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에 숨겨 놓은 신랑의 비밀
성경 속에 흔히들 등장하는 이름들이 있는데, 대개 '바~~'라고 시작하는 이름들이다. 오늘은 그런 이름들에 대해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막10:46b
예슈아께서 여리고 성문을 나가려는 즈음에 만난 자가 있다. 그는 걸인인데, 여리고 성문 근처 또는 그 일대의 길목에 자리잡고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으니, 정황상 여리고 시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성경은 그를 바디매오라 부른다. 그리고는 디매오의 아들이라고도 말한다.
'디매오의 아들'은 히브리어로
'בן טימי'
'바디매오'는 히브리어로
'ברטימי'
bibleHub.com
성경 말씀을 토대로 정황상 추측해 본다면, '바디매오'는 소경의 이름이지 않겠느냐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의 이름이 아니다. 바디매오 그 자체가 '디매오의 아들(후손)'이라는 뜻의 히브리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마16:17a
마찬가지로 '바요나' 역시 이름이 아니다. '요나의 아들(후손)'이란 뜻의 히브리 표현이고, 실제 이름은 '시몬'이 된다.
| 왜 조상의 이름을 가지고 다녀야 할까?
그 이유는 소위 '건넛마을 복실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출신을 이야기하는 표현방법이다. 자신의 조상 내지는 자신의 정체(성)를 늘 먼저 소개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을 근거로 보면,
복실이는 도처에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놈도 복실이, 저놈도 복실
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복실이만을 정확하게 지명해서 부르고자 할 때, '건넛마을(에서 온) 복실아~'라고 부르면 된다. 또는 '아랫마을 김첨지의 아들, 복실아~'라고 부르면 내가 찾고자 했던 '그 복실이'(the Bocksil)를 정확하게 지명하여 낼 수 있다.
자신의 이름도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도처에 깔린게 복실이인터라 희소성이 없다. 고유함이 없다. 그래서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그런 명확성조차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복실이라는 이름에 고유한 가치를 두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고유성을 밝혀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로지 조상의 이름밖에 없다. 따라서 조상의 이름을 덧붙여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표현할 수 있을 때, '복실이들 중의 그 복실이'(the Bocksil of Bocksils)가 된다. 그리고 명확하게 내가 찾고자 하는 그를 지명하여 부르듯 찾아내게 된다.
|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복실이들 중의 그 복실이' 또는 '복실이들 가운데 그 복실이'라는 표현으로 내가 찾고자 하는 이를 찾아야만 하는 걸까? 이런 표현방식은 왜 중요한 것일까?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요5:43a)
예슈아께서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어떤 이름으로 오셨을까? 흔히들 예슈아를 부르던 이름을 기억해 보면, '다윗의 자손 예슈아'라는 말이 기억날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1:1)
'다윗'David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 노래들 중의 노래
song of songs, Lord of Lords, God of Gods ....
다윗(David; 다바드)이라는 말은 '사랑받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 David(#1732, דָּוִד): perhaps "beloved one," a son of Jesse
그런데 그 어원은 'beloved, love, uncle'의 뜻을 지닌 'Dod'(#1730; דּוֹד)다. Dod가 성경 속에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표현으로 사용된 바가 있는데, 그것은 아가서에 수록되어 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아2:8)
솔로몬은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를 말했는데, 이는 'Qol dodi'(קֹ֣ול דֹּודִ֔י)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성경을 '솔로몬의 노래'(song of Solomon)이라 말하고, 이를 다르게 불러서 '아가서(The song of songs; 노래들 중의 노래)라고 부른다.
| 여기에서 정체성의 표현이 다시금 소개되고 있다.
'허다한 노래들'(songs)이 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그 여인만이 아는 그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그 여인 그렇게 단 둘이서만 알고 있던 그 노래'(the song)를 부르려 한다. 그 노래는 (다른 남자들의 목소리와 구분할 수 있는) 내 여인을 위해 당연히 내 목소리로 불려야 한다. 그 목소리가 담긴 그 노래를 들을 때, 내 사랑하는 여인은
'아~ 나의 사랑, 나의 신랑이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구나'
라고 그녀는 생각할 것이다. 그 노래는 신랑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음을 그 어떤 증거보다 더 확신을 준다.
'Qol dodi'
그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신부는 생각한다.
아~ 나를 사랑하는 자로다.
기쁘다.
나는 사랑받는 자로다.
'사랑받는 자'(David; דָּוִד)
그래서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이의 그 이름'을 내 이름 앞에 내세워야 한다. 예슈아의 그 이름 앞에는 이렇듯, 자신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다윗의 자손
Son of David; בן דוד
당시 '예슈아'라는 이름은 너무나 많았다. '나바의 아들'(바나바)이라 불리던 그의 이름 역시 '바나바 예슈아'였다.
※ [이름 속 창세의 비밀] 바라바였기에 계획되었던 구원
그래서 흔히들 '나사렛 예슈아'라고 부른 것도 또다른 정체성을 붙인 표현이다. 그러나 진정한 정체성을 붙인 이름은 '다윗의 자손 예슈아'다.
다윗의 자손 예슈아가 부르는 노래, 곧 허다한 신부감들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신부를 향해 부르는 노래.
신랑이 자신의 신부만을 향해 부르는 그 노래를 우리는 The song of songs라고 부르고, 이것이 아가서에 담긴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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