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슈아의 비하인드 스토리] 당신은 예슈아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허다한 군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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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설교 또는 은사자의 간증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곤 한다. 성경 66권 중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지만, 꿈과 환상 등을 통해 천국과 지옥 등을 경험하면서 예슈아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것이라는 내용들에서 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만 나고 자란 이가 미국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개하면 매우 괴이하거나 이색적이라며 놀랄 순 있다. 하지만 자초지정에 대한 설명 곧 상세한 설명을 충분히 할 경우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그럴 때 납득하기 어려운 낯선 사실에 대해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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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세한 설명도 없으면서 '그냥 믿어라!'고 한다해서 믿어질까? 납득할 수도 없는 사실에 대해 마치 마인드컨트롤(최면)을 하듯 '그래. 나는 믿는다. 나는 믿어질 것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면 그게 믿어지던가?
예슈아의 상황을 되짚어보자.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그 사실에 대해 예슈아는 어떻게 대하셨던가?
예수께서...(중략)...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눅22:40~42.새번역)
이 대목에서 특이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예슈아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고 계신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고 그렇게 설교를 들어 왔으며 배워왔다. 그런데 예슈아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익히 보아 왔었지만, 눈여겨 보지 않는 그 대목.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if thou be wi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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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만일"(If)이라는 가정을 사용하셨을까?
가정이라는 사실은 확신 또는 확정된 사실에 사용하지 않는다. 바뀔 수 있거나 변화될 수 있는 여지(틈; 기회, opportunity)가 있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예슈아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감당하지 않아도 될 어떤 기회가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이같은 기도를 하셨으리라. 그렇지 않는다면 어찌 허튼 소리를 예슈아께서 하실 수 있겠는가? 농담으로? 가당치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뜻'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신 상황에서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서 막연한 상황으로 터벅터벅 산에서 내려와 마지못해 십자가에 달리셨던가? 아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이라는 기도를 하였을 당시,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납득 가능한 사실(증명)을 예슈아는 전해 듣게 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히12:2a.개역개정)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받음으로써 십자가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난 이후에 만나게 될 기쁨'을 기도 가운데에서 보신 것이다. 그러자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충분한 납득을 얻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자신만이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을 확신하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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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납득되시나요?
이해가 안 된다면 설교가 끝난 이후에 설교자에게 다정하게 다가가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질문이 금지된 공산주의에서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궁금한 것을 궁금하다고 여길 수 없고, 납득되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을 거부당해야 함이 옳은 것일까요?
"설교를 들으면 그냥 아멘 하고 믿어!"
"궁금해 하지마. 그냥 믿는거야!"
"믿음이란 그냥 믿는거야!"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너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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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조차도 합당한 조건이 맞춰질 때 비로서 동작을 합니다. 되지도 않는 조건을 집어 넣어 놓고서 동작을 안한다고 기계를 탓하는게 옳을까요? 인터넷의 주소를 입력해야 하는 곳에는 주소를 입력해야 합니다. 내 개인의 생각을 입력한다고 해서 인터넷이 열리는게 아니란 뜻입니다. 기계조차도 이런 상황인데, 하물며 사람이 이보다 못할 수 있겠습니까?
친밀한 자와 그렇지 않는 자의 관계는 스스럼 없이 질문을 할 수 있느냐의 부분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친밀한 자녀는 자신이 궁금하다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선 거리낌 없이 질문합니다. 답변을 듣는 순간에도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이웃집 아저씨를 상대로는 이같이 말하는 경우가 거의 드뭅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아~ 그렇군요'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 버립니다.
이 차이가 예슈아의 제자였던 이들과 예슈아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 들었던 허다한 군중 간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다한 군중은 절대로 제자라 불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슈아의 말씀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를 떠나 각자의 집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슈아께 조용히 되묻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마13:34~36.개역개정
여러분들은 설교를 들은 이후에 어떤 행동을 취하십니까?
이해가 안 되지만 그냥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시나요? 아니면 설교자가 조용한 시간을 가질 때 다정하게 그 옆에 다가가 납득하기 어렵거나 의문이 생기는 부분들에 대해서 다시금 질문을 하시나요?
친밀한 자 만이 질문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친밀함을 가진 자 만이 '담대하게 의문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고전14:29.개역개정)
'분별'하십시오. 그것도 당당하게.
야훼 하나님께 당당하게 질문하십시오. 담대하게 의문을 가지시고 그 의문난 점들을 일목요연하게 기도 시간에 나열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자신있게 요구해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시던 예슈아께서 받으셨던 그와 같은 명확한 증거를.
의문이 생기고 질문 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한 자, 예슈아의 제자인 것을 삶 속에서 체득(터득) 또는 깨달음을 얻은 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명료한 삶의 자세입니다.
당신은 예슈아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허다한 군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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