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을 듣는 자는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 예언을 이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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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 대부분의 예언을 사모하는 이들을 보면, (이것은 신앙을 떠나서) 장래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자체에 가치를 둔다고 할 수 있다. 그같은 이유에서 세상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예언의 형태를 취한다 싶으면 그것은 단연코

통계(statistics)
다. 통계가 사용되지 않는 부분이 과연 몇 개나 될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각자만의 통계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일례로 간판을 제작하시는 고졸 출신의 사장님의 경우를 보면, 

"이 업종에는 이러한 색상을 사용하시는게 가장 무난합니다."
라는 말을 주로 한다. '무난하다'는 표현은 '통계적인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그 결과를 알 수 없겠지만, 장래 개업하고 난 이후에 손님들의 반응을 통해 알게 될 사실로서 '호의적인 평가'를 얻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건 많이 배웠느냐 혹은 어떤 신적인 능력을 가졌기에 말 할 수 있는게 아니다. 해당 분야에서 나름 성실하게 일해 온 분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통계적 발언이다. 통계 또는 예언이란 이처럼 우리들의 실제 삶 속에 난무하리만큼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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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예언이라는 단어에 몹시도 민감하게 대응하고, 자칫 조금이라도 실수를 할 손 싶으면 불편한 마음을 감추질 못한다. 그 이유는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예언은 일상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것으로서, '야훼 하나님의 경건하심에 관련된 사역에만 관련된 내용들이다'라고 여기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앞서 설명했듯이 '누구나 통계적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실제적 사실과 다르게, 교회(공동체)안에서는 '예언이란 성경적으로 배운 자들에 한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목회자나 혹은 은사자가 아닌 이들이 예언적 사실을 말하면 쉽사리 묵살 당한다. 예언은 신령한 것으로서 '배우지 못한 자'들에겐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했던 '간판업자 분의 통계적 발언'을 다시금 생각해 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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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애매한 표현이다.

마치 영(spirit)을 향해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애매모호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보자.

간판업자가 되는데에는 어떠한 조건도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간판이라는 직종을 마음으로 받아 들인 자'
'간판이라는 일을 자신의 것으로 영접(수용)하는 자'
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모두 아는 사실들로 더욱 심도있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

그럼. 간판업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통계적인 예측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생각할 수 있다. 이때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의 통계적 예측만이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안겨줄 것이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매일같이 술만 마시고 일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이가, 자신도 간판업자라면서 통계적 발언을 한다면 그 말을 우리는 믿어야 할까?

Absolutely Not!


| 절대로 믿을 수 없다.

그래서 간판업자의 말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분별(비판; 분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요약해 본다.

우리는 누구나 '통계적 발언'(예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실하게 자신의 소명에 임하는 자의 '통계적 발언'(예언)만이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면 그는 초보시절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보면서 자신만의 '통계적 발언'(예언)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날카롭게 연단을 시켜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4:12.개역개정)

하지만 간판업자라 해서 항상 그의 말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통계적 발언(예언)이 연일 적중한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 그 자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예언자들이라 할지라도 100% 적중 또는 100%의 진리를 담아내는 예언이라 할 수 없다. 일례로 어떤 목사님이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영적체험담을 간증하신다. 그 간증을 듣고 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천국과 지옥은 어쩌고 저쩌구 한데"
"아무개 집사님. 목사님이 전한 천국과 지옥의 내용 이외의 다른 사실은 말하지 말아주세요. 우리를 미혹하는 말은 싫습니다."
"나에겐 오직 그 목사님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간증만 있으면 됩니다."


어찌보면 신념에 찬 모습이 좋아 보이는데, 더 심도있게 살펴보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앞서 이야기 했던 간판업자 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길을 걷다보면 간판 없는 곳이 없고, 우리의 모든 목적지는 간판업자에 의해서 제작된 홍보물을 이정표 삼아 도달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들 삶 속에는 간판이라는 자체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로 엮인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모두가 간판업자의 말에 신념을 가져야 할까? 간판업자의 말에 신념을 가져야 할 자는 그 업자로부터 간판을 의뢰하여 제작하는 업주일 뿐이다. 그 외 영업장을 찾아가는 손님들 가운데 간판을 예쁘다거나 이색적이라며 관심을 두는 몇 명이면 족하다. 그 외 허다한 무리는 간판업자의 말이 진리를 담았다 할지라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허다한 무리들을 향해 '잘못된 자들'이라며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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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다.

| 어떤 예언이든 그 예언은 100%의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13:9)
어느 누구도 한 눈에 코끼리의 모습 전체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자가 (상하좌우의 4개 측면으로 분류할 때) 한쪽 단면 뿐이다. 그래서 겨우 25% 내외 일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인 증거다.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그의 경험은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담아낸 100%가 될 수 없다. 필자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25% 내외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가 보지 못한 더 크고 은밀한 비밀들은 당연히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같은 부분들이 전파되려 할 때면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배우지 않은 자가 들려주는 천상의 비밀은 있을 수 없다"
라고 치부해야 할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허구헌날 예슈아와 그의 제자들을 향해 비난하듯 말했다.

"저들은 배우지 아니 하였거늘..."
예슈아와 그의 제자들의 삶을 보자. 특히 예슈아의 삶을 단도직입적으로 살펴보자. 그의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예슈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가?
이 질문이 옳다고 여기시는 분 있으신가요? 혹은 이 질문이 그릇되다고 여기시는 분은 없나요?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위의 질문의 답은 No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19:30.개역개정)
예슈아의 삶은 메시아로서 이미 예언된 그 사실들을 몸소 이루셨을 뿐이다. 이를 더 쉽게 표현하자면

예슈아와 성령님은
동행하는 삶을 통해
이 땅에서 예언을 몸소 이루셨다.

또는

육신을 입은 자와 영을 입은 자가
서로 합력하여
이 땅에서 선을 행하였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택함받은 자'의 택함을 받은 목적이 될 것이다. 택함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에 가기 위함이 아니다. 만일 천국에 가는것이 목적이 된다면, 택함을 받음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 이 땅에서 더 이상의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라. 그런 이들이 없다. 택함을 받은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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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선포된 예언, 곧 내 삶에 성취되어야 할 예언들을 동행하는 나를 통해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것이 소명(calling)이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6:8.개역개정)
주님의 뜻이 이미 창세전부터 세워지셨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 택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을까? 거짓되고 불충한 신하를 보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스스로 자진하여 주인에게 충성을 다 하는 그런 자를 보내는게 좋을까? 우리는 주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늘 하루도 살아가야 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개역개정)
주기도문을 주신 예슈아의 본 뜻은 이러하다. 예배순서의 끝을 알리는 멘트로 주로 사용되고 있는 요즘의 주기도문이지만,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기도문의 참 뜻은 '주님과 동행함으로써 예언을 이 땅에서 이뤄나가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 것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2.개역개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
(롬8:28.개역개정)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즉 우리는 삶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 곧 예언이 우리 삶에서 살아서 피어나도록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 예슈아의 모습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며 예슈아께서 행하신 것처럼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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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사랑하는 자
율법
다 이루었느니라
(롬13:8.개역개정)
율법을 이루는 것은 613개 조항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실제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 살아가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기에 대통령이나 대단한 권력자 또는 많이 배운자여야 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것도 아주 허름한 삶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변에 불러 모와주신 그 이웃들에게 예슈아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면 된다. 이것이 예언을 이루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며 예언을 내 삶에서 친히 이뤄나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을 나를 필요로 하신 것이다. 내 삶에 이미 예언된 수 많은 사랑들이 창세전부터 선포되어 왔기 때문에.

그 사랑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라며 소망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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