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고난을 주신 야훼 하나님, 그리고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한 아담

내 삶에 고난을 주신 야훼 하나님, 그리고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한 아담

에스겔 46장
18 왕은 백성의 유산을 빼앗고 그들을 폭력으로 내쫓아서, 그들의 유산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왕은 자신의 재산만을 떼어서,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내 백성 가운데서는 아무도, 자신의 재산을 잃고 멀리 흩어져 다니는 일이 없게 하여라."


대통령이 자원하여 거리를 청소한다.

보는 눈이 얼마가 되더라도 거리낌 하나 없이 당당하게 쓰레기를 주을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역시 대통령이야."
"그는 머가 달라도 달라." 
"늘 귀감이 되는 행동을 하셨지" 

라는 말로 그의 자원하는 행함을 칭찬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행함을 보고서 자신의 삶에 도전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의 가문은 본시 훌륭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보통 사람과 다른) 슈퍼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행함에 견줄 수 있는 보통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자원하여 쓰레기를 줍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고, 오직 대통령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런 난위도 있는 일이다. 그의 모습을 만천하가 보았을 지라도, 어느 누구하나 "나도 할 수 있어" 또는 "나도 저렇게 공헌(헌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겠다"는 등의 감동을 받을 수 없다. 인생을 시작하는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에.

반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다 싶은 자가 있다.

자신을 위해 노력해도 부족할 판인데, 그런 자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원하여 거리 청소를 한다. 처음에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하지만 주변의 혹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한 모습으로 자원하여 거리를 청소해 나가면, 어느 순간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자들의 "돌 같이 굳은 마음"이 하나 둘 씩 "부드러운 옥토"로 바뀌게 된다.

"자신을 위한 시간과 정열 조차도 부족한 판인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런데...."
"어떻게 청소를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모든 마음은 그 순간 부셔지기 시작한다.
대통령과 같이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의 선행을 보았더라면,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나는 슈퍼맨이 아니닌까. 그래서 못한 것 뿐이야. 나도 슈퍼맨이었다면 왜 못했겠어?"
라고 생각하면 선행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자신과 동일하다 못해 오히려 자신보다 더 못난 자다.
그런 자의 모습 속에서 "베푸는 자의 모습"을 보았다.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는 쓰레기 더미에 아무런 말 없이 담그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에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

"나 보다도 낮은 자가..."
"나 보다도 가진게 없는 자가..."

"그런데..."
"나 보다 더 큰 일을 하다니..."
"나 보다 더 큰 나눔을 하다니..."
"나 보다 더 큰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다니..."

보는 이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억쎈 손에 이끌리어 후벼 파 헤쳐지듯 극심한 요동이 일어난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느새 "감동"이 일어난다. 이 감동은 보는 이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누군가에게 베푸는 일을 하기 위해 나서게 한다. 이 흐름에 몸의 일부가 닿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요 부흥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이것이 예슈아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고난"이 찾아오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네들이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디였던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사61:1a)

우리는 기름부음 받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사랑한다. 야훼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덮는다는 것에 대해 열광하듯 소망한다. 이처럼 우리들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으니, 그 다음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했던가? 그저 기름 부음 받았다는 그 자체로 기뻐하며 그 기쁨을 누리기만 하면 되었던가?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는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61:1b)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 곧 GoodNews(gospel;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한다. 이 또한 우리네들이 익히 좋아하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 더 상세히 알아보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아울러 특이한 것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사61:2a)
하여야 한다. 그래서 만나는 이들이 있으니,

모든 슬픈 자, 곧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사61:3b)
를 만나야만 한다.



나를 향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인파들을 바라보고서 복음을 전하는게 아니라, 멀쩡하게 화려한 삶을 누리고 있는 자들을 기대하면서 복음을 전하는게 아니라, 그저 "가난"하고 마음이 "상한" 이들이다. 무엇엔가 자신도 모르게 "중독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은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답답한 마음을 갖게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침울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전할 자들은 바로 그런 이들이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단서가 하나 제공된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야 할 대상"과 "같은 류의 삶"을 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요 창조의 질서로서, 이미 하늘의 법(Torah; 성경)에 명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계명을 벗어나기 보다는 지켜 행하는 이들이지 않는가? 그 법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해 보자.

