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추장 되시는 이

<내 삶의 추장 되시는 이>



부족에는 추장이 있다.

그는 그 부족의 모든 대소사를 직접 결정하는 최고 통수권자다.
그래서 그 부족은 추장의 말 한 마디에 의해서 운영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가라"고 말하면, 부족민들은 그저 가면 된다.
그가 "서라"고 말하면, 부족민들은 그저 서면 된다.



추장의 결단은 부족의 모든 흥망성쇠를 이룬다.
추장의 결정권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부족에게 늘 평안함과 부국강병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느 때는 어떠한 노력을 가해도 해결되지 않는 재앙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극심한 가뭄, 혹독한 질병, 누구도 가리지 않는 죽음 등.

추장은 갖은 방법을 도모해 보는데,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추장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
이다. 추장이 스스로 산제물이 되는 방법만이 마지막 방법이다. 그래서 추장은 스스로 죽는 자리에 내려간다. 이것이 최고 통수권자가 갖는 마지막 권위요 의무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의 명령, 누구의 훈계를 받으면서 살아가시나요?
여러분에게 명령과 훈계를 주시는 이가 누구이신지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목회자 이십니까?
은사자 이십니까?
직장 상사 이십니까?
돈 많은 이웃집 재벌 이십니까?
학식이 많은 자 이십니까?
학원 선생 이십니까?
점쟁이 이십니까?

좋습니다.
모두 다 좋습니다.

한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재앙과 같은 극심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떠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못합니다.

pixabay


그때 여러분에게 명령과 훈계를 주시던 그가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시던가요? 여러분이 "재앙과 같은 문제에서 자유하게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 놓던가요?


pixabay



"이런 일을 할 때는 이렇게 하십시오."
"이 일만 행하면 당신은 구원을 얻습니다."
"이 시기만 견디면, 당신은 생명을 얻습니다."
"이 학교만 입학해서 졸업하면, 모든 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등등



온갖 삶의 문제들이 나타날 때, 쉬지도 않고서 충고를 빌미삼아 "자신의 말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말들에 진정 권위와 권능이 깃들어 있는지

확인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일을 행하시는 분들 가운데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기까지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기를
노력하시는 분들
이 계시던가요?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의 의지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조차도
그러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런 도움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예슈아를 아는 이들은 다릅니다.
단, 진정으로 예슈아를 아는 분들이라면요.

그들은 예슈아로부터
자신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신들의 행위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경험
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슈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이 사실을 경험한 자,
이 사실이 느껴지는 이들만이
세상 속 절대적 굴레에 속박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위해 목숨을 이미 버리셨던
그래서 스스로 "친구"라 불리기를 기뻐하시는
예슈아(의 이름)를 위해서 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

믿는 이들이 목숨을 버리는 것
나를 위해서 먼저 목숨을 버리셨던 그 친구의 바램 때문입니다.

절대로
속박되어 있는 이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슈아를 바라봄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


나로 인해 자유하게 된 자는
나를 바라봄으로써,
내가 바라보는 예슈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
그를 바라봄으로써,
그가 바라보는 나를 보게 되고, 내가 바라보는 예슈아를 바라보게 되니
이 또한 예슈아를 바라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어느 때에 죽음을 택하는 십자가를 선택하는 순간이 올지라도
내가 온전히 예슈아를 위하여 십자가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예슈아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입니다.

속박된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게 되면
나로 인해 자유하게 된 자는
나를 통해서 고난의 현장을 보게 됩니다.
내가 바라보는 지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기쁨(예슈아)이 아닌
두려움(지옥)과 저주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 수록
마음은 심히 무겁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 시기가 자신과 상관없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워버리고자 합니다.

그 십자가는
잘못 바라본 십자가 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 삶의 추장되시는 이가 누구인지,
다시금 확인
해 보시길 강권합니다.
내 삶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는 누구를 찾아가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 정도의 노력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어찌 게으른 자가 아닐 수 있겠는지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26:15)





"누군가가 떠 먹여 주는 음식을 받아 먹는 것"
이 신앙 생활의 전부라 여기시는 것은

착각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상식입니다.



은혜만으로 자신의 삶이 운영되기를 원하십니까? 자신은 노력도 하지 않는데, 그저 누군가가 대신 베풀어 주고 대신 수고해 주는 것만을 원하시나요? 세상에 몸을 담고 사는 이들도 비웃습니다.



건강한 자는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은
스스로...
떠 먹는 자의 모습
입니다.



삶의 추장이 누구인지,
나는 누구에게 상담을 받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시길 강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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