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의 미학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라 자부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사회 전반을 명확하게 드려다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2차 대전 당시 독일을 비롯해 유럽 전역을 강하게 지배했던 나치의 세력을 보면, 그들에게는 '선전선동의 미학'이 있었다. 불과 80여년 전의 시대인데, 지금의 시대보다 지식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그들은 선동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예리한 시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는 그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다.


당시 선전선동의 달인이라 평가받던 요제프 괴벨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선동은 단 한문장으로도 가능 하지만 그것을 해명 하고 증명 하려면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되었음을 밝혀 냈을때 이미 대중은 선동 되어 있는 상태다."


하나의 문장을 이용하여 선전을 한다. 그러자 그 선전 문구를 보고 들음으로써 군중은 선동된다. 이를 보고서 사실 규명을 하겠다며 반대진영은 무수히 많은 증거들을 수집하여 제시한다. 그렇게 사실 규명을 증명할 증거들이 제시되는 시점에서 군중은 이미 증거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 이유는 세뇌된 이들에겐 증거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들이 믿고 있던 오래 전의 그 사실만이 진실이고, 그 진실을 외면할 경우 자신들에게는 죽음이 찾아올 것으로 믿기 때문에 (죽음을 원치 않는 군중들은) 결국 증거를 외면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까?

괴벨스의 말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면서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선동되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선전이 진행되고 군중은 선동되어 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코끼리 길들이기

코끼리에 비해 인간은 매우 연약한 존재다. 그런데도 인간은 거대하고 강한 코끼리를 충분히 길들일 수 있다.

매우 어린 아기 코끼리의 뒷다리를  말뚝에 묶어 놓음으로써 말뚝 주변을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시간이 얼마간 흐르면 코끼리는 '말뚝 주변은 자신의 한계'라고 스스로 생각해 버린다. 즉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자유는 말뚝 주변이고, 그 사실에 안주해 버린다. 이제는 그 말뚝을 충분히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런데도 성장한 코끼리는 '이딴 말뚝은 뽑아 버리고 이 주변을 벗어나겠다'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말뚝 주변에만 머문 채 살아가게 된다.


그 코끼리 앞에 '초원에 사는 코끼리 한 마리'가 다가온다고 생각해 보자.

제 아무리 많은 설명과 행동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말뚝에 매여있던 코끼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말뚝에 매여있지 않는다면, 나 역시 당신처럼 행동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 다르게 말뚝에 매여있답니다. 그러니 나는 당신과 다르다는 점을 먼저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초원을 향해 걸어가는 코끼리를 바라보며 그는 여전히 말뚝 주변에 서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어린 시절의 말뚝과 밧줄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실제 우리들 삶에서는 '우민화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안락하고 편리한 삶'에 속하는 것들이다.





국민의 우민화는 3S의 부분에서 진행되는데, Screen, Sex, Sports다. 즉 Sex와 Sports라는 이슈를 Screen이라는 공간 안에서 해소하게 한다. 자신이 직접하려 할 경우에는 갖은 장애요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Screen 안에서는 누구나 가능하다. 단지 '시청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연약한 이가 인터넷 게임 안에서는 성난 폭군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TV를 바보 상자라고 부른다. TV 속 내용은 누군가에 의해 '이미 계획되고 정해진 사고의 테두리' 안에 제작된다. 독서는 책을 읽으면서도 충분히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데 반해 영상은 멈추지 않고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에 시청자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시청자는 영상 제작자의 계획된 사고의 틀 안에 갇히게 된다. 그러면서 반복적으로 그 영상을 시청하게 되면,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 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는 괴벨스의 말처럼, 어느새 영상 제작자의 계획된 사고들 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는 상자 속의 벼룩과 같은 실험결과를 낳는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는 괴벨스의 의미는 '단 한 번의 말할 기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 문장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TV 프로그램 안에 교묘하게 숨겨진 채로 매순간 시청하는 시청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초당 약 30 프레임(30장의 그림)으로 구성되는 영화에서 30 프레임 중 한 프레임에 '팝콘과 콜라' 영상을 삽입하여 영화를 시청하는 내내 보게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팝콘과 콜라를 사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한다. 팝콘과 콜라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구매하는 자신을 보고 의문을 품는다. 그런데 영화를 관람한 이들은 팝콘과 콜라를 의문없이 사먹게 된다.


