의 앞"으로 인도한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1:32)

학자와 일반인의 차이를 잠시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일반인의 경우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변화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다.
"야! 다 필요없어"
"다 의미없는 짓들이야"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마"
"대신 그럴 시간에 일이나 하고, 돈이나 벌어"
라고 말한다.

학자의 경우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변화에 세심한 관심을 보인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최대한 절제하고, 오직 변화가 일어나는 그 현장만을 지켜만 본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 안에서 판단하길 "의미 있는 일"인지 혹은 "무의미한 일"인지를 결정한다.
만약에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면, 그는 미련없이 그 자리를 일어선다.
하지만 "의미있는 변화"라고 여겨진다면, 그는 미련없이 세상의 일을 저버리고 그 자리에 눌러 앉아 버린다.
마치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수 천년 동안 허다한 무리들은 무시했지만, 뉴튼이라는 한 사람만은 세심한 관심을 보였던 것처럼.

그래서 학자의 연구는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게 아니다.
일상의 것들 중에서 일반인들이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그것들은 이미 의미가 부여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길 "하지만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는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부연하여 상세히 설명한다.

"물리"학이라는 학문적 활동은 "매우 지적이고 고상한 것"으로들 잘 알려졌다.
그런 물리학은 과연 무엇을 연구하고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너무 난해한 부분일까봐서 지레 겁을 먹을 수 있겠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너무나 싱겁다.

"만물(萬物) 속에 깃들어 있는 이치(理致)"를 찾아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물리(物理)학이라고 한다. 고로 물리학(Physics)은
물리(物理; 만물 속의 이치)를 찾아서
이해 하려는 우리들의 시도다.


그래서 물리학자와 공학자가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손 치면,

공학자가 손을 절레 절레 흔들고 대화의 자리를 일어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당신은 왜케 사사건건 이유를 달고, 별스럽지도 않는 것들에게 별의별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까?"
"그냥 소비자가 원하는 신호만 줄 수 있으면 되잖아요?"
라고 진절머리를 치듯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물리학자는 대개

"원하는 결과값으로서 신호를 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소비자에겐, 당신의 어떤 행동이 원인으로 작용했고, 그 원인이 끼친 영향력의 기여도가 어떤 연관성이 있었기에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라는 상세한 설명까지 붙여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 소비자가 원리 원칙을 보게 함으로써 깨닫게 하여, 스스로 만들거나 혹은 해당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로 성장하게끔 돕는 것이 물리학의 목적이요 이치를 깨달은 스승이 자신의 제자를 길러내는 육성법이다.



아내와 내 경우도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자면) 유사하다.

길을 가다가 한 노숙자를 만나서 지나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아내는 "그냥 돈을 드리자"고 말을 건넨다.
그러면 나는 "돈을 드리는 것으로 도움을 주는 것도 좋겠으나, 지금 저 분이 진짜로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아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아내는
"돈을 주면, 저분이 알아서 하실 거야"
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나는
"돈이 도움의 전부라 할 순 없어. 돈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할 수도 있잖아. 예로 이야기를 들어준다거나 하는 것 등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잖아"




오늘의 나눔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것에 집중하길 원한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

"무의미하다"는 말을 마치 상품의 가격표처럼 붙이고 사는 삶에 비해, "의미가 있는 일" 또는 "오늘도 내겐 무척이나 의미있는 하루였어"라고 나 스스로에게 말을 해 주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무의미한 하루"를 살기보다는
"의미있는 하루"를 사는게 좋지 않나요?
"무의미한 일"을 하기 보다는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나요?
무의미한 휴식"을 취하기 보다는
"의미있는 휴식"을 누리고 싶진 않나요?
"무의미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보다는
"의미있는 자기 자신"을 보고 싶지 않나요?


예슈아를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그 자체는 무엇일까?

"그 말에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의미를 두지 말고, 그저 아멘~~이라고 큰 소리만 외치면 그렇게 살아진다"는 말에 믿음이 가나요? 그리고 그런 삶으로 변화가 일어나던가요?
"몇 번, 몇 만번의 아멘 소리를 외친다 한들,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행위들은 그저 무의미"할 뿐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1)

의미는 사랑입니다.

나는 무의미하지 않고,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그 삶이
바로 내 안에 사랑이 있음을 확신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믿는 이는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를 아무렇게 살지도 행동하지도 않으며, 무의미한 삶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하나의 행동을 하더라도, 큰 의미가 부여됨을 알기에 매사에 신중하게 정성을 다해 충성스럽게 행합니다.


여러분.
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버릴게 하나도 없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해도 되지 않았는데, 그저 "아멘"이라고 외치면 이해가 될까요?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내용의 가치를 떠나서 자신에겐 "무의미"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해하게 되면, 어떤 내용이라도 버릴 것이 없어집니다. 모두가 "의미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죠.

이해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열매이니, "아멘"을 외치는데 집중하지 마시고, 성령께서 무어라 부연설명을 해 주시는지 그 음성에 귀를 기울려 보시길 강권합니다.

쓰레기 장은 버릴 것들, 곧 무의미한 것들만 모인 장소입니다.
영안이 없는 자도, 그곳에서는 무의미한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안이 열린 자는 쓰레기 장에서도 의미있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는 사랑이시요
그분은 의미 그 자체 이시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을 믿기 때문에, 그가 전하는 모든 말은 "의문을 품지 말고 그냥 믿으면 된다"는 것은 그렇기에 옳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이는 (목사님이 아닌)예슈아입니다. 그래서 예슈아께서 들려주시는 말에 아멘이라 외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아멘은 이해를 못한 상황에서 외치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큰소리로~~♩♪"하고 외치면


"yes~♩♪♬"하고

 화답하는 콘서트의 모습 또한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무대의 흥을 높일 순 있겠지만, 예슈아의 임재하심과는 상관없습니다.

Christ - blogger

예슈아의 설명을 (심령 안에서) 듣게 되는 자는

자신도 모르게 "아멘"을 외치게 됩니다. 그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은 "의미"를 알고 보게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자는 자신이 보게 된 의미를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 실제적인 변화를 가질 수 있는 자가 됩니다. 그 변화는 과거의 죄인으로 살던 자신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변화입니다.


"아멘하십시오"라고 말로 강요로 하는게 아니고, 설령 강요한다고 해서 할 말도 아닙니다.
"의미를 보게 된 자"는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아멘"을 하게 되닌까요.
교회(공동체) 안에서 아멘 놀이는 이젠 그만하시길 바랍니다.

대신에 "우리는 왜 아멘을 하는 걸까?"에 대해 서로간에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 "아멘이란 무엇인가?"의 질문도 나올 것이고,
  • "어떤 아멘이 진실되며, 어떤 아멘이 거짓일까?"라는 분별의 시도도 나타날 것이며
  • "진실한 아멘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일까?"라는 신앙의 원론적 이야기가 비로서 시작되리라 

고 봅니다.

목사님을 믿기에 아멘이라 외치는 모습보다는
예슈아를 믿기에, 목사님이 증거하는 그 예슈아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로 아멘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의미를 지닌 우리 자신의
나아갈 바가 된다고
필자는 믿고 전하려 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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