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하지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예언한다. 그래서 어쩌라구?

성경은 말한다.

  •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살전5:20)


그래서 예언을 하시는 분들은 예언을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구절을 먼저 언급하곤 하신다. 좋은 의도에서 그러실거라 믿는다. 하지만 어떤 거짓 예언자들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말로 상대방을 마음껏 조정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우리는 이 문제에서 그렇게 자유롭지만은 않는 것 같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대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예언하는데,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들은 폐하여진다"(고전13:9-10)는 내용을 언급하고 싶다.

고전13:9-10의 말씀은 살전5:20의 말씀과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본 필자만의 우둔한 자에게만 느껴지는 감촉일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서로 합력한다.
반.드.시 합력한다. 
합력함으로써 예슈아를 증거한다. 고로 서로 상충하는 성경 말씀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상대방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극심한 논쟁"은 무엇을 얻고자 함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언을 멸시하면 안 된다.

하지만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 예언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흘러 나온다. 고로 그 예언은 부분적 것이며,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폐하여 없어진다. 즉 소멸된다는 뜻으로서 영원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것임을 뜻한다.

이러한 접근으로 살전5:20의 말씀과 고전13:9-10의 말씀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필자는 물론이고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의 마음조차도 몹시 불편하게 만들거라 여겨진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말씀이 말씀을 대적하는 구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나눔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씀을 다시금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살전5:20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여길 수 있고, 그렇게 여기고 있다. 왜냐면 살전5:20의 말씀을 많은 분들이 인용만 할 뿐, 강론이나 설교를 통해 설명할 필요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전5:20의 말씀을 보기에 앞서, 바로 앞 구절을 우리가 살펴보면 좋겠다.

  • 헐몬산에서 흘러 나온 물에는 생명이 있기에, 그 물이 유입되어 채워진 갈릴리 호수(바다)가 생명의 바다가 된다. 마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처럼. 그런데 이 속담은 "부전자전"의 원리를 그대로 대변해 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b)

아버지가 선을 행하는 분이시면, 아들도 어김없이 선을 행하는 자다.
혹 거짓의 아비를 둔 자는 어김없이 거짓을 말하는 자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이해하는 부분에서 "어원"(뿌리; root)을 찾아서 함께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해가 되실 줄로 믿는다.

살전5:19의 말씀도 간단하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5:19)

먼저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서 곧이어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명한다.
이 두 구절은 명령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즐겁게 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명령으로 규정되었다. 딤후3:16의 말씀을 인용해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3:16a)이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말하길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이 두 구절이 합력하여 이룬 결과는 "하나님(성령)의 감동은 성경이요 예언이다"가 된다.

그럼 이 경우에 성경을

  • "온전한 것이 오면 폐하여 질 것"으로 보는 게 합당할까? 

아니면

  •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필자의 글은 거의 대부분 "애매모호한 영역"을 가리키고 있다.

  • 봄이 오면 그  다음에 여름이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반드시 온다. 그러나 봄과 여름의 명확한 경계를 아는 이는 전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 모두가 애매모호한 영역 안에서만 알게 된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여름이 왔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 그러나 주변을 늘 예의주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먼저 여름이 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사람보다도 계절의 변화에 더 민감한 존재들은 허다하게 많기 때문에.


"하나님(성령)의 감동은 성경이요 예언이다"는 결론을 얻은 이후,

"우리는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13:9)의 말씀을 적용하고자 한다. 고전13:9에서 언급된 예언이 딤후3:16에서 언급된 "성경"과 동격이 될 수 있을까?
자칫 잘못하면 "성경(딤후3:16)은 온전한 것이 오면 폐하여 질 것"으로 오인될 수가 있는가 하면, 성경책 속에 난무하는 구절들이 마치 "성경 말씀들이 서로간에 대적하는 듯한 형국"이라는 사실에 "No"라고 답변을 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이지게 되는 것 같다.

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결혼한 어느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한다. 그래서 남편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든, 심지어 '(달을 가리키며) 저것은 해다'라고 말해도 믿어진다. 사랑하는 남편의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이 믿어진다. 그녀는 남편의 말대로 행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

역시 결혼한 어느 한 여인이 있다.

그런데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남편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든, 심지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의 말이라면 믿음이 저절로 사라진다. 그래서 남편의 말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에, 그녀는 남편의 말을 지켜지 않는다.

이 두 경우를 생각해 보자.

문제의 포인트를 놓치게 되면, 우리의 논쟁은 엉뚱한 곳으로 튈 수 있다. 