에스겔 46장(흠정역)
16.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통치자가 자기 아들들 중의 하나에게 선물을 주면 그 선물의 상속 재산이 그의 아들들의 것이 될 터인즉 그것이 상속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소유가 되리라.
17. 그러나 만일 그가 자기의 상속 재산 중에서 자기 종들 중의 하나에게 선물을 주면 그것은 자유의 해가 이를 때까지 그의 것이 되고 그 뒤에는 그 통치자에게로 되돌아가리라. 그러나 통치자의 상속 재산은 그의 아들들을 위해 그들의 것이 되리라.
18. 또한 통치자는 백성을 그들의 소유로부터 몰아내려고 학대를 통해 그들의 상속 재산을 취하지 말며 오직 자기의 소유에서 자기 아들들에게 상속 재산을 주어 내 백성이 각각 자기 소유를 떠나 흩어지지 아니하게 할지니라.

이 구절의 전모는 나름 아래와 같다.

한 나라의 (법 그 자체가 되는) 국왕 밑에는 많은 통치자(영주; 주후)들이 있다. 통치자(이하 영주)에게는 본시 국왕으로부터 할당되어 소유권을 인정받은 땅들이 있다. 영주는 그 땅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선물(기업; 유업)로 줄 수 있다. 그러면 그 땅은 자녀의 소유가 된다.
하지만 (어떤 연고에서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영주 스스로가 자신의 신하에게 자신의 땅을 "일정 시간"(the appointed time; Moed) 동안 빌려주게 된다. "정한 기간"(the appointed time; 절기) 동안 그 땅의 소유권은신하에게 일임된다. "정한 기한"이 지나면 그 땅의 소유권은 자연스럽게 영주에게로 반환(Jubilee)된다. 이 날은 축제(Jubilation)의 날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정상적인 소유권 반환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소유권을 반환 받아야 할 상황이 생겨났다. 영주가 자신의 자녀에게 자신의 땅을 물려주어야 할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영주는 자신의 자녀에게 땅을 주고 싶어서, 신하에게 영주(의 권한을 사용함으)로서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하려 했다. 이때 신하는 국왕의 법을 가지고 영주에게 말한다. "한 번 양도하였으면, 그 기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영주의 신분이 보장하는 권력을 사용하여) 강제로 소유권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조항(겔46:18a)이다. 그러자 영주는 자신의 지혜인 참모를 불러서 고민을 털어 놓는다. 영주의 고민을 들은 참모는 한참을 생각한 후 국왕이 내린 다른 법 조항을 제시한다.

너희와 함께 사는, 나그네 신세 된 외국 사람이나 임시 거주자 가운데는 부자로 사는 사람이 있는데, 마침 그 이웃에 너희의 동족이 살고 있다가 가난하게 되어서, 그 외국 사람에게나, 너희와 같이 사는 임시 거주자에게나, 그 가족 가운데 누구에게, 종으로 팔렸다고 하자.(레25:47. 새번역)

그런데 뜻밖에도 "노예"에 대한 조항이다. 영주는 의아했다. "웬 노예?" 하지만 자신의 참모를 믿고 신뢰하였던 영주였던터라, 참모의 참 뜻을 듣기 위해 그는 인내하며 자리를 지킨다. 참모는 말을 이어나간다.

"종으로 팔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단 기본 설정은 이러합니다."
"영주님과 함께 있는 자들은 부자입니다."

"그 부자들 근처에 살던 영주님의 가족 중 한 명이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가난을 극복하지 못한 그는 어쩔 수 없이 부자에게 팔려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영주는 손이 땀이 났다. 웬지 모르게 자신의 삶이 심하게 뒤틀려 버린 것 같아서다. 하지만 성급한 행동은 자체한 체, 참모의 말을 듣는데 집중한다.

종으로 팔려 간 다음이라 하더라도, 그는 종으로 팔릴 때에 받은 값을 되돌려 주고 풀려 날 권리가 있다. (레25:48a. 새번역)

참모는 국왕의 조서(성경)들 중에서 한 구절을 읽은 후, 다시 말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국왕은 그 노예에게 권리를 부여합니다."
"본시 노예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신분인데도 말이죠."
"그래서 그 노예는 다른 노예들과 다르게 권리를 인정받은 노예가 됩니다."
"단 그 권리는 자신이 노예로서 팔린 그 값을 지불하는 순간에만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불이 완료되면 풀려날 수 있습니다."

영주의 답답한 마음에 웬지 모를 한 줄기 소망이 깃들어지는 것 같다. 참모의 말에 더욱 더 집중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참모는 국왕의 조서(성경) 가운데에서 또 다른 조항(구절)들을 읊조린다.

