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의 원리가 밝혀주는 "빛 되신 주님"의 성품, 그리고 "속히 일어날 일"의 깊은 의미들

페르마의 원리가 밝혀주는 "빛 되신 주님"의 성품, 그리고 "속히 일어날 일"의 깊은 의미들


빛이란 직진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오해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물리학을 잘 아는 분들은 그렇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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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지점을 빛이 이동하려 할 경우 최단 거리를 택하여, 최단 거리인 직선거리를 이동한다고 여길 수 있다.  그 가정을 따르면, 두 점을 잇는 최단 거리는 직선뿐이다. 그래서 빛은 항상 직선 경로로만 이동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생각이다. 특정한 공간 내에서는 그처럼 생각해도 별반 틀리지 않지만, 특정한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들에서는 현상들을 전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이면 물, 공기면 공기. 한 종류의 물질(매질)로만 채워진 곳에서 빛은 직선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다양한 매질로 채워진 공간에서는 서로 다른 매질들이 만나는 경계(면)에서 직선 방향을 벗어나 굴절되어 버린다. 가령 빛이 공기 중을 지나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 굴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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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과학적 사고에서는 페르마의 원리에 의해 "빛의 직진성"이 더욱 명료하게 설명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동차로 이동하려 할 경우, 경로를 선택할 때 2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첫째는 가장 짧은 경로를 택하는 이와 둘째는 가장 짧은 소요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택하는 경우다. 가장 짧은 경로를 택한 이는 "차량 정체"에 대해선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요 시간이 매우 길어질 수 있다. 한편 가장 짧은 소요시간이 걸리는 경로는 정체를 피하는 경로이기 때문에 이동 거리는 멀어질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짧은 시간에 도착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어떤 경로로 여행하고 싶은가?

빛도 마찬가지다.
가장 짧은 거리, 즉 최단 거리로 이동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장애를 만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다.
그래서 빛은 항상 "최소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먼저 검색한다. 이때 검색된 경로가 어떤 특정한 상황 곧 한 종류의 매질인 경우에는 직선 경로가 검색된다. 하지만 둘 이상의 매질로 구성된 공간에서는 굽은 경로 또는 구불구불한 경로가 검색된다. 그러면 빛은 멀리 돌아가는 형태의 굽었거나 구불구불한 경로를 따라 이동한다.

그래서 빛의 직진성이라는 사실 자체는 "빛은 직선 경로로만 이동한다"는 뜻이 아니고, "최소 시간이 걸리는 경로로 이동한다"는 의미다. 과학에서는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빛의 의미"가 이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슈아를 믿는 우리들은 빛되신 주께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신다고 한다.

이때 빛이 인도하는 그 길(the way; 삶)을 생각할 때, 과학적 사고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과학에서 밝히고 있는 사실대로 "빛의 인도함"을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 광야의 지역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12 정탐꾼을 보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본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전 탐색에 대한 요구(신1:22)가 있었기에, 모세는 그 말을 좋게 여겼다(신1:23).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가장 빠른 경로로서 약 320 ㎞ 떨어진 대략 7~10일 정도가 소요되는 거리다. 이 사건의 결과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단 거리"를 이용하지 못한다. 대신에 먼 곳으로 돌아가는 삶(경로)을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다.

이 사건을 보는 대부분의 해석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 초점을 맞추어서 해석하는데, "빛의 직진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한다면 야훼 하나님께선 애시당초 가나안까지의 최단 거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 하실 의도가 없으셨음을 보게 된다. 이 사실에 수긍하게 된다면 다음의 사실도 추론 가능하게 된다.
출애굽 초반 12 정탐꾼을 보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분량은 거인 족 아낙 자손을 상대로 하기엔 너무나 미약했으리라. 그래서 믿음의 분량대로 이끄시는 주님께서는 아낙 자손을 만나는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한 믿음의 분량에 맞는 광야의 길을 미리 예비하셨던 것이라 추론할 수 있겠다. 이는 "가장 좋은 것으로 베푸시길 원하시는 분"의 모습으로써 해석할 수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최단 시간이 소요되는 경로"를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가나안 지역을 취할 수 있게 되기까지 "최단 시간"을 이미 검색하셨다. 그랬더니 7~10일이 소요되는 경로가 아니라, 의외로 40년이 소요되는 경로에서 "가나안을 차지하는 시간"이 최단 시간이었단 뜻이다. 이 사실이 오늘의 여러분들에게 큰 은혜로 임하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최단 시간 또는 최소 시간이란 의미를 표현을 바꾸어 말하면, 
"속히 이루어질 일"
을 뜻한다. 이는 주님께서 일을 계획하실 때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게 되는데 그 일은 창세의 일과도 같다.



