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마 머리 아줌마 부대를 구분할 수 있을까?

일전에 전해 들은 말이 있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아주머니들은 대체적으로 파마머리를 즐겨 하신다.
언제 마음 편하게 머리를 다듬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리라.
파마 머리를 하고 계신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본 외국인은 이 모습을 매우 특이하게 여기고 있었다.


"한국의 아주머니들은 죄다 파마 머리를 하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다."

는 식이다. 웃자는 이야기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가슴이 찡하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나눠보자.
이는 인종 차별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앞선 파마 머리는 외국인이 본 우리 나라의 모습인데 반해, 이번에는 우리 나라가 바라 보는 외국인의 모습을 논하기 위함이다. 

아프리카의 아주머니들을 모와 놓았다고 하자. 이 아주머니들을 바라본 우리들은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이같은 사실은 누구나가 잘 아는 이야기다. 그래서 필자는 누구나가 잘 아는 이야기를 통해 성경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제 그 여행을 떠나 보자. 



마파 머리를 하신 아주머니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그분들은 모두 구분지어 분명히 볼 수 있다. "개똥이 엄마, 유복이 엄마, 순복이 엄마, 등등"으로.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의 삶이 거의 없는 외국인은 이러한 사실들을 구분해 낼 수 있는 안목(분별력)이 없다. 
반대로 아프리카 아주머니들을 바라본 우리 나라 사람들 역시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안목(분별력)이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간단한 사자성어로 말하면 "유유상종 또는 동변상련"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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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가 다르면, 

상대를 정확하게 바라보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다른 표현으로는
"처지가 같아야만 영분별력이 주어진다"
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재벌 출신은 서민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반면, 서민 출신 역시도 재벌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힘들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면, 거지 나사로를 품에 안고 있는 아브라함이 음부에 있는 부자에게 하는 말로서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16:26b)

가 있다. 그래서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유유상종의 질서대로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자성어에 빗대어 성경을 풀이한다는 자체에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테지만, 조금만 더 인내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유유상종의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생각하고서 다음의 성경 내용을 함께 나눠보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61:1)

야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신 것, 곧 야훼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어 "기름부음 받은 자"(a messiah not the messiah)로 삼으신 목적을 살펴보자. 
  • 가난한 자에게 소식을 전하게 하신다. 
  •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신다. 
  •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신다. 
  • 갇힌 자를 풀어 주신다.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자의 모습을 하고서 가난한 자에게 찾아가면, 그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말을 믿어줄까? 늘 즐거운 생활만을 했던 우리가 마음 상한 자에게 찾아가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을까? 포로가 되어본 적이 없는 이가 포로된 자의 마음을 이해할까? 갇혀 본 적이 없는 이가 갇힌 자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를 느낄 수 있을까?


No! Absolutely Not!. 

불가능하다. 

어떤 외국인도 파마 머리의 아줌마 부대를 분별할 수 없고, 오직 그 아줌마들을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그 자녀들에게만 분별력이 주어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미 가난한 자의 경험을 최소한 경험했어야만 했다. 
최소한 포로가 되어 본 적이 있어야만 했다. 
최소한 갇힌 적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상한 경험이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더욱 좋은 조건은 지금도 "가난하고, 마음에 상처를 잘 입으며 포로가 되었거나 갇혀 있는 상태"일 때 효과는 더욱 크게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과부 마음은 홀애비가 잘 안다."는 말처럼, 우리가 지금 고난의 순간에 처해 있기에 고난의 삶을 겪고 있는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다. 서로 유사한 처지가 된다면, 그가 전하는 말은 영적 영향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야훼 하나님은 지금의 우리에게 "고난의 삶"을 허락하셨다. 


우리들이 그토록 기도하지 않았는가? 
"내게 당신의 영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나를 기름부으사 당신의 뜻대로 행하게 하옵소서"
라고. 


그렇다. 그 기도를 야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그 기도대로 행하시기 위해 먼저는 여러분들을 가난하게 만드시는 일부터 시작하셨다. 마음에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도록 하는 일부터 시작하셨다. 어떤 이는 포로가 되게 하시고 어떤 이는 갇힌 자가 되는 일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일을 행하셨다. 


여러분.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누구보다 기뻐하시는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허락하셨는지,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6:8)

가난한 자를 구원하고 싶은데,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고 싶은데, 
포로된 자, 갇힌 자를 자유하게 풀어주고 싶은데, 

그런데 그곳에 갈려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야훼 하나님은 너무나 슬퍼하고 계셨다. 그때 여러분들이, 그 순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저희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여 나를 보내소서." 


이같은 고백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게 아님을 압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시면, 어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귀한 고백으로 인하여 

지금의 우리는 메시아(a messiah not the messiah)로서 맡겨진 책무를 다하기 위해 "유유상종 또는 동변상련"의 삶이 있는 자리로 내려가는 일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소망을 놓지 마십시오. 야훼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보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 되었지 않았겠습니까? 


자! 
이제는 삶의 고난 앞에서 주저 앉아 있지 마시길 바랍니다. 
힘을 내어 다시금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주의 영이 당신과 당신의 가정에 더욱 큰 생기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사6:8a)의 내용처럼, 이미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에게만 허락된 복된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 언제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분께서 친히 자신의 음성을 여러분들께 들려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만큼 가치있고, 사랑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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