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포지교. 그 안에 깃든 사마천의 비밀은?
한자 문화권에 속한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 하나는 '고사성어'라 할 수 있다.
고사(古史)란 말 그대로 과거의 역사를 일컫는 말로서 간단히 말하면 옛날 이야기다. 하지만 곰곰히 들여다 보면 고사성어 안에는 역사에 능통한 이들에게만 보이는 '만물의 이치'가 늘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옛 조상들의 삶에 대한 지혜가 담긴 이야기로 여길 수 있다.
| 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이치가 담긴 옛 조상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치가 담겼다 해서 그 이야기가 몹시도 진부하고 지루한 것은 아니다. 대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즐거워 한다. 춘추라는 역사책이 관포지교라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비밀을 감춰놓았던 것같다.
관중이 어려운 지경에 처할 때마다 아우뻘인 포숙은 관중의 변명을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제나라의 제일 높은 재상의 자리에 천거하면서 자신은 그 아랫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지요. 그것은 관중의 재주를 포숙이 일찌감치 보아 냈기 때문입니다. 관중은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다."
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말에 사마천이 감추어 놓은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다'는 뜻을 가진 지(知)라는 한자입니다. 이 앎은 그냥 앎이 아니라 알아봄이고 그 봄은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아 내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자질이나 소질을 알아채고 보아 내는 것을 뜻하지요. 관중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관안 열전>에는 알 지(知)라는 한자가 모두 열여섯 차례나 나옵니다. 관중과 포숙보다 한참 뒤 사람인 공자는 안다는 것에 대해 훗날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안다는 말은 사람을 알아본다는 뜻이다."
라고 말이지요.
'사마천의 사기 이야기. 춘추오패2'(글. 유중하)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그렇다. '앎'이라는 말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용하고 또한 그렇게들 알고 있다. 그런데 사마천의 앎은 그리고 공자가 깨달았던 앎은 우리들이 아는 앎과 매우 달랐다. 그의 재능을 눈치챘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의 아랫사람이 될 지언정, 마땅히 그를 적재적소에 천거할 수 있기까지의 결단력 있는 마음을 품은 자가 '그를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 속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추론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로서 이러한 대목으로 설명될 수 있는 두 인물이 있다. 그것은 요셉과 보디발이다.
성경을 익히 잘 아는 우리들은 물론이고 성경을 잘 모르는 이들조차도 요셉과 보디발의 이야기에는 나름 익숙해 한다. 그러면서 파라오가 요셉을 자신 다음가는 총리로 지목했다는 사실에 대해 모두가 인정하고서, 그렇기에 다른 신하들이 요셉의 말에 순순히 복종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숱한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회사 생활에서 실제 모습을 생각해 보라.
하루 아침에 자신의 상관이라고 생판 모르는 젊은 놈이 나타났다. 그것도 낙하산 인사라고 한다.
그를 대하는 나이든 부하직원들의 태도는 어떠할까? 사장님이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외의 자리에서는 그를 상관으로서 대우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부름에 못들은 채 한다거나 일부러 실수를 해서 골탕 먹이는 것은 다반사다. 어린 놈이 상관짓을 하느냐고 화를 내지 않으면 다행히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서도 이와 같은데, 고대 사회에서는 오죽했으랴. 아들이 황제가 되고 싶다고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이 형을 죽이며,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일이 권력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지 않는가?
그런데 나이 30살의 요셉을 하루아침에 자신의 상관으로 삼아야 할 기득권 세력의 마음에서 우리는 성경을 다시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애굽출신도 아니다. 히브리 노예출신으로서 특히나 감옥에 있던 자였다. 그런 자를 어느 누가 자신의 상관으로 인정하려 하겠는가?
| 그런데 보디발이 요셉을 지지하게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급반전으로 뒤바뀔 것이다.
파라오의 직할 부대인 친위대의 권력은 군부대 가운데 최고에 이른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직할 부대였던 친위대가 어떤 권력을 가졌었는지를 기억하면 충분히 이해가 될 듯하다. 이처럼 보디발이 요셉의 능력, 곧 '그에게 야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디발은 알았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여기에서 보디발은 알았다. 야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한다는 그 사실을. 그런데 그는 그렇게 아는 것만으로 혹은 보았던 것만으로 머물지 않고, (개인의 추론이지만) 정치적 기반이 하나도 없던 요셉이 총리직을 무사히 맡을 수 있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것이 요셉을 다른 사람도 아닌 보디발이라고 하는 인물에게 노예로 팔려가게 하신 야훼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이라 할 수 있겠다.
- 나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 여겼지만, 그는 그의 권력을 이용해서 나를 노예취급했다.
- 그래서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그러한 삶을 허락하신 야훼 하나님을 향해 하염없이 부르짖어 '왜 내게 이러시느냐'고 되묻고 또 되물었다.
- 모든 원망과 불평을 야훼 하나님께 쏟아 부었다. 시간만 나면 그 때마다.
하지만 '총리로서 자신의 업무를 순조롭게 이끌어 갈 수 있게 된 그 버팀목은 누구일까?'하고 생각할 즈음에 보디발이라는 인물이 떠오르면서, 요셉은 온 몸이 저려올 만큼 심한 전율을 느끼게 되었으리라.
자신의 억울함을 한 번도 변론해 준 적이 없던 보디발이었지만, 총리가 된 자신을 그 어느 누구보다더 믿고 따라주며 지지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나는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서 총리가 되었다'는 단순한 간증을 넘어서, 그 모든 삶조차 미리 계획하신 야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고 그를 향한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에게 부어진 그 은혜의 크기와 깊이가 얼마나 큰지를 온 몸의 세포 세포가 깨닫게 되었으리라.
| 야훼 하나님께서 요셉에 대해
"내가 너를 안다"라고 말한 그 말씀의 깊이를 요셉은 깨닫게 된다. 요셉의 모든 능력을 아시고, 그 능력에 맞는 적재적소로 요셉을 이끄시는 중에 그의 부족함을 정확하게 채워줄 수 있는 보디발까지 준비해 주셨던 그분의 앎이 얼마나 큰지를.
내 삶을 인도하시는 그분의 능력이시다.
창세 전부터 나를 알고 계신 주님의 그 능력을
오늘 새롭게 또다시 알게 됩니다.
나는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관포지교의 의미를 통해 야훼 하나님의 그 앎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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