주님이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곧 "이미 이루어졌다"라고 주님께선 여기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 이미 이루어질 최소의 시간을
  •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고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이 이해 되시나요?


"김사장. 내가 오늘 중으로 물건을 당신에게 보내줄거야."
"어떤 수송 방법으로 보내면 될까?"

이렇게 말하는 이는 "반드시 물건을 보내는 자"다. 그런데
"김사장. 내가 트럭으로 물건을 보내려고 하는데."
"그 물건이 언제 도착할지 알 수가 없네."
라고 말하는 이는 물건을 보내려는 의지가 부족한 자다.




주님은
"그 일을 이루는 가장 짧은 소요 시간"
이미 결정하셨다. 다시 말해 "일이 이루어지는 그 때와 그 시"(the appointed time; Moed)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행1:7)

이는 예슈아께서 이미 이루셨기 때문이다. 예슈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예슈아께서 이미 이루신 일들을 동일하게 행할 뿐이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에 맞는 고난을 주신다는 그 의미는 "우리가 이미 극복했다"고 주께서 평가하시는 고난만을 허락하신다는 뜻이다.
고난을 맞이하는 우리가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이 즈음에서 충분하지 않을까? 나를 두려워 떨게 하는 고난? 사실 열린 영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이미 돌파한 일들"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고난을 등에 엎고 우리 앞에 오는 사단은 "속이는 자"가 된다. 마치 우리가 고난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꾸미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예슈아께서는 창과 칼로 사단을 대적하지 않으셨다. 그저 아버지가 주시는 음성에 순종하여 나아갈 뿐이었다. 그랬더니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사단의 속임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왜? 이미 이루어진 일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들을 잠시만 정리를 해 보자.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일들"은 

반.드.시.
성.취.
된다. 고로 미리 정하신 일들이란 "이미 성취되었다"는 뜻을 품는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마6:10a)

※ 이런 사실은 예정설을 주장할 수 있도록 캘빈에게 강한 영감으로 작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해졌다고 한다면, 우리네들의 몫은 없다는 사실로 점철된다. 곧 우리들이 존재해야 할 그 의미가 상실된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담당하지 않으신 부분이 있다. 

하늘에서 어떤 사실을 계획하자 마자, 그 일은 이미 성취되어 버린다.

곧 처음(the begining)이 결정되자 마자 곧바로 나중(the last)도 결정되었다. 그런데 처음과 나중은 반드시 "중간 과정"을 통해서 연결되어야만 한다. 
※ 중간 과정을 무시하고 처음과 나중만 설명하면 이것은 마법이다. 더욱이 주관식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문제 아래에 달랑 답만 기록하면, (답이 맞았을지라도) 정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간 과정에 해당하는 풀이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사실은 반드시 중간 과정을 통해 처음과 나중이 연결되게 계획하셨다. 땅 위에서 펼쳐지는 중간 과정으로서.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b)

땅에 뿌려지는 씨는 땅 속으로 들어간다. 열매는 공중에 맺힌다. 씨(seed)와 열매는 땅 위에서 자라난 나무(tree)라는 실체(the real)로 인하여 연결된다. 나무가 있어야만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그 부분은 우리들의 몫이다. 반드시 땅에 속한 존재만이 일궈낼 수 있는 삶이다. 그가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은 절대로 지연되지 않는다. 

반드시 가장 짧은 시간에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고난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시나요?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고난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대하면 그런 삶은 절대로 여러분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 사람이 돈을 쫓으면 돈이 도망을 가고, 사람이 덕을 쫓으면 그때서야 돈이 사람을 쫓아온다는 말처럼.


고난은 끝나는게 아닙니다.

극복하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이미 이겼던 녀석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비겁하게 두려워하면서 물러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승리로 끝날 "그 시간"은 이미(already)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과거)과 나중(미래)는 일을 계획함과 동시에 항상 결정됩니다.
그렇기에 남는 부분은 현재(now; present)뿐이죠.

현재는 어떤 시간입니까?
"~ing"의 의미를 잘 아시죠?

맞습니다. "행하는 것"입니다. 
그저 행하는 것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은
다름 아닌 "현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b)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행함, 곧 현재가 없는 자는 죽은 자 입니다.

이렇듯,
과거와 미래는 한날 한시에 이미 결정됩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현재(present)가 과거와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어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계1:4b)
" from him which is, and which was, and which is to come"


고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일 뿐입니다. 이것이 "시간의 개념에서 바라본 삼위일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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