이것을 '마인드 컨트롤을 이용한 인간의 잠재능력에 대한 컨트롤'로 말할 수 있는데, 보다 전문적인 심리학 용어로는 '서브리미널 효과'라고 말한다. 쉽사리 인지하기 힘든 무의식적인 자극 즉, 음향'도형/음악 등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잠재의식에 '특정한 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을 뜻한다.

최근 기업과 영상 매체들이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이용하고 있는데 'PPL'(Product Placement; 제품간접광고)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영상 프레임에 끼워넣던 종전의 마인드 컨트롤 기법을 따르지 않고, 현재 시청하고 있는 영상 속 화면의 한 부분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무의식 중에 있는 시청자의 잠재의식에 '특정 사상'을 주입하는 홍보전략이다.


|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게 될까?

앞서 언급했던 '팝콘과 콜라'의 경우처럼, 별다른 필요와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해당 물건을 구매하게 된다. 즉 시청자들의 구매 효과가 높아지게 되면서 기업은 의도했던 매출 상승 효과를 얻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시청자들에게 어떠한 항의도 듣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요없는 물건을 구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항의하는 시청자는 없다. 또한 구매하려는 즈음에 구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말하는 이가 있다 할지라도, 해당 시청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구매를 하게 된다. 결국 방송기법의 발전이란 시청자들에게 특정 사상을 주입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양하면서도 더욱 효과가 높은 기법들이 연구된다고 할 수 있다.


소위 '대학병원'에 관련된 휴먼 드라마는 전문의료직에 종사하는 분들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심겨준다. 또한 '악덕 기업가와 이들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기업가는 악하고 부당하게 착취하는 자들'이라는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심어준다.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이야기다. 유대인의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사회의 악'이라 표현하고자 '크리스마스'라는 훈훈한 이미지 속에 '악덕 기업가'의 이미지가 교묘하게 끼워 넣은 이야기다.





기업 또는 기업가에 대한 인식이 잠재의식 수준에서부터 왜곡이 일어나게 되자, 내가 일하는 직장인데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제공해 주는 기업을 헐뜯게 한다. 그 결과 기업이 망하게 되면 한 순간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 하나의 기업이 망했다고. 그러나 이내 먹을 밥이 없고 안락한 집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즈음이면, 자신이 했던 그 일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지난 날 자신의 직장을 헐뜯기 위해 벌였던 자신의 그릇된 행실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기업을 망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노력을 할 때에는 모든 이들이 자신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세상의 주인공은 오로지 자신 한 사람인 양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이 사라지고 나자, 어느 누구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더 이상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누군가 기업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없애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지 않고 내부자의 손을 빌어서 그 일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기 보다는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 더러운 일을 맡아주길 바랬던 것이다. 그 대상을 찾기 위해 '선전을 이용하여 선동된 누군가'를 그들은 찾았던 것이고, 그렇게 선택된 자가 바로 당신이었을 뿐이다.


영화 초한지의 한신



그 기업이 사라지고 나면, 그 순간 당신에 대한 가치도 사라지게 된다. 토사구팽 당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사회생활 중에서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에는 반드시 토사구팽이라는 이치가 있음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 이익을 탐하는 인간의 욕구와 그에 따른 행동 속에는 반드시 토사구팽이라는 이치가 담겨 있기 때문에, 유능한 종업원 또는 유능한 CEO라 할지라도 이익을 탐하는 오너에 의해 그는 반드시 제거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현재 자신이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그 소리가 과연 이치에 부합된 것인지 늘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타도를 외치고 있던 그 대상이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 토사구팽. 타도의 대상과 사냥개 간 공존을 말한다. 

