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 듣기] 서로 소통하는가?

[하나님의 음성 듣기] 서로 소통하는가?

두 사람이 있다.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상하게도 상대방의 말에 동문서답격으로 대한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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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대화를 한다"고 말할 때에는 단순히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 되는 것으로 오인하곤 한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부모가 자녀를 상대로 열심히 열변을 토하듯 말하고 그 자녀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자세로 임하는 모습이다. 이럴 경우 서로간에 대화가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부모의 의중을 자녀는 대화 내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부모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의 행동은 필경 동문서답격이 된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용어로 다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입장"(처지)이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배려"를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고 한다.
Put yourself in other's shoes!
易地思之


언어는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의 결과를 기대하면서 동일한 배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왜 "입장 바꿔 생각하기"란 배려의 모습을 각 사람들이 품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는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리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용어를 곁들인다면, 서로 다른 "차원"을 같은 차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이들이 각자의 신령한 말들을 하겠지만, 이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꽹과리의 울림과 같을 뿐이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b)

결국 상대에 대한 배려, 곧 역지사지의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




믿는 성도들은 할 수만 있다면 쉬지 않고 기도를 한다. 야훼 하나님께.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왜 그럴까?
기도는 우리의 목소리와 주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대화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럴 경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있다면, "대화를 하고 있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에 대해 우리 자신은 확신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 혹시 나 혼자서만 열심히 말하고, 상대방이 말하는 소리 또는 그에게는 말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건 아닌지.
  • 또는 내 입장만 생각할 뿐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화하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우리는 스스로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다.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잘 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100 점 또는 100 %라는 완벽(perfect)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양심에 손을 얹어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자 없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완벽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야훼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완벽 혹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이 사실을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진리에 이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진리에 스스로 도달 할 수 있는 자들은 하나도 없다. 고로
우리가 진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진리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어렵다.
바로 "역지사지"의 배려하는 모습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내 입장(차원; dimension)에 갖혀서 주님의 입장(차원)을 보고자 한다면, 입장(차원)이 다르기에 제대로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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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증거는 "빛의 굴절(refraction of light) 현상"이다. 물이 든 컵에 수저 하나가 꽂혀 있다. 그 수저를 컵 바깥쪽 공기 중에서 바라보는 경우와 껍 안쪽 물 속에서 바라 볼 경우 다르게 보인다. 이는 빛의 성질이 만들어 내는 굴절 현상 때문이다. 굴절 현상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물체의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게 한다. 물 속에서는 수저의 위치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데 반해 물 밖의 공기 중에서 바라 볼 경우에는 (가짜 또는 미혹하는 정보로서) "달라진 위치"를 보게 한다. 이처럼 동일한 물체를 바라보지만 관찰자의 입장(차원)에 따라 바뀐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상식이자 과학적 사실이다.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런 변화(고난)을 내 삶에 허락하셨을까?"하고 야훼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런데 문제는 "삶의 고난이 너무 무겁고 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임하는 고통에 집중하여 기도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삶의 고난이 "나의 죄" 때문에 온 것인지 혹은 "조상의 죄" 때문에 온 것인지를 찾아 본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죄하고 판단"하려 든다.

필자는 작은 권면을 하고 싶다.

삶에 고난이 찾아 오면, 일단은 "그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를 야훼 하나님께 직접 들어보시라고.
내 입장에서 "고난을 허락하신 야훼 하나님의 의중"을 파악하려 하기 보다는 "고난을 허락하신 분"께 그 의중을 직접 물어보는게 지혜요 현명한 행동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배려를 해 줄 때, 그 배려를 받은 야훼 하나님도 스스름 없이 우리를 배려해 주시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입장을 같게 하라.
차원을 같게 하라.

그리 할 때 상대방이 무슨 말을, 어떤 의도로 하는지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 하는 자가 바로 진정한 "참된 친구"다.
그런 친구가 다름 아닌 "부부" 사이에서 나타난다.
부부 사이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을 키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는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 그 사랑하는 마음은 
  • 아내를 배려하는 행동에서 시작되리라 믿는다.
  • 아내의 입장에서 집 안을 돌보자.


이것이 남편들이 해야 할 마땅한 일, 곧 상식(common sense)이다.

세상은 이러한 상식을 폐하려 한다.
의미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사랑을 알아가는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함이 옳을 줄 믿는다.


우리는 아내를 사랑하자.
아내의 입장을 고려하여 가정을 돌보자.
그리하면 아내는 남편을 왕같이 섬길 것이다.
그 가정에 기쁨이, 화목함이 풍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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