즉 "남편이 아내에게 해 준 말의 정체"를 파헤치는데 모든 열심을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첫 번째 아내의 남편이 한 말과 두 번째 남편이 한 말의 차이를 구분하여 어떤 내용이 아내된 이에게 더 유익을 주는지, 그 부분을 연구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이게 어떻게 보면 "참 지혜로운 모습"처럼 여겨질 수 있겠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윗물이 맑은지 혹은 더러운지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면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모두가 잘 아시다시피)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느냐 혹은 사랑하지 않느냐"에 있다.
본질만 이해하면
그 다음은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
일 뿐, 그래서 어떠한 의미조차 부여되지 않더라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성령)의 감동은 성경이요 예언이다."는 문제에 있어서, 이것이 책(book)을 뜻하는 것인지 혹은 부분적인 예언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구분하고자 하는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구분짓고자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 견해일진 몰라도, 그 노력은 결실을 맺기 힘들 것이라 사료된다.

살전5:20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구절에 앞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5:19)는 내용을 먼저 음미해 보자.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이 소멸되게 할 수 있을까?

예슈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이) 얻게 된다고 했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 거저 받은 은혜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겠는가?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성경이 인정하는) "거룩한 성전"(고전3:16)이 되어 버렸다. 이게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일까? 결단코 사람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진귀한 것 중의 진귀한 것이다.

그런 진귀한 사실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소멸될 수 있을까?

여러분. 여러분이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새생명"(자녀)을 얻었습니다.

이때 그 새생명이 어떻게 여러분의 가정 안에서 소멸될 수 있을까요?
정상적인 사고 방식 안에서 생각할 때, 자녀가 가정 안에서 소멸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Absolutely Not!!!!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비이성적인 행위 또는 자녀를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나름의) 반인륜적인 행위가 있을 때 자녀가 소멸되는 것을 간혹 메스컴을 통해서 듣곤 합니다. 그 소식을 접한 우리네들의 마음은 편한가요? 즐겁나요? 솔직히 소식을 접하는 이의 마음도 몹시 괴로울 정도입니다.

성령이 소멸되는 일을 행하는 이는

다시 말해서 "성령을 참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자"임을 알 수 있다.
거저 자신의 바램이 있다면, 그 순간 알라딘의 요술 램프 속에 깃들어 있는 지니 쯤으로 여기고서 "무엇을 가능하게 하라"는 식의 주문(order)을 내리는데 성령님을 사용하곤 한다. 그런데 주문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몹시 화를 내면서 성령님을 더욱 멸시한다.

다시 말해서 그런 이는 본시 "성령(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요 무시하는 자다.
그렇기에 성령(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말씀도 귀담아 듣기를 원치 않았고, 이행하고자 뜻을 세울 필요조차 느낄 수 없었다.

오늘의 나눔에서 제시하였던

"피할 수 없는 논쟁" 또는 "답변을 제시하기 어려운 논쟁"에 대한 답을 내 놓고자 한다.
우리의 마음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성령(하나님)에게 집중되어 있는지 혹은 (성령님이 주시는) 멋스러운 예언에 집중되어 있는지.

자신의 귀에 듣기 좋은 예언을 듣기 위해, 허다한 예언자들을 찾아 다니는 무리들이 있음을 필자는 본 적이 있었다.

  • "성령(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이 주시는 말씀은 어떤 것이라도 좋아"라고 여기기 보다는, "좋은 내용의 예언을 받아야 해"라는 일념 하나로 무수히 많은 예언자들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 솔직히 말하면 그런 이들은 "예언을 멸시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성령을 소멸케 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필자의 소견이 틀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이들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이제는 그런 사정들이 해소되어서 현재는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분"에 대해서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분이 주시는 "선물"에 집중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분 그 자체를 사랑할 순 없을까?

남편을 남편의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순 없을까? 혹은 아내를 아내의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순 없을까? 자녀를 자녀의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순 없을까?

  • 왜 옆집 남편(아내, 자녀)의 이미지를 도용하여 자신의 남편(아내, 자녀)에게 덧 씌우려 할까? 그의 마음은 이미 자신의 남편(아내, 자녀)를 사랑하지 않고 옆집 남편(아내, 자녀)가 자신의 실제 남편(아내, 자녀)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비약이 심한 표현이라 비난받을 수 있겠으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명백한 "영적 간음"이다. 자신의 남편(아내, 자녀)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았다.

왜?
그 마음의 중심
에는 이미 옆집 남편(아내, 자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령(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예언을 예언과 비교하면서 자랑하거나 낙심"하곤 한다.

"누구는 좋은 예언을 주고, 나는 이딴 예언을 주십니까?"라고.
그런 이들은 "예언을 멸시하는 분"이십니다. 그들은 그 예언이 "부분적"이며 그래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폐하여지는 것"이라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성경 속의 내용들이 마치 서로 극렬하게 상충하는 존재들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성령(하나님)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이들은 다릅니다.

그가 어떤 예언을 주시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모두 귀하고 최선을 다해 행하고 싶은 존귀한 것들입니다. 비록 폐하여지는 순간이 올지라도.
그의 마음은 성령(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pixabay


여러분.
다소 난감한 내용 혹은 몹시도 (신학적 노선에서)민감할 수 있는 부분을 지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길을 자주로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애매모호하고 두리뭉실한 넓은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좌우의 날샌 검보다도 더 예리한 길을 걷는 순간을 즐거워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는 성령(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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