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건강을 추구하는 자, 점진적으로 변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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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메 칸타빌레".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다.

그 중에서 여주인공 노다메의 방 안 풍경은 매우 인상깊었다. 


<노다메 칸타빌레 중에서>



이 방이 처음부터 그랬을까? 

No!
남자 주인공 치아끼의 반응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초 깨끗한 곳에서 살던 자에게 곧바로 이처럼 지저분한 방을 주면서 살라고 하면, 어느 누가 살 수 있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도망칠 것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깨끗하고 상쾌한 공간을 찾는 것은 모든 인간의 바램이요 자연스런 모습이다. 하지만 자신이 익숙하게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집안의 깨끗함"은 결정된다. 이를 성경적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집안의 청결도가 결정된다. 믿음의 분량이 모두가 다르다면 모든 가정의 청결도 또한 천차만별적으로 다양할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 그 자체다.


그런데 깨끗한 방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쓰레기를 옮겨 놓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도 본인 스스로가.


목이 말라 생수를 하나 사왔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신 후 빈 pet 병을 
방 구석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놓아 두었다.
솔직히 그냥 방치하듯 버렸다. 

그치만 그의 인식은
"방은 여전히 깨끗해"라는 생각한다.

매우 당연하게. 

****

몇 시간 또는 몇 일이 지나
배가 고파 컵라면을 끓여먹었다. 
먹고 난 라면찌꺼기와 빈 컵은
컴퓨터 옆에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그의 인식은
"여전히 방은 깨끗해"라고 생각한다.

매우 당연하게. 

****

이런 식으로 적은 량이지만 매일 매일 아주 조금씩
주변에 쓰레기를 더하는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그는
"지저분한 노다메의 방"에서도
능히 기뻐하며 즐거움을 찾아가면서 생활할 수 있다. 

그의 인식은
"여전히 방은 깨끗해"
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인식하지 못하면,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다. 반면 인식하게 되면, 주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게 된다.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그 자체는 이처럼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면허증"이라 할 수 있다.

"그냥 대충 대충 사는거지!"라고 생각하거나 "전문가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해 주시겠지!", 또는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날 살려 주시겠지!"라고 여기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소멸시키는 행위다. 편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책임지어 줄 거라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다른 이가 알려준 대로만 행하면 살 수 있을거라 여기는 나태함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Bruce Power Direct>


"냄비 안의 개구리 또는 개구리 삶기"(Boiling Frog Syndrome)라는 말을 아시나요?

이는 19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렵까지 생물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실험된 것으로서 학술 용어에 해당한다. 즉 환경의 변화와 이에 대응하는 인간의 반응 관계를 연구하던 학문의 분야라 할 수 있다.

실험의 주안점은 이것이다.
개구리가 들어있는 냄비 속 물을 끓을 때, 물이 끓고 있다는 사실을 개구리가 인지 하지 못하는 온도 변화가 얼마일지에 대해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1분 남짓의 아래 영상을 보시길 강권합니다.)



이성현/에터미 경제 연구소장



좀비(Zombie)스스로의 판단 능력을 상실한 존재다. 위 영상의 내용에서처럼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 지금 자신에게 닥쳐온 상황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가?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있는가? 박사, 교수 등도 오류를 범하는 과정 속에서 진리를 찾아간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틀릴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공하기만을 바라는 자는 한 발자국도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현실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누군가가
"이건 좋은 약이니, 아무말 말고 먹으세요"
라고 하면 순순히 먹는다.  

누군가가
"그 내용은 그릇된 내용입니다."
라고 말하면 "왜?"라는 질문은 한 마디도 못하고
그저 "아~ 그릇된 내용인가보구나"라고 생각하고는
아무런 의심없이 철썩같이 믿는다. 

"방송에서 말했데."
"내가 아는 믿을 만한 사람이 말했는데..."
"미국 사람들이 말했데."
"그러니 의심하지 마! 절대로!"
"믿어! 믿으라고."
"아멘 해! 아멘 하라고!"

등등
실제 삶 속에는 좀비가 없다. 그러나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들은 많다. 생각할 수가 없어서다. 더 나아가서는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선교사 분들이 미개한 지역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은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
이다.


맨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식의 능력" or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결정된다. 교육의 본질은 문제를 많이 푸는 데 있지 않고 
  • "눈 앞의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자"
  • "장차 다가올 고난에 스스로 준비하는 자"

가 되게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뜨겁고 열정적이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졸업하여 사회 생활로 접어들면 어떻게 될까? 아무 생각도 못한다. 교과서 외의 문제들이 산재해 있는 사회 생활 속에서 "이 상황은 배우지 못했는데요."라고 변명하고는 그저 삶의 무게 앞에서 주저 앉아 울기만 한다. 젊은 청년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라 하는 어른들도 역시 동일하다.


왜?
그동안 배웠던 교육의 경험과 지식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의학은 초중고에서 배운 것과 전혀 상관없는 "우주의 다른 별 이야기"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알고 보면 초중고의 내용만으로 충분히 이해되는 내용들이다. 그 내용들로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은 냉정하게 말해서 "의학"이 될 수 없다. 초중고의 지식 또는 일상의 삶 속에서 모두가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의 섭리를 안다면, 조금만 노력을 기울여 보자. 그리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먼저 할 것은 늘상(always) 타인의 도움만을 바라는 현실의 마음가짐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자는 주변의 도움없이 스스로 행할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에, 결코 끓는 물 속에 잠잠히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누군가의 도움으로 모든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이는 "끓는 물 속을 벗어나는 것은 곧 죽음이다."고 생각(인식)한다. 그래서 펄펄 끓어 오르는 그 순간까지 끓는 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죽는다.

  • 자신의 수고를 아끼는 자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자요
  •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자는 자신의 몸을 아끼는 자다.


이는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과도 같다.
  •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사모하고, 그렇게 행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미개한 사회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버린 사회다.
마찬가지로 미개한 자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버린 자다. 결코 화려한 빌딩과 첨단 문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ㅇ낳는다. 좀비 영화는 산적한 산속 밀림에서 펼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도심 한 가운데에서 펼쳐진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라.

그 미개함의 탈피는 선각자의 메시지를 들을 때 얻는 "계몽"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교육을 통한 "배움"(훈련; 연단)을 통해 미개함에서 벗어난다. 



진정한 생명력은
스스로 생각하는 상태
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해할 수 없는 목회자의 설교,
이해할 수 없는 의사의 진찰,
이해할 수 없는 수업 내용
등은 그 자신에게 어떤 유익함도 줄 수 없다. 듣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생이 선생님의 강의 내용에서 "이해"(명철)을 얻을 때, 비로서 성적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사회와 경제가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다.
가정 가정마다 아픈 환자들로 가득하여 "가계의 의료 지출비"가 날로 날로 증가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의료 강국은 어떤 의미일까?
경제 강국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정의 의료 지출이 줄어들고, 질병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적어야 하는 것이 의료 강국이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날로 늘어나는 가계의 의료 지출, 그리고 만성질환자 1천만명을 넘어선 시대가 도래했다.

아울러
가게의 부채가 줄어들고, 대부분의 시민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 경제 강국이지 않을까? 그런데 가계 부채는 늘어가고 일자리는 줄어들어 실업자가 넘쳐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성경은 말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4: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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