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손으로 이끌리어...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또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삶'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설교자 분들은 '성령의 이끄심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내용이 담긴 설교가 단 한 번으로 끝나던가?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설교자 분들의 설교 내용의 대부분은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삶'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담아 낸다. 반복적이듯 그리고 마치 주기적이듯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에 대해 강조하신다. 





왜 그럴까?

그러한 삶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반복하여 말한다. 더 정확하게는 '어떻게 살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여' 결국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행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이미 담겨있었다. 다만 우리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어서 그 사실들을 볼 수 없을 뿐.




그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그들을 가게 하고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그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시고

(출6:1.흠정역)


출애굽6장은 모세가 아론과 함께 파라오를 만나 '내 백성을 가게 하여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해 명절을 지키게 하라'고 말을 했는데, 파라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오히려 히브리인들을 더욱 괴롭힌 상황에서 진행되는 그 뒷이야기다.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 순종하는 태도로 모세는 당당하게 파라오 앞에 섰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파라오를 향해 그대로 예언을 말했'다. 이쯤 되면 파라오는 전능자의 뜻을 전해 들었으니, 순순히 그분의 뜻대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파라오는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오히려 히브리인들을 더욱 괴롭게 하는 조치를 취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관리들이 "너희는 너희의 당일 작업 벽돌 수효를 조금도 줄이지 말라" 함을 듣고 자기들이 악한 상황에 빠진 줄을 깨달으니라. 

(출5:19.흠정역)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희소식이 들려오게 될 것을 기대했을테다. 야훼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이적까지 행하는 자이니, 모세를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적을 행하던 자가 당초에 주었던 기대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도리어 더욱 악한 상황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경악할 따음이다. 이래서 어떻게 모세라는 인물을 믿을 수 있을거며, 그가 야훼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실 또한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야훼 하나님의 선지자가 맞다면) 결국은 자기 조상의 하나님이신 야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믿을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을 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들(이스라엘 자손의 관리들)이 파라오를 떠나 나올 때에 길에 서 있던 모세와 아론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의 향기를 파라오의 눈과 그의 신하들의 눈에 혐오거리로 만들었고 또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였은즉 주께서 너희를 보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출5:0~21.흠정역)


이스라엘 자손의 지도자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우리를 죽게 하였은즉, 주께서 너희를 보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러한 저주는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니'라고 기록된 창12:3의 말씀을 근거로 삼는다. 이와 같이 무서운 저주는 없다. 그것은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그 자체(마7:12)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자 모세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가?


모세가 주께 돌아와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이같이 악하게 다루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파라오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때부터 그가 이 백성에게 악을 행하였으며 또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전혀 건져 내지 아니하셨나이다, 하니라

(출5:22~23.흠정역)


소위 파라오에게 모세 자신이 말을 하도록 명령을 하셨다면,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에게 좋은 조치를 취하도록 최소한의 변화 정도는 주님이 책임지고 일어나게 해야 했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히브리인들이 모세 자신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인정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느냐며 따지고 있다.


야훼 하나님이 기적과 같은 환상 내지는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 나를 만나 주셨다. 그리고서 그가 나를 (야훼의 뜻이 있는 곳으로) 보내셨다. 그러면 겉으로 들어나는 좋은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게 최소한의 선한 모습이지 않겠느냐고 모세는 생각했다. 그리고 모세처럼 우리들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역사가 일어나게 되자, 매우 당황스럽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예상치 못한 결과 때문에 놀라워 한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다시금 살펴보기로 하자.


그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그들을 가게 하고 강한 손으로 인해 그가 그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시고

(출6:1.흠정역)


'이제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행하는 주체는 오로지 야훼 하나님 한 분이시고, 모세는 단지 '바라볼 뿐'이다. 

      실상은 삶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 주체는 모세와 같은 우리들인데, 성경이 말하는 설명은 매우 다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도살장에서 소를 잡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싶다면, 보길 원하는 자 역시 도살장에 들어가야 한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으로 들어가며 참혹하게 피가 펼쳐진 장면 역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그 모습도 보아야 한다. 즉 최소한의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고통조차 감수하지 않는다면, 도살장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현장에서 일어날 최소한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 겪어야만 한다는 창조의 이치가 있다.


