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숨겨진 비화] 예행연습 이후에 치뤄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시험.

[아브라함의 숨겨진 비화]

예행연습 이후에 치뤄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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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전대미문의 대단한 영적 인물이다. 당시 시대는 자신의 아들들을 제물로 바치는 우상행위들가 몹시도 성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쳐라"는 메시지를 사단의 음성으로 듣지 아니하고, (정확히 분별함으로써) 야훼 하나님의 음성으로 확신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그 놀라운 믿음.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믿음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 칭함을 받는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시험에 대해서 단번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단 번에 성공할 수 있는 그런 류의 "난제"는 없다. 난제는 숱한 시행착오 등을 통해서 겨우 풀 수 있는 어려움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브라함에 대해 그의 가치를 깎아 내리기 위함은 아니다. 다만 우리네들이 "전통처럼 여겨오는 아브라함에 관한 신학적 내용"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측면에서 오늘 "아브라함의 숨겨진 비화"를 나누고자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라는 아들만 있지 않았다.

이스마엘 이라고 하는 아들도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는 "한 아들과의 이야기"로만 설명될 순 없다. "두 아들을 가진 아브라함의 이야기"로서 우리들에게 설명되어야 함이 옳을 줄로 믿는다.

아브라함에게 큰 시련이 찾아온 일이 있다. 바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mocking; צָחַק)하였다. 솔직히 조금 놀렸거니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삭을 놀렸다는 "조롱"의 수위는 다음의 상황에서도 동일한 히브리어로 표현되어 있다.


창18장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וַתִּצְחַ֥ק)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צָחֲקָ֨ה)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צָחַ֖קְתִּי)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צָחָֽקְתְּ)


"조롱하다" 또는 "(비)웃다"의 의미가 동일한 히브리어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야훼 하나님 앞에서 웃었던 사라가 "두려움"을 느낀다. 쉽게 웃어 넘길만한 사안이 아니란 뜻이다.
사라는 자신이 야훼 하나님을 비웃었던 만큼, 자신이 아들이 이스마엘에 의해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매우 치욕적이었을 것이며, 큰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대목이라 생각한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단호한 제안(??)을 한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창21:10a)

하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하갈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까지 내쫓으라고 강하게 말한다.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심히 큰 "근심"을 안겨준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창21:11)

이상하다. 하갈에 대해선 걱정을 하지 않는 아브라함이다. 아들 이스마엘에 대해서만 걱정한다. 그것도 매우 심히.

왜 걱정을 할까? 대충 타지로 보내서 그곳에서 힘들지만 죽지 않고 잘 살 수만 있다면 크게 걱정할 문제라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았다. 이스마엘을 어떤 마을로 내 보낸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브엘세바 광야"로 보내야만 하기에, 문제가 된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곧 광야로 내 보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자! 여러분.
여기서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비록 (야훼께서 허락하시고) 자신의 아내, 사라의 강요에 의해서 마지못해 하는 일이지만, 아브라함이 직접 자신의 아들 "이스마엘"을 사지로 몰아 넣는 형국이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주어지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직접 자신의 아들(이스마엘)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큰 근심(창21:11)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쫓아 버렸다. 그냥 배웅을 해 주는 것이 아니다. 내쫓아 버렸다.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내어 "돌아오지 말고, 그곳에서 죽으라" 여기고서 내쫓아 버리는 것처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내쫓겨났다.

어찌 이처럼 무정한 아버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도 믿음의 조상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을까? 부모의 심정은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했다.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이 부분이 우리 모두에게 강한 도전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창세기 21장(개역개정)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중략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오호라.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아들 이스마엘의 생사"에 관련된 말씀이 분명히 삽입되어 있었다.
"이스마엘도 네 씨다."
"(야훼 하나님이 직접) 그를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의 땅으로 내 몰리는 아들의 생사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죽지 아니할 것이다."는 사실을 확신에 확증을 시켜주시는 말씀이라 생각지 않는가?