즉 사냥감을 모조리 잡아버리게 되자 사냥개 역시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냥개가 타도의 대상이 되어 잡아먹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사냥개가 자신의 역할을 영원토록 계속 간직하고 싶다면, 그는 사냥감을 모조리 잡아버리는 그런 특출난 역량을 발휘해선 안 된다. 사냥감과 사냥개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이지만, 둘 중 하나가 없어지면 자연스레 다른 한 쪽도 없어지게 된다는 점이 있다.

이를 보면 사냥감과 사냥개는 결국 동일한 파트너쉽을 가진 존재이고, 사냥감과 사냥개와 대립하게 되는 공동의 적은 결국 사냥꾼이 된다. 물론 사냥감이 사라지고 사냥개도 사라진 사냥꾼 역시 그 사회에선 필요없는 존재가 된다. 즉 그 사회가 사냥꾼이라는 직업자를 적으로 삼아 사회에서 몰아내고 만다는 뜻이다.





그럼 '진정한 적'은 누구일까?

이는 제논의 역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킬레스가 앞지르고자 했던 그 거북이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는 거북이가 아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사이의 거리다. 그 둘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무한의 거리'가 있고, 그 무한의 거리가 점점 짧아지곤 있지만, 영원토록 정복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enermy)이 된다.


사냥감이 사라지고, 사냥개가 사라지며, 그리고 사냥꾼이 사라진다.

마을 주민이 사라지고, 한 지역민들이 사라지며 한 국가의 국민들이 사라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게 있으니, 그것은 '전쟁'이다.

특별한 대상이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을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 열심히 적을 무찌른다.


항우와 유방의 대결이 바로 좋은 이야기다.

한신은 유방을 도와 무적의 항우를 무찔렀다. 그로 인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올것이라 믿었다. 항우의 섬멸을 위해 누구보다 힘썼던 한신이다. 그런데 한신은 항우로부터 버림받게 되고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유씨 성을 가진 왕족의 시대가 열렸지만, 그 나라도 역시 부정부패로 인해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공동의 적이 완전히 섬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서 후사를 그릇되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공동의 적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공통된 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서 있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그를 '욕심'이라 부른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이유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크다.

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은 '욕심'을 갖게 한다는 사실도 함께 내포한다.


| 노예를 거느리는 주인이 절대로 노예에게 하지 않는 게 있다.


그것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예가 무지할 때에는 주인의 명령 그리고 자신이 일한 모든 것을 주인이 차지한다는 그런 운명에 대해 '숙명'이라 여기고서 그냥 받아들인다. 불만을 가지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로 부터 교육을 받게 된 노예는 '비교'를 하게 된다. '분석'을 하게 된다. 주인의 명령이 상황과 환경을 고려한 것인지 혹은 고려하지 않는 무모한 것인지를 비교분석하는 노예가 된다. 그 결과 주인의 능력을 평가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일한 대가를 주인이 차지한다는 점에서 불평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어긋남을 보고서 노예는 주인을 적으로 삼게 된다. 그래서 주인은 노예를 무지한 자로 남게 한다. 이를 위해 주인이 펼치는 전략은 '우민화정책'이다.


주인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래서 노예와 사이좋게 나눠 갖기를 바란다면 노예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똑똑한 노예는 주인의 의도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고급인력의 필요성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사안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주인과 노예는 소위 ‌win-win하는 관계가 된다.

하지만 주인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것보다 노예의 손에 들려지게 될 그것이 더 커보인다. 그래서 그것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어한다. 그때 주인은 노예들이 단합되지 못하도록 '이간질'을 시킨다. 이때 가장 유효한 것은 '완장'이다. 


주인의 말에 의문을 품지 않고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를 '존경받기에 합당한 자'로 삼아줌으로써 완장을 채운다.