그럼 야훼께선 자신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까?


강한 손으로 인해

| 그가 그들을 가게 하고

| 그가 그들을 자기 때에서 쫓아내도록

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큰 그림 하나를 볼 수 있다. '강한 손으로 행하신다.'는 것이다.




자녀를 키울 때,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장난을 치던 중 괴롭힘을 당할 때가 있다. 

"큰 애야. 작은 애를 괴롭히면 안 돼. 그 손 놔라!"라고 부모가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큰 아이는 자신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러나 부모님의 뜻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는 그는 부모님의 강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은 놓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경험한다.





부모의 강함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부모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 세대가 흔히들 말하는 내용이


"저 애는 어른 말이 아픈지를 모른다."


고 한다. 즉 어른이 말하면, 어른의 강함을 기억해 냄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꺾는다. 어쩔 수 없는 복종이지만,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어른의 강함이 개입하여 그에게 복종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래서 어른의 말에 복종을 하게 되는데, 어른의 말이 무섭다는 것을 것을 전혀 모르는 아이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 제 아무리 많은 어른들이 주변에서 '하지 말아라' 또는 '얼른 멈춰!'라고 말을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그리고 자기 의지대로 행한다. 


그 아이는 '어른의 강함은 나를 충분히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경험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아이를 보고서, 그 아이의 부모가 욕을 먹게 된다.


마찬가지로 애굽의 왕 파라오와 그 백성들은 야훼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해 본 바가 없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야훼께서 엄포를 놓는다 할지라도, '흥! 그래서 머 어쩌라구'라며 콧방귀를 뀔 뿐이다. 야훼께서 때린다고 할 때, '그게 얼마나 아프다는 가야?'라며 무시해 버린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기에 출6:1에는 그런 애굽의 파라오와 그 백성들에게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무서움의 무게'를 직접 경험하게 하시려는 큰 의도가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형의 손에서 고통받는 동생이 있다.

고통은 동생이 당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하는 이는 (형이 아니라) 동생이다. 형은 아버지의 강한 힘에 직접 아픔을 경험하지만, 동생은 아버지의 말이 얼마나 강한지를 경험하는 세대다. 그래서 형과 동생의 경험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앞선 세대는 '아버지의 '이 얼마나 강한지를 경험하지만,

뒷선 세대는 '아버지의 말씀'이 얼마나 강한지를 경험한다.


왜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 이스마엘이 아닌) 둘째 아들에게 언약의 말씀이 전승되어야 하는지 그 이해의 폭이 좀더 넓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동생의 의지와 상관없이, 형의 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모든 일들이 진행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아버지의 말이 강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생 입장에서 볼 때 형은 악한 존재이겠지만, 형은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동생 자신보다도) 더 복종하여 따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와 대화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이야기(출6:1)로 되돌아 가 보자.


강한 손으로 인해

| 그가 그들을 가게 한다.

| 그가 그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내리라.

고 하셨다. '가게 한다'는 부분보다는 '쫓아낸다'는 부분에서 강압적인 느낌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작은 아들이 그곳에 함께 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걱정되어 일터에서 나오라고 한다.


"우리 애기, 어서 그곳에서 나오렴"


그런데 아버지의 이 말이 얼마나 아픈지를 모르는 둘째 아들은 순종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자기 기분에만 충실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말한다.


"큰 애야. 동생은 집으로 데려다 줘라"


아버지의 강함을 충분히 경험한 큰 아들은 두말 하지 않고, "예"라고 답하고서 둘째 아들을 강압적으로 끌어 간다. 그리고 집에 데려다 준다. 그때 형은 즐거운 표정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놈이 혼자서 가면 좋으련만, 귀찮게 시리 안 가네?'


라고 생각하고선 말 그래도 끌어다가 내팽겨치듯 집 안으로 밀어 넣는 경우도 있다. 그럼 동생의 입장에서는 어느 누구를 원망할까? 당연히 자신을 강압적으로 끌고 가더니 집 안에 내팽겨쳐 버린 형이지 않을까? 그래서 





"아빠. 형아가 나를 밀쳤어"


라고 아빠가 충분히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동생은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한 형이 미울 것이고, 자신을 가장 안전한 곳 또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길 원하는 분에게 괴롭힌 형을 참소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집 안에 갇혀야 하는 그 부분에서 만큼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는다. 감사해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예슈아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4:1.개역개정)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상황이다. 그런데 상황은 일반적인 기대와 다르게 악조건의 환경으로 치닫는다. 어려운 상황인 광야로 들어간다. 어떻게 들어갔을까?


