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 그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불확실성의 시대.

그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생활이 불확실한 시대,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를  오늘날의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두려움에 떨어야만 할까?

두려우면 오금이 저려온다. 손과 발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가 실감하고 있는 내용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홀로 서 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섭게 생긴 존재가 나를 해하기 위해 달려온다.

그 순간 나는 도망가고자 하는데, 내 몸은 얼어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설령 움직인다 할지라도, 손과 발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약하게만 동작한다."


여러분.
실감나시나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자의적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두려움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억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중을 두렵게 하는 내용"을 듣거나 읽었을 경우, 삶의 소망은 오히려 사그러든다. 심지어 두려움이 더욱 커진다. 그래서 (앞선 내용처럼) 움직임이 더욱 둔해지고 둔해져서 결국엔 삶 속에서 주저 앉게 된다. 자신에게 두려움을 안겨준 그 존재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그저 그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시키는 데로 순순히 따라하는 "종"(slave) 또는 "좀비"(Zombie)같은 자가 된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자신을 바쳐 복종하면 그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면 죽음에 이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면 의롭게 될 것입니다.(롬6:16.현대인의 성경)


그는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상실된 자다.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자가 되어 버린다.
그저 "누군가가 명령하는 데로"만 살아갈 뿐이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해 보자.
시소(seesaw)를 타는 상상을 해 보기로 하자.
한쪽에는 "생명"이가 타고 있고, 반대편에는 "죽음"이가 타고 있다.

  • 생명이가 조금 내려가면, 죽음이는 조금 올라간다.
  • 생명이가 급격하게 내려가면, 죽음이는 급격하게 올라간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한번은 죽음에 이릅니다. 이 사실을 빗겨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죠.

  •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해질 수록, 죽음이 주는 두려움은 강해진다.
  • 반대로 생명에 대한 애착이 약해질 수록, 죽음이 주는 두려움도 약해진다.



삶의 균형은 시소(seesaw)를 타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과 동일하다.

시소를 타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어리다고 해서, 시소가 갖는 삶의 이치가 하찮다고 여길 수 없다는 뜻이다. 삶의 이치는 우리 삶 속 가장 친근한 부분에 늘 함께 하고 있다.

땀 흘려 수고하는게 좀처럼 쉽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땀 흘리는 것 또는 그런 직업은 마치 "천한 직업"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땀을 흘리지 않고 자신의 수고를 최대한 아낄 수 있는 그런 직업군을 선호하는 시대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생활의 편리"가 매우 중요한 삶의 덕목처럼 여겨지고 있다.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들은 우리에게 땀과 노고를 쏟게 하기에 일을 끝마칠 때 즈음이면 몹시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그 피곤함 만큼 삶의 무게도 무거워진다.
그런데 누군가가 일을 대신 해 주거나 혹은 일을 함께 함으로써 그 분량을 줄여준다면, 이는 삶을 윤택하게 하고 여유롭게 할 것이다. 일과 생활의 편리는 이런 상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생활의 편리는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생활에 어려움이 없어진다. 누군가가 자신의 어려움을 모두 대신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고민하는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다. 삶에 어려움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의 감각기관들을 자극하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쾌락과 향락을 즐기는 쪽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이로써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저 편리를 누리는 데에만 집중한다.



요즘 좀비(Zombie)에 관한 패러다임이 대중매체에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가? 좀비는 어디에서 주로 출몰할까? 깊은 산속에? 바닷가에 홀로 떠 있는 외로운 섬에서?

아니다. 화려하고 한 없이 높은 빌딩숲을 가진 "도심"에서 출몰한다. 현대적 기술과 문명이 최고조에 이른다는 그 도시에서 좀비가 출몰한다. 좀비는 누구인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저 버린 존재"다. 움직이기에 죽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런데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분별하기 보다는 그저 눈에 보이는데로, 자기의 마음에 합당한 대로만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요일2:16a)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 데카르트의 말이 이러한 사실과 강하게 상충한다. 생각하지 않는 (문명 속) 존재들은 사실상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는 뜻이다.

고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는 이들은 당연히 "죽은 자의 미래"에 합류하고 말 것이다.

  • 그래서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떠나지 않는다.
  • 그가 바라보고 소망하는 미래가 결국은 "죽은 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의 두려움 앞에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심을 낮출 수 있는 자는 다르다.

뒤에서 불이 타오르면, 그 불길을 피하기 위해 묘책을 찾아야만 한다. 그 앞에 높은 절벽이나 암벽이 있을지라도 "불길에 타 죽으나, 뛰어 내리다가 죽으나 모두 같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뛰어 내리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오히려 생명을 빼앗기지 않는다.