젊은이를 타락으로 이끄는 확실한 방법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대신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이를 존경하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완장을 찬 노예는 같은 동급의 노예를 무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자다. 그래서 노예가 노예를 탄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완장을 부여받는 순간 그 노예는 주인의 달콤한 말에 세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주인의 사상 또는 주인의 욕심이라는 굴레 안에 스스로 갇혀버린 자가 되어, 그는 더 이상 주인의 사상(욕심)을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떠한 시도 조차도 하지 않는 그런 자가 되어 버린다.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한 노예에게는 이처럼 달콤한 한 마디의 말에 의해 세뇌가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동족을 탄압하는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 반면 교육의 기회를 가진 주인의 경우, 자신의 욕심을 다스릴 줄 아는 지식인이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마음 속 욕심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함이 옳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욕심이 결국 자신을 삼켜 버리고 만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공통된 적이 어디에 숨어 있으며, 왜 그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지를 깨닫게 한다.


들판의 짐승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창조주의 선물이 '자유의지'라고 말하지만, 이를 바꿔 말하면 '이성'이다. 그리고 그 이성은 판단여하에 의해 배려(양보)와 욕심으로 표출된다.


|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싸움은 결국 '나와 내 안의 욕심'간의 싸움이 된다.


내 삶이 진정한 삶에 찾아든 싸움의 대상은 '우둔함이 낳은 욕심'인 것이다. 나 혼자만의 욕심을 생각하고, 나 혼자만의 즐거움을 생각했던 그 생각을 우리는 우둔함이라 말한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마24:38)


그 우둔함은 결국 싸움을 만들게 되고, 자신의 주변은 물론 결국 자기 자신까지 소멸케 한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 욕심만 챙기는 그런 생각을 우둔하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악하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일확천금을 얻은 이들의 삶을 보라. 그들은 자신이 얻은 그 풍족함을 다른 누구와 전혀 나누려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혼자서만 챙기고 누리고자 한다. 노아의 때도 그렇다. 모든 것이 거저 얻은 혜택들 뿐이다. 온통 사방이 로또 당첨된 자들 뿐이다. 그래서 아까운 것을 모른다. 매사에 흥청망청 사용한다. 낭비한다.





주변에는 쓰다 버린 물건들로 장사진을 이루게 되니, 결국 그것들은 쓰레기가 된다. 자신이 앉아 있을 그 공간만 깨끗하면 된다고 생각하고서, 자신의 주변 이외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쓰레기를 거리낌 없이 버려버린다. 이것이 전쟁을 야기하는 욕심의 시작이다.

그래서 그 쓰레기가 니 것이니 내 것이니 하면서 싸움을 벌이게 되고, 결국 생명을 앗아가는 일까지 생겨난다.


욕심은 게으름을 낳고, 그 게으름은 오염을 낳으며 오염은 전쟁을 낳는다. 자기만 깨끗한 곳에 살아야 겠다 여기기 때문이다. 서로를 위해 청소하려 하기 보다는 '누군가 청소하겠지'하고는 '깨끗한 곳이 없나?'하며 자신이 누울 자리만 찾는다. 이게 전쟁이다.


속이는 자는 '진정한 나의 적'이 눈에 보이는 대상인 것으로 나를 속이려 든다.

그래서 눈 앞의 적을 없애기만 하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처럼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눈 앞의 적을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악한 수단도 선한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욕심 자체가 사라질 수 없는 우리'는 눈 앞의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또 다른 적을 찾게 된다.

사라지지 않는 허기에 고통스러워 하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좀비(Zombie)처럼.

우리는 그렇게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이 세상은 그렇게 파멸의 길로 달려간다.


| 속히 깨어나길 바란다.

나부터 바뀌면 된다. 다른 주변을 손가락질 하지 말고, 나부터 바꿔보자.

내 주변을 청소하고, 그리고 내 이웃에 양보하는 배려심을 가져보자.

내 주머니의 것들을 내 이웃과 나눠 가질 때, 나는 내 안의 욕심을 다스릴 줄 아는 그런 자가 될 것이다.


속임의 미학.

결국은 나 자신을 가장 아름다운 자로 만드는 또다른 병법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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