그의 친척 가운데 누군가가 값을 대신 치르고 그를 데려올 수 있으며,(레25:48b)
그 사람이 넉넉하게 된 뒤에, 스스로 그 값을 치르고 나올 수도 있다.(레25:49b)

친척 중에서 대신 값을 지불해 주거나 혹은 스스로 자신의 몸 값을 지불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몸 값을 지불하는 방법으로 제시된다고 참모는 설명했다. 그 때 영주의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국왕이 오래 전에 내린 조서의 한 내용이었다.

통치자가 자원하여 번제 헌물을 예비하거나 자원하여 화평 헌물을 {주}께 예비할 때에는 한 사람이 그를 위해 동쪽을 바라보는 문을 열어 줄 것이요, 그는 안식일에 예비한 것 같이 자기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예비한 뒤에 나아갈 것이며 그가 나아간 뒤에 한 사람이 문을 닫을지니라.(겔46:12. 흠정역)

영주가 스스로 자원하여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준비할 수 있는 조항이다. 이는 자신의 몸 값을 지불할 수 있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때 동쪽을 바라보는 문, 즉 (스스로 몸 값을 준비한 자를 위해) 동문(창3:24a)은 열리게 된다고 한다. 허나 영주가 그 문을 지나서 나가게 되면 그 문은 닫힌다고 한다. 국왕의 명령이 인봉(seal)이 되어 그 문은 어느 누구도 열지 못하게 된다.

  •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새번역)

하지만 국왕의 명령은 인봉이 풀리는 시점, 곧 동쪽을 바라보는 문이 열리는 시점을 예비하였다.

  • 일하는 엿새 동안에는 동쪽을 바라보는 안뜰의 문을 닫되 안식일에는 그것을 열며 월삭인 날에도 열지니라.(겔46:1.흠정역)

참모의 모든 설명을 다 들은 영주는 결심한다. 스스로 (자신의) 신하의 땅에 영주의 직함이 아닌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자신의 신하를 주인으로 섬기는 노예가 되겠다고. 그래서 이미 준비해 놓았던 몸 값을 스스로 지불함으로써, 신하의 땅에서 당당하게 부유한 자가 되어 그 땅들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겠다는 강한 포부를 품었다.



동변상련의 이치가 자연의 섭리요 창조의 질서 안에 이미 깃들어 있었음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아담의 "의문에 쌓인 행동들"이 동변상련의 이치로 설명될 수 있음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길은 쉬운 길일까? 그렇지 않다.
필자는 지금까지 7년 이상의 투병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러면서 느낀 바가 있다. 그것은 "몸이 아픈 자는 마음까지 아픔을 겪는 자다"는 사실이다. 몸이 아픈 이들을 보라. 왠지 모르게 그들의 마음까지도 외골수요 툭하면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자괴감에 빠지는 등, 성격이 변해진 것을 보게 된다. 허나 그런 현상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몸이 건강하면 마음 또한 건강하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는 몸과 마음이 서로 일치하기에 자신의 의지가 행동으로 직결되어 나타난다.

빛의 직진 그리고 몸과 마음의 일치(photo by pixabay)

허나 몸이 아프면 그의 마음은 더 이상 마음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

마음이 뒤틀리듯 왜곡되어 버리기 때문에 주변의 모습이나 지인들이 들려주는 모든 말들이 그에게는 왜곡되어 들리게 된다. 몸이 아프면서 마음이 뒤틀린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굴절된 빛 그리고 몸과 마음의 불일치(photo by youtube)


이 경우, 자신의 의지가 행동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과 어긋난 행동들 만이 표출되기 쉽다. 그래서 가족이나 주변의 지인들에게 상처만 안겨줄 뿐이다.

그렇기에 아픈 이들을 찾아가는 사역은 멀고도 어려운 길이다.



따라서
아픈 자의 마음은 건강한 자로선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아픈 자의 마음은 아픈 자 만이 이해하게 된다.

빛의 굴절 현상은 이 모든 것들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주님의 지혜다.
공기 중을 지나던 빛이 물 속으로 들어가려 빛을 보고서, 그가 도달할 곳을 정확하게 예측하길 원한다고 하자. 그럴려면 알고자 하는 자신은 이미(already) 물 속에 들어와 있어야만 한다.


pixabay


예슈아의 이름을 더욱 힘차게 불렀건만, 내 삶에 고난을 허락하신 주님을 보면 한 없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 겪고 있고, 힘들지만 조금씩 버티어 나가면서 극복해 나가는 그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당신의 주변 혹은 당신과 유사한 처지에 처한 이들에게 빛을 전해주는 통로로 쓰임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라며 축복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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