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은 내가 알던 그것과 다르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은 내가 알던 그것과 다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4


|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경에는 마치 '떡과 함께~'라는 뉘앙스로 표현되어 있다. 그럼 예슈아는 어떤 기록을 인용했을까? 예슈아께서 인용하신 그 말씀을 찾아 보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개역개정으로 살펴본 신명기의 말씀에서도 '떡과 함께~'라는 뉘앙스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이야기 하나만 잠시 살펴보길 원한다.


우리가 흔히들 아는 명언으로서 에디슨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 천재는...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


굉장히 유명한 말이다. 하지만 정작 에디슨은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가 했던 정확한 말은 무엇일까? 에디슨 그가 당시 인터뷰를 했던 신문기자에게 했던 말은


1퍼센트의 영감이 없으면

99퍼센트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

- 에디슨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말과 에디슨이 실제로 했던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천재가 만들어진다'는 말은 '1%의 영감과 함께' 중요한 무엇이 또 있는데 그것은 '99%의 노력'이라는 뉘앙스로 메시지의 의미가 전달된다. 그런데 실제 에디슨이 했던 그 말은 이와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99%의 노력'은 중요하지 않고, '1%의 영감을 받았느냐는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들 열심히 노력한 자의 모습을 갖기를 원한다면, 99%의 노력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한 자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차원으로 올라가기 위한 부분에서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뉘앙스로 에디슨은 천재의 비결을 알려주었다.


에디슨은 이렇게 말했다. "전에 나는 신문 취재에서 기자에게 '1퍼센트의 영감이 없으면 99퍼센트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고 말한 거였소. 그런데 신문에는 1퍼센트의 영감에 대한 중요성이 아니라 99퍼센트의 노력에 중점을 두고, 나를 노력하는 사람으로 미화하여 진실을 잘못 전달한 것이오. 정말이지 못 말리는 착각이지요."


그렇게 오보가 나간 바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명언은 '노력이 영감보다 중요하다'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감이 없으면 노력을 한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에디슨의 자서전엔 나와 있다. 즉 “1%의 영감 없이는 99%나 되는 엄청난 노력을 해봐야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력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1% 영감을 강조한 것이다.

김성윤 교수의 데일리굿뉴스에 게재된 [칼럼] '1%의 영감이 없으면 99% 노력은 소용이 없다' 중에서


표현을 조금만 바꿨을 뿐인데, 전해지는 메시지의 의미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다. 하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다른 하나는 '영감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자. 이제 성경 말씀으로 되돌아 가보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라는 표현은 왜곡된 에디슨의 명언처럼,


떡도 중요하잖아!


라는 뉘앙스를 갖게 한다. 그래서 위 구절을 제대로 암기하고 다니는 성도들은 흔히들 말한다.


"주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사람에겐 떡도 중요하거든. 그래서 나는 떡을 위해 열심히 일할 거야"


그럼 히브리어 대조 구약성경(편찬. 말씀의 집)에 사용된 표현을 잠시 비교해 보면,


그래서 그가 너를 괴롭히시고 너를 굶기시며 네가 알지 못하고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는 그 '만'(mah; manna)으로 너를 먹이셨으니 이는 '그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으로 그 사람이 산다'는 것을 너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신8:3.히브리어대조 구약성경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두 의미를 가지런히 놓고 비교해 보더라도, 완전히 달라진다.


개역개정의 표현에서는 '떡도 중요하다' 메시지로 전달되는 반면, 히브리어대조 구약성경에서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전달된다. 이러한 차이는 앞서 언급했던 에디슨의 왜곡된 말과 본래의 말에서 나타난 차이와 유사하다.



| 떡으로는 살 수 없고, 오직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만 산다.


