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공부를 하는 본질적 이유 그리고 신앙의 본질적 이유

학생이 공부를 하는 본질적 이유 그리고 신앙의 본질적 이유



필자는 자라면서 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수업을 들으며 그에 맞춰 공부를 했다.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그리고 대학 4년으로 끝 마치려다가 이에 조금 더 공부하기로 결심하고서 대학원 석사 과정 3년, 박사 과정 3.5년으로 도합 약 23년(22.5년)이다.

23년간 공부를 했다.
그렇기에 이즈음에서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걸까?"라는 단순한 질문 하나 정도는 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걸까?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허다한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기꺼이 그 일을 행하는 이유는 단 하나. 무언가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pixabay


그런데 자신이 왜 그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 삶은 그야말로 헛된 삶이리라.


초중고 12년, 대학 4년으로 최소 16년 정도는 공부를 하는 현시대의 우리들.
여러분은 "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나요?


훈련소에는 각양각색의 젊은 청년들이 모여있다.

모두가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 과정"이다.
사격훈련, 각개전투훈련, 유격훈련, 검문검색 등의 훈련을 배운다.

사격 훈련에서 표적을 잘 맞춘 우수한 성적의 훈련병이 있는가 하면, 표적을 잘 맞추지 못한 성적 나쁜 훈련병이 있다. 유격 훈련을 하다보면 각종 장애물을 잘 통과하는 훈련병이 있는가 하면, 장애물마다 제대로 넘어가지 못하여 동료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는 훈련병도 있다. 각개전투 훈련을 하다보면 상관의 명령을 잘 이해함으로써 시기 적절하게 잘 대처하는 훈련병이 있는가 하면, 상관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돌발 행동을 함으로써 가상의 적군에게 들키는 훈련병도 있다.

군대의 시계는 거꾸로 세워도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시간은 흘러간다는 의미다. 훈련 과정이 끝나서 본격적인 군생활을 하기 위해 자대 배치는 받는 날이 왔다.

부대의 특징에 따라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군생활의 모습도 달라진다.

어떤 부대는 전략전술을 세우는 기관으로서 행정 업무를 중심으로 펼친다.
어떤 부대는 훈련소의 난위도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강훈련을 한다.
어떤 부대는 총알이 빗발치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있는 곳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한다.

이 가운데 삶과 죽음이 순간 순간 교차하는 실제 전투가 일어나는 곳.
그곳에 배치된 신병의 마음은 어떨까?
"내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 다닌다."
"내가 훈련소에서 배운 것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얻고자 위함일까?"

훈련소의 훈련 과정에서는 실제의 적이 총알로 훈련병 자신을 위협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려 하다간 언제 어디서 날아오는 총탄에 쓰러질지 모른다. 철모 밖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훈련소의 힘든 과정을 겪었을까?"

머리 속에는 이 말만 되풀이 될 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여러분은 이 순간 어떤 대답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어떤 답을 할 수 있겠는가?

한 나라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무수히 많은 젊은이들이 훈련소에 입대한다.
수 천, 수 만명이 이르는 젊은이들이.

그런데 전쟁터에 배속되면 그 중에 몇 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훈련소에서 배운 것들은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에게 각각 어떤 의미였을까?
훈련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자는 살아 남고, 성적이 나빴던 자는 살아 남기 힘들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전에 임하기 이전의 주어진 조건들, 즉 스펙(spec)을 보고서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한다.
"사격 솜씨가 좋았고, 각개전투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니... 
이 병사는 틀림없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거야."

"성적이 좋았고 좋은 대학을 나왔으니, 
이 학생은 사회 생활도 뛰어나게 잘 할 거야."

"이 성도는 주중 예배의 참석율이 높고 기도하는 시간도 많으니, 
분명히 예슈아의 사랑을 받는 성도일거야."



그런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살아 남는 자가 강하다."
"살아 남은 병사가 좋은 훈련병이다."
"일을 성공리에 마치는 자가 우수한 인재다."
"예슈아께서 인정하는 이가 참 성도다."


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다.

군인이 훈련을 받는 이유는 바로 단 한 가지.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절체절명의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절대로 화려한 훈장이나 경력을 얻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살아 남기 위해서다.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울 뿐이다.