이 말씀을 친히 들은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창21:14a)


  •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난다.
  • 떡과 물 한 가죽부대 만을 준비하여 건네준다.
  •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쫓는다.


이 모든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광야는 이스마엘이 죽는 곳이다.


  •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여 이스마엘을 죽음의 땅(광야)으로 보내라 하신다.

       이스마엘을 광야로 보내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큰 근심이었다.
       이스마엘이 그 땅에서 결코 죽지 않는다고 야훼께서 약속하신다.

  •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난다.
  •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을 주어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쫓는다.
  •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죽지 않고,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이 즈음에서 어떤 감이 잡히지 않나요?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창22:1a)

이스마엘의 상황에서는 시험하지 않으셨다. 그런 구절이나 내용 설명이 없다. 그런데 이삭의 경우는 시험을 하려 하신다.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b)

야훼께서 제물, 곧 이삭을 죽음의 상태로 몰아 넣으라고 명령하신다. 그것도 아브라함이 스스로 행하도록. 그 명령을 듣고 난 아브라함의 대처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창22:3a)

주저하지 않는다.

곧바로 일어나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나간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런 과감한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평소에 그렇게 결단력이 있던 사람이었을까? 부모된 사람이 어떻게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일에 있어서 "눈 하나" 흔들림없이 행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런 생각은 전혀 해 본적이 없는것 같다. 그저 "아브라함은 본시 믿음의 조상이 될 재목이었으닌까."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경은 말한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이 구절을 대하는 분들은 대개 "이삭이 죽더라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라고 해석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삭이 죽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는 아브라함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서 생각한 자"가 된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들은 "반드시 성취"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염려 또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혼자서 상상하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다. 아브라함은 반드시 일어날 일 만을 생각했다.
왜냐면 아브라함은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창20:6-7a)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3:7)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전에 이미 생각했던 야훼 하나님의 일,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상황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삭은 죽지 않았다. 그럼 누가 죽었단 말인가? 준비된 어린 양보다 먼저 "사지"(死地; 죽음의 땅)로 내몰린 자가 있었다. 숱한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는데, 이스마엘은 죽지 않았다.
즉 모리아 산의 제물대 위에 놓인 제물들은 모두가 죽었으리라. 하지만 죽음의 땅에서 이미 이스마엘이 건지심을 받았던 경험이 있었으니, "아브라함의 기업을 이을 상속자로서 이삭"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약속을 받는 자다. 그럼 그도 죽임을 당하는 일은 (이스마엘처럼)일어나지 않을 줄로 믿을 수 있었으리라.
곧 이스마엘의 상황을 먼저 경험했던 아브라함은 유사한 상황을 "시험"으로 맞이하게 되자 과거에 야훼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일들을 회상했으리라.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9:2)

이미 증거들을 주셨고, 이미 경험했던 간증이 있던 아브라함.

그런 그에게 본격적인 "시험"이 임했다. 시험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부연설명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스마엘의 상황에서 주어졌던 부연설명들이.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21:13b)

죽지 않을 것이라는 부연설명이 이스마엘의 상황에서는 주어졌었지만, 본격적인 시험이 치뤄지는 이삭의 상황에서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스마엘의 상황에섭 보여주셨던 "그 신실하심"을 믿었던 것이다.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고 하셨던 말씀은 곧 광야에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4-5)

이처럼 말씀하셨던 약속이 있으니, '이삭은 분명히 죽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할 만큼 믿을 수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그는 아침 일찍 서둘러 떠나는 결단있는 신속함을 보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어느 시점에서 이삭이 죽지 않는 상황으로 반전이 이루어지겠느냐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스마엘의 경우는, 광야로 보내기 직전에 이미 말씀해 주셨다.그런데 이삭은 그게 아니다. 모리아 산을 향하여 나가는 그 순간에도, 모리아 산에서 모든 순서를 다 행하려 하는 순간에도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시점에서 야훼 하나님을 뵈었다.