떡과 야훼 하나님의 말씀, 이 두 가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던 그간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단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순간은 매우 특이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본질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이 가능해 진다면, 마4:4에서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셨던 예슈아의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런 중에 사마리아의 수라(수가)성에 있는 한 우물가에서 곁에서 예슈아와 과부 한 명의 만남이 기록된 내용이 있다. 그 내용에서 예슈아는 (여인이 마을로 뛰어들어간 뒤) 제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분명히 마4:4에 언급된 두 가지 '떡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신앙심이 있는 이들에겐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으로 간주되는 것들이다. 옳다. 맞다. 하나는 육신의 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영의 양식이다. 예슈아는 분명히 두 가지의 양식을 놓고서,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육신의 떡으로는 살 수 없다. 즉 양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야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만이 유일한 양식이 된다고 하셨다. 그렇기에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a고 분명하게 나누어 설명하셨다.


따라서 예슈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권면이 있다면, (썩을 양식이 아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게 분명하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6:11


우리에게 주신 '주기도문'의 한 내용이다.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용할_양식 이란 과연 어떤 양식을 의미할까?


주기도문 속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 우리는 허다한 논쟁을 벌여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욱 분명해 졌다고 할 수 있다.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권하고 하셨던 것은 '썩을 양식'이라 불리는 육신의 양식인 떡Bread이 아니다. 예슈아는 우리에게 영원히 있을 영의 양식을 구하도록 말씀하셨다.


| 예슈아께서 강조하신 영의 양식이란


예슈아께서 우리들이 먹기를 원하셨던 영의 양식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수라성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던 그 말씀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곧 야훼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며, 우리는 매일같이 이처럼 살아갈 때 그것을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삶을 살면, '살았다 하나 죽은 자로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알게 된 주님의 뜻대로 행하여, 주님의 바램이 이 땅에서 온전히 성취되게 하는 그것만이 우리를 살게 한다고 하셨다. 이것이 영원히 있을 양식이다. 즉 우리가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영의 양식을 준비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이 양식은 썩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의 양식을 먹는 자들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게 말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우리가 먼저 베풀어야 할 바를 알려 주셨다.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뜻대로 행하여 그분의 뜻이 이 땅 가운데서 온전히 성취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주님의 뜻을 먼저 이루었던) 우리에게 (이방인들이 구하던) 그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마7:12에는 없는 단어 '먼저'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삽입한 이유는 마6:33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예슈아의 제자된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나로부터 행하리


라는 그 문구가 바로 '내가 먼저 행하겠다'는 우리들의 신념이요 성경을 주신 이의 마음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먼저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기를 힘써야, 나를 통해 예슈아를 보게 되는 세상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먼저 본을 보이는 삶'이 제자의 삶이요 스승이신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삶이지 않겠는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5


본을 보이는 자는 '먼저'행하는 자다. 이웃에게 먼저 선을 베푸는 우리가 되어야 할진데, 그 이유는 주님의 뜻이 이웃을 사랑하길 바라심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을 소유하길 바라는 이들의 모습에 대해 성경은 '천국은 마치'라는 말과 함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13:44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고 본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보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Lock_down 이 실행됨으로 인해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 재난지원금이 지급된다 할지라도 이는 한시적일 뿐,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작업장이 없는 이상 궁극적인 대안책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일부 매장은 호황을 누리지만) 대부분의 매장들은 영업이 되지 못하고 있어서,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이들이 매우 많아진 시대다.



그럼 우리에게 은혜로 베풀어진 많은 재물들을 그들을 위해 소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했다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우리들이라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물은 잠시 맞겨놓으신 것이니 당연히 그분의 뜻을 위해 사용하는 게 옳지 않을까?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4:10


우리가 받은 은혜를 우리의 영광과 편안함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스스로들 말해 왔다. 그래서 그 은혜를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그 날이 올 때까지, 잠시 보관하는 자로 산다는 게 #청지기의_삶 이다. 재물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니, 주인이 원하시는 대로 그 재물을 사용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나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나의 편리를 위하지 말며, 나의 즐거움을 위해 소진하기 보다는,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우리의 재물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우리 신앙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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