99%의 불가능이라는 사실에 무릎을 꿇고서 그저 다가온다는 불길 앞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나약한 모습보다는, 1%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에 소망을 품어 보라. 그러면 그 1%의 가능성은 점점 커질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1%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이는 그 마음에 소망이 생겨나면, 그 소망은 우리에게 생기를 준다. 그 생기는 (상황이 불가능한 곳에서도) "돌파구를 볼 수 있는 지혜(안목)"를 제공한다. 그 지혜를 얻는 자는 모든 상황을 신속하게 판단하게 된다. 신속하고 명료한 판단은 그를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조언을 주는 이들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실제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많은 조언들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으나,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
는 속담이 있다. 스스로 물을 먹겠다고 결단하지 않은 이상, 물가에 가는 것 만으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 사실은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조언은 조언일 뿐, 내 삶에 찾아온 어려움을 극복하게 할 수는 없다. 내 삶에 찾아온 어려움은 오직 "내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서만 해결된다. 이를테면
모든 해결책
"나의 결단" 또는 "내 삶의 부분"에서 나온다
는 뜻이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는 삶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면 반드시 분주하게 하던 일을 잠시 멈춘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환경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여러 가지로 조합"한다. 그 조합들 속에서 좋은 해결책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 남는다.



온 세계는 그런 이야기를 너무나 즐거워 했다.

바로 희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드라마.
"맥가이버"
가 바로 우리들이 그토록 바라던 삶의 모습이요 삶을 대하는 자세였지 않았나 싶다.



불가능한 수치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 수치를 알아야 남은 "가능한 수치"를 산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여기서 주의 하십시오.

불가능한 현실 또는 불가능한 사실
"삶의 가능한 부분"을 찾기 위해서만 필요
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의미가 더 있지는 않습니다.


가능한 수치가 산출되었나요?
그럼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주변을 둘러 보고서 깊은 생각에 잠겨 보십시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는 삶의 모든 어려움들을 능히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Boiling Frog Syndrome(개구리 삶기 or 냄비 속의 개구리)은 결국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와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자"를 구분하기 위해 진행된 실험입니다.

  • 사람들에게 생활의 편리를 어느 정도씩 베풀어 줄 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버릴 수 있을까?
  • 노력하지 않고 삶의 기쁨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몇 개의 달콤한 초콜릿을 줄 때 자신의 영혼을 내어 줄까?





"이것은 너에게 충분한 기쁨을 줄거야"
"네가 노력할 필요는 없어.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되."
"이 모든 것은 공짜야."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No pain, No gain

공짜를 쉽게 여기고서, 공짜가 주는 기쁨을 누리는 데에만 집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중독"에 이르게 됩니다. 중독이라는 단계에 빠지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공짜가 아닙니다. 이내 곧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때가 옵니다. 비용부담의 무게가 심히 괴로울 정도지만, 그래도 구매를 멈출 수 없습니다. 중독은 그것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고객은 평생 고객입니다."
란 슬로건처럼 비싼 비용으로 늘 구매 활동을 펼치는 평생 고객이 됩니다.



대출이 주는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하지 않고서 내 집을 쉽게 마련할 수 있다? 정말 그런 세상이 존재할까요? 그렇다면 어느 누가 땀흘려 일 하려 할까요? 그런데 누군가는 말합니다.
"대출을 싸게, 이자 없이 줄테니, 삶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봐."
"평소에 먹고 싶고, 입고 싶고 보고 싶은 화려한 레저 생활을 마음껏 펼쳐봐"
"좁은 집에서 아웅대며 살지 말고, 넓은 집에서 근사하게 살아봐"
GoYerbaMate.com


우리의 몸은 어느새 익숙해져 버립니다.
일하지 않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레저와 식생활 습관에. 그리고 넓은 집에서의 생활에.

대출 받은 돈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하지만 익숙해져 버린 내 몸은 지속해서 화려한 삶을 누리고자 합니다.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 허무합니다.

"이번만 대출 받자."
라고 말하면서, 대출을 받아 다시 화려한 생활에 빠져듭니다.
대출금이 소진되면 또 다시 찾아오는 허무감.

"이제 끝이다. 이번만 대출 받자."
그러나 소진되고 나면 여전히 허무함 속에 빠져듭니다.

마치 도박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는 이미 "중독"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대출 이자가 아무리 높아도 무리해서 대출을 받게 됩니다. 결국 그의 삶은 빚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평생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하는 신세가 됩니다.



세상에 꽁짜는 없습니다.

형편에 맞게 "최소한의 편리"만을 누리시고, 나머지는 스스로 땀흘려 이뤄 나가는 "삶의 변화"를 통해 얻게되는 보람과 기쁨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 보십시오.
그럼 지금의 삶 속에서도 능히 출구를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eastlondonphysio.com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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