그때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좀 특이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b)는 이 구절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b)과 동일한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어떤 방식으로 "야훼 하나님과의 동행"을 이루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 "~을 떠나다"는 것은 leaving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구분하지 말고"의 의미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축복을 전해 주어야 할 대상은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혈족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3:8)

아브라함은 혈연, 지연, 학연 등에 얽매이지 말고, 야훼 하나님께서 "불현듯 나타나서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생활이 이삭을 낳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소 25년은 넘는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상황 속에서 이렇게 불현듯 나타나실 야훼 하나님의 성품을 이미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제물을 드려야 하는 그 명령에는 순종해야 하겠기에, 이삭을 상대로 제물을 바치는 모든 의식에 대해선 순서 하나 하나 성심을 다해 진행해 나가고 있었으리라. 모든 순서를 성심 성의껏 진행하면서도, 아브라함은 불현듯 나타나실 야훼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었으리라. "그 분이 나타나서 여기까지"라고 경계를 정해주실 거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순서를 거의 다 이행해 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야훼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의 상황처럼) 이삭이 제단 위에 놓여졌지만, 죽지 않고 다시 내려오게 될 것이란 사실을 믿었으리라. 이제 마지막 순서다. 칼을 들어서 내리치는 한 순서만 남았다. 이때 칼을 들어 아들을 찌르려 하는데, 야훼께서 불현듯 나타나셨다.
이 순간을 기다려온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칼을 멈춘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22:11)

야훼 하나님의 음성만 들렸을 뿐인데, 아브라함은 하던 모든 행동을 즉시 멈췄다. 
솔직히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는가? 
불현듯 나타나서 경계를 정해주시겠다던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지난 (25년 + 이삭의 나이) 오랜 시간 동안 경험했기에, 이번에도 나타나실 줄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나타나실지는 알지 못했으니, 아브라함은 각각의 순서를 충실하게 행할 뿐 더 이상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으리라.(이때 순서에만 집중하면 음성이 들리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반면 음성에 집중하면 순서를 진행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언제 임할지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음성을 기다리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스마엘의 상황에서는 일을 행하기 이전에 야훼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경계를 정해 주심으로써 이미 답을 얻었는데. 그래서 모든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예행연습을 했지만, "시험"을 치루는 상황이 되다보니 야훼 하나님께서 불현듯 나타나시는 시점이 아브라함에겐 최고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요소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이삭이 제물 위에서 살아서 내려오게 될 줄은 이스마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

우리의 믿음의 행보 또한 이러하다고 믿는다.

1단계의 고난을 견디어 낼 때, 2단계가 열릴 것이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경험했던 내용의 심화단계일 뿐이다.
학업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의 내용이 중학교, 고등학교 등에서 심화단계로 바뀔 뿐이다. 대학과 대학원에서도 초등학교의 교과 과정들이 심화단계로 바뀔 뿐이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1:9)


조상 곧 아버지의 모습을 아들이 물려 받기에 우리는 부전자전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가? 아브라함은 믿음 안에서 우리의 조상이다. 고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는, 우리들의 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은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이미 나타났던 것들이란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

오늘은 믿음의 조상에 대해서 나누어 보았다.

아브라함은 재목부터가 우리들과 다른 성정을 지닌 자로서, 범접할 수 없는 Hero로 여기는 흐름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랜 기간 동안의 훈련과 간증 등을 통해 "시험"을 통과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초중고 그리고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음으로써 사회에 진출하는 순간에 큰 시험을 치루는 우리들의 현재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성경은 교육에 유익한 것(딤후3:16)이지 않는가? 교육은 반드시 시험이라는 관문을 예비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선 아브라함처럼 "야훼하나님의 역사하셨던 지난 날의 증거들"을 잘 기억하고 묵상함으로써 자신에게 임할 큰 시험을 담대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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