필사적으로 싸우는 상황에서 훈련소의 배움은 얼마나 활용될까? 지식적으로, 혹은 겨우 몇 번 연습만 해 본 배움은 위급한 순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삶이 되어버렸다 할 만큼 무수히 반복적으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그 배움"만이 진정으로 위급한 순간에 그 병사의 생명을 지켜 줄 것이다.


마찬가지다.

학생이 공부를 하는 이유는
학생의 신분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장차 사회 생활을 하는 중 "미지의 세계 혹은 뜻밖의 어려움"을 직면하게 될 경우,
좌절하지 않고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 상황 속에서 "살아 남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매일 같이, 반복적으로

  • 새로운 지식을 배운다.
  • 새로운 세상을 배운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세상을 "가상의 적" 또는 "뜻밖의 어려움"으로 여기고 이를 이해하는 다양한 훈련 과정을 통해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그 가능성"(잠재력)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실제 사회에 나가는 때가 오면,
어떤 어려움이 닥칠 지라도
결단코 낙심하지 말고,
그 상황을 반복적이고 끈질기게 도전하여
잘 이해하게 됨으로써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서 살아 남는 자
되게 하기 위함이다.



결국 학생이 살아가는 실질적인 터전이자
자신의 집이 있는 그 터전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뜻밖의 어려움들이 시시각각 닥치는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학생은 그곳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공부를 한다.
자신의 재능을 따라 어떤 직업을 택할지라도.


우리의 신앙도 이렇다.


모세는 광야에서 십계명을 가르쳤다. 광야 학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쳤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40년 동안 광야(학교)에서 십계명을 배웠다.

그 이유는?
약속의 땅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이 지켜야 할 계약, 곧 십계명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여호와께서 나에게 여러분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마땅히 지켜야 할 모든 법과 규정을 여러분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4:13-14. 현대인의 성경)


약속의 땅 가나안은 입성하는 성도들에게 그저 넘쳐나는 풍요를 부어주는 그런 도시가 아니었다. 광야보다도 더 혹독한 환경으로서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런 땅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들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고, 주변에는 이스라엘의 목숨을 바라는 자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 내 원수의 목전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여실히 잘 표현한 문장을 뽑으라 하면 시편 23편이다.
그런데 십계명을 실질적으로 지켜 나간다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결정되듯 확정하는 구절이 있으니,

  •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요 원수들의 목전에 해당하는
그곳이 야훼 하나님의 집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들 밖에 없던 그 땅에 성도가 들어가고,
그 성도가 야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잘 살펴 보았더니,
사실은 그곳이 야훼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학생의 실질적인 삶과 터전이 있는 곳이 다름아닌 치열한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살아 숨쉬는 실질적인 터전은 다름아닌 치열한 영적 전쟁이 도사리고 있는 땅이면서, 그 땅은 야훼 하나님의 집이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그 순간부터 부귀영화만이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 것과 같다. 온갖 수모와 고난이 기다리는 그곳에 자신의 집이 있고, 남편이 예비한 집이 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여인은 그 집에서 버티지 못하고 소박맞고 만다.
하지만 친정의 어머니를 통해 오랜 기간 동안 잘 배우고 익혀온 여인은 갖은 수모와 고통이 주어지는 오랜 시집 살이 속에서도 살아남는 자가 된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를 출산하고 자라게 함으로써, 이후 그 집의 참된 "안 주인" 자리를 얻게 됨과 같다.

우리 주변의 모습들은
이렇게 성경의 숨겨진 모습들, 야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는 좋은 선생들이다.
이 사실들을 깨닫는다면,
학생 신분의 자녀를 두신 성도분들은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에 대해 조금은 도움이 되셨으리라 믿는다.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을

  • 학생 신분이 유지되는 기간 동안에
  • 충분한 숙련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 아울러 성적표를 의지하여 자녀를 평가하지 말고,
  • 늘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영적 싸움이 펼쳐지는) 훈련장에서
  • 그 훈련을 즐기는 자

로 자라날 수 있기를 바라자.

실패는 그 사람에게 "창의력과 응용력"을 길러주는 최고의 선생입니다.

학생의 실패를 보면,
그래서 격려하고 응원해 주는 그런 부모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authorclynnwilliams.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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