성령에 이끌리어


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끌리다'(led)는 말의 헬라어는 ago(ἄγω)인데, 이는 강압적인 성격을 띈 단어로서 흔히 'arrest'의 의미를 갖는다. 내 의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권위자의 의지만이 중요시 되는 그런 단어다. 그런 가운데 'to lead, bring, carry, taking' 등의 의미가 부여된다. 그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들어갔다'는 그 자체는 '범죄자가 경찰에 의해 유치장으로 끌려 들어갔다'는 식의 표현과도 같은 의미가 된다.





이상적인 법 집행의 개념을 보자면, 범죄자를 강제로 끌어다가 (처벌을 받는) 감옥에 집어 넣는 것은 '개과천선'을 위한 것이다. 즉 범죄자에게 고난을 주어 선한 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감옥 또는 광야에서의 삶은 그래서 유익한 것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개역개정)


감옥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이는 국가의 법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그로 인하여 사회에선 준법의 삶을 살게 된다. 물론 예슈아께서 범죄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성령은 마치 범죄자를 다루는 것처럼 예슈아를 강제적으로 광야에 내팽겨챘다. 성령이 극도로 충만한 상황인데, 그럼 내가 기도하거나 안수하는 등의 어떤 신앙사역이 펼쳐져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렇게들 생각한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다는 집회가 열리면, 앞다투어 기름부음을 받고자 나아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무조건 내가 먼저다. 다른 이들보다 더 좋은 자리, 더 좋은 기회는 무조건 내게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그것이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 그런데 예슈아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상황이지만, 예상과 다르게 광야로 내쫓겨났다.

어떻게 내쫓겨났을까?


흔히 설교자의 설교는 '성령이 이끄셨습니다.'라는 설명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모세와 파라오의 관계를 보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고, 그 마음에서 내쫓김을 당한 상황이 되었지 않는가? 이스라엘의 마음에서 내쫓김을 당하여 몹시도 괴로운 곳에 내팽개쳐진 모세다. 누구 때문인가?


분명 모세는 성령에 이끌리어 파라오에게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전혀 모르던 자에 의해서 모세의 마음은 괴로움만이 있는 광야로 내쫓김을 당하고 만다.


그러자 모세의 그 마음은 몹시도 상하고 만다. 그런데 그곳에 누가 있었을까?

야훼 하나님의 입, 곳 말씀을 하시는 전능자의 입이 있었다.





광야(desert)를 뜻하는 'midbar'(מִדְבָּר)는 사실 전능자의 '입'(mouth)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midbar의 동사형인 dabar(דָבַר)는 (전능자께서) '말씀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광야에서


주변 상황이 나를 괴롭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라도,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향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내게 말씀하신다는 게 #광야의_삶이 주는 유익이고 우리를 광야로 이끄시는 주님의 온전하신 뜻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파라오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주님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파라오와 그의 백성들 그리고 모세는 직접 경험하게 된다. 파라오와 그의 백성들은 주님의 무서움을 경험하게 되지만, 모세는 그분의 계획(말씀)은 반드시 스스로 이루시는 그런 분이신 것을 더하여 경험하게 된다.


그가 이스라엘을 이끌어 출애굽시키는 지도자로 서기 위해, 이러한 경험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슈아께서도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주님의 강함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가 주님의 사역자로서 나아가게 되기보다는, 주님의 강함을 경험한 자가 주님의 사역자로 쓰임받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래야만 주변의 상황으로 인해 온 세상이 요동칠지라도, 그는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분의 강함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흔들지리 않고 담대히 그의 무릎을 일으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흔히 우리가 아는 바와 조금 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에 대해 함께 나눠보았습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더니, 그날부터 내 삶이 엉망진창이 되었다며 슬퍼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에게 주님의 마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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