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키질과 휴거는 예루살렘 성전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헤롯대왕 곧 아기 예슈아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었던 인물에 대해 최근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헤롯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다.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무척 화려한 성전을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전 벽돌들마다 금박을 입혔기에 성전을 파괴하려던 당시 돌 한 장 남기지 않고 금박이를 떼어내려고 모두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헤롯(을 비롯한 솔로몬이나 스룹바벨)이 건축한 그 예루살렘 성전(이후 헤롯 성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던 모리아 산이며, 다윗이 여부스 사람에게서 값을 지불하고 매입한 타작마당에 세워졌다. 

헤롯대왕에 관한 내용을 조사를 하던 중이지만 오늘은 성전이 세워진 장소와 타작마당이라는 특이한 장소의 연결성에 마음이 끌린다. 그래서 이 두 단어는 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오늘의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 4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네 시골에서 흔히들 볼 수 있었던 장면인데, 자신들이 수확한 곡식 중에서 알곡과 그 안에 섞여 있는 가라지(or 티끌)를 나누기 위해 키질(winnowing) 하는 수확기의 모습이 그것이다.
Brainly.ph

키질을 보다 더 잘하려고 높은 곳을 찾았는데,

그 이유는 바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부는 반드시 높은 장소(언덕)를 찾아서 키질을 한다. 이때 불어오는 바람은 알곡과 가라지를 동시에 밀게 되는데 무거운 알곡은 농부가 서 있는 그곳에 떨어져서 그자리에 머문다. 한편 가라지는 바람이 밀어대는 힘에 의해 농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때 둘 간의 차이는 '바람의 영향을 누가 많이 받았는가?'에 있다. 수확기에 불어오는 바람 또는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기 위해 키질을 하는 농부에게 있어서 그 바람은 알곡을 겨냥으로 한 바람이 아니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토지는 지면에 있다. 그래서 농부의 추수는 지면에서 이루어진다. 추수가 끝난 농부에게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키질을 해야 할 곡식이 한 가득이다. 키질에 적당한 장소를 얻기 위해 농부는 높은 언덕 중에서 적당한 바람이 부는 언덕을 지명하여 택한다.

"저곳에 바람이 적당히 부는구나."
"저곳에서 키질을 해야겠다."
수확한 곡식들을 모와서 올라가는 그 언덕은 타작마당이 된다. 수확된 곡식이 '지면으로부터 높은 언덕에 위치한 타작마당'까지 강제로 끌려 올라가는데 그 모습은 휴거(rapture)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후 본격적인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키질(winnowing)이 시작된다.

Christian Truth Center


키질(winnowing)은

바람이 거셀 수록 알곡과 가라지를 더욱 확실하게 분류한다. 이같은 이유로 타작마당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와야 한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역사한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바람은 알곡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바람은 오로지 알곡으로부터 가라지를 멀리 떼어 놓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기에 바람에 매우 순종적인 모습은 실질적으로 가라지에게서 나타난다. 알곡은 오히려 바람의 인도함을 따르지 않고, 가라지가 바람의 인도함을 순순히 따른다. 그래서 알곡은 농부가 펴 놓은 새하얀 천 안에 머무는데 반해 가라지는 바람의 힘에 이끌리어 메마른 땅으로 떨어진다. 농부는 새하얀 천에 떨어진 알곡은 곱게 모와서 창고로 옮겨가고, 땅에 떨어진 가라지는 그 자리에서 모와 불을 태워 버린다.

농부가 펴 놓은 새하얀 천이 있는 그 자리는 성전이 서 있는 곳으로서 예슈아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성소의 모형에 불과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히9:24.현대인의 성경)

사람이 만든 성전이 아닌 진정한 성전은 어디에 있을까?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개역개정)

그래서 예슈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25:46.개역개정)


우리 모두는

각자의 처소, 또는 각자가 굳건하게 믿는 성전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어떤 성전은 영벌이 있는 곳이고 다른 성전은 영생이 있는 곳이다. 그 차이는 무엇으로 구분지을 수 있을까? 사람이 만든 성소에는 예슈아께서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하늘의 성소에는 예슈아께서 계신다. 다시 말해 예슈아께서 계시는 그곳이 진정한 성소요 영생이 있는 곳이란 의미다. 그럼 예슈아께서 계시는 성소에 들어가려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들어갈 수 있을까?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0.개역개정)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자가, 영생이 있는 그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지극히 작은 자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지극히 작은 그를 기필코 찾아야 할 것이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25:37~39.개역개정)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부지중에..."

자기 자신이 특별히 '신앙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던 순간이 아니다. 그냥 일반인과 다르지 않게 생각하는 중에 그가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던 것을 말한다. 그것이 '부지중'이다. '신앙인이라는 특별한 의식을 갖지 않는 중'에 살아가던 모습.

그런데 성경은 '부지중에'라는 말에 매우 큰 비중을 두었다. '부지중'에 행한 일로 큰 복을 받은 이가 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13:2.개역개정)

사랑에 빠진 왕도 부지중에 자신의 사랑을 찾는다.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아6:12.개역개정)

'부지중에'라는 말은 그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인의 삶일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여러분 가운데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 그들이나 우리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들은 그 말씀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4:1~2.새번역)

말씀을 듣고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약속된 안식, 곧 예슈아께서 계시는 그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럼 믿음과 결부시킨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2:26.개역개정)

여러분.
무척 성스럽고 화려함 가운데 경건이 물씬 풍겨나는 찬양을 드리고 최고의 미사어구로 이루어진 설교를 들었다 할지라도, 듣는 것으로 끝나버린 이는 듣지 아니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들은 것이 있었다면, 들은 것을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들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온전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삶의 정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5:19.개역개정)

자신이 무언가를 보았거나 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는 이들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해 보라는 요구에 응답을 하지 못합니다. 몸으로 표현해 보라고 말하지만 말도 못하고 행동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슈아는 아버지가 행하신 대로 행동 했으며,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9b.개역개정)

예슈아는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계산된 행동에서 나오는 신앙인의 삶은 가식입니다.

포장하는 회칠한 자의 삶입니다. 계산하지 않고 그저 몸이 이끄는대로 행동을 했을 뿐인데, 자신이 보고 배운 것이 몸에 익숙해져 버린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예슈아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동하고, 모세가 했던 것처럼 담대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물론 연기자가 자신의 맡은 배역을 위해 인위적으로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행동을 해야하는 경우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요즘은 의복들이 대부분 기성품입니다. 그래서 소비자들이 기성품을 사게 되면 누구나 하는 공통된 행동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맡게끔 줄이거나 늘리는 리폼(re-form) 또는 수선을 당연히 합니다. 이처럼 예슈아 그 장본인이 아닌 이상 예슈아와 동일한 방식의 행동들을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슈아께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된 근본적인 원리만큼은 우리들도 동일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개역개정)

양식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도출이 되는군요. 역시 타장마당이라는 단어가 성전이 세워진 장소라는 곳과 연결된 이치와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양식은 우리를 택하시고 기름부으신 이의 뜻을 행하여 그 일을 이루는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군인이 되기 이전에 훈련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다시 자대에 배치 받은 이후에도 연일 훈련의 연속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전쟁이 일어났을 때, 훈련소에서 배운 것을 매 순간 상기하면서 더듬더듬 옛기억을 따라 행하도록 하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훈련소에서 배운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지 않겠는지요.

성경 말씀을 다독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독했던 그것은 헛된 일이 됩니다. 많이 읽었고, 많이 들었으며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이수했다는 자체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단 하나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직접 행했다는 그것에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24:25~26.개역개정)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중략)...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눅17:21, 23.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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