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포도밭에 숨긴 보물을 찾겠다며 포도밭은 온통 파헤친 아들들이 발견한 그것은....

 [이솝우화] 포도밭에 묻혀 있는 보물



어린 두 자녀와 함께 동네 도서관에 간 그곳에서 어린 아이들을 위해 준비된 책들이 즐비하게 비치되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솝우화에 눈길이 사로잡혔다. 그래서 잠시 책장을 넘기는데, 다른 때와 다르게 거대한 감동이 내게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 감동을 함께 나눠보려 한다.

옛날 어느 마을에 넓은 포도밭을 가진 농부가 네 아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일하는 데 힘이 부쳤지만, 새벽부터 일어나 밭을 갈고 포도나무를 정성스럽게 가꿨습니다. 종일토록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도, 아들들은 빈둥거리고 놀고먹으며 잠만 잘 뿐 아버지 일을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하루 종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로 시간을 보냈고, 둘째 아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하루 종일 누워서 빈둥거렸습니다. 셋째 아들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넷째 아들은 아버지가 담가서 창고에 보관해 둔 포도주를 꺼내다가 밤낮 가리지 않고 홀짝 홀짝 마시면서 늘 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네 아들을 보고 화를 내거나 미워하지보다는 너무나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네 아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애들아!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니? 너희들이 포토밭을 돌보지 않으면, 머지않아 포도밭이 황폐해져 더 이상 포토를 딸 수 없게 된단다. 이제는 그만 놀고, 정신 차려서 일을 하도록 해라."


그러나 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으며 딴청만 피워 댔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아들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나이 탓인지 자주 피로한 기색을 보이다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병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네 아들을 불렀습니다.

"나는 이제 일어나기가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의식이 있을 때 해둘 말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네 아들은 눈을 둘그렇게 뜨며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물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평생 동안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을 포토밭에 묻어 두었다.

"뭐라고요? 포도밭에 무얼 묻었다고요?

네 아들은 의식이 희미해진 아버지가 잘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아버지 귀에다 입을 바짝 대고 소리쳤습니다.

"포도밭 어디에다 무얼 묻어 놨다는 거예요?

네 아들이 큰소리로 물었지만, 더 이상 아버지의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대답을 좀 해 보세요!

그래도 아버지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방금 전에 숨을 거두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말씀을 끝까지 해주시고 가셔야지. 그냥 이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아무리 소리쳐 불러 봐도 돌아가신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네 아들은 아버지가 포도밭에 묻어 둔 것이 보물일 거라고 여기고, 이튿날부터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괭이와 삽, 그 밖에 집에 있는 연장이란 연장은 모두 들고 나와 쉴 새 없이 땅을 파헤쳤습니다.

"아휴, 힘들다! 그런데 아버지가 진짜로 땅에 보석을 묻어 두었을까?

아무리 땅을 파헤쳐도 보물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자, 네 아들은 저마다 투덜거렸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되었고, 포도밭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그것은 네 아들이 보물을 찾을 욕심으로 한 곳도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포도밭을 파헤쳤다가 덮어서 다져준 덕분이었습니다. 네 아들은 포도를 따서 포도주를 풍성하게 담아 창고에 저장했습니다. 겨울에 그 포도주를 내다파니 실로 엄청나게 큰 돈이 들어왔습니다. 네 아들은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포도밭에 묻어 둔 귀한 보물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우리 앞으로는 게으름 부리지 말고 열심히 일하자. 그리고 서로 도우면서 의좋게 지내자!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일 테니까..."




이솝 우화 中 '포도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란 내용이다.  




여기서 잠깐) 
해당 내용은 아버지의 유언Father's Testament을 다룬다. 유언이라는 단어 Testament는 신약 성경이라고 말하는 Testimony와 동일하게 '증거'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Testimony의 경우 법적으로 효력을 지닌 그런 류의 증거를 일컬으며, Testament는 정신적 또는 내면의 증거로 제시되는 표현이라고 한다.



'포도밭에 자신이 평생 동안 가장 귀하게 여긴 것을 묻어 두었노라'고. 그 유언은 평소 게으름만 피우던 네 자식들의 욕심에 커다란 자극을 유발하는 내용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보자면 '그런 귀한 것들은 게으른 저런 녀석들에게 알려줘선 안 되잖아. 오히려 더 망칠 수 있는데, 왜 저 영감은 미련한 생각을 했을까?'하고 걱정할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장차 남겨질 네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 죽기 직전의 아버지는 네 자식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 게으름만 피우던 네 자식들은 보물을 캐내어 더욱 게으름을 피우며 살 수 있겠다는 욕심에 포도밭 전역을 샅샅이 파헤쳤다. 그러나 보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망했다. 어쩌면 주위 사람들은 실망해 하는 네 자식들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니 포도밭의 포도열매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탐스럽게 열렸다. 그런 포도를 따서 포도주를 담궈 큰 돈을 벌게 된 형제들은 그때서야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아~ 아버지가 포도밭에 숨겨 두었다는 귀한 보물은 바로 이것이었구나"



아버지가 자녀에게 남기는 유언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아버지는 그 자녀가 어떤 자녀라 할지라도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분이시다. 그런 분이 남겨 놓은 유언은 어떤 유언일까? 별 생각없이 있는 그대로 해석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유언이었을까?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한다면, 그가 남긴 마지막의 한 마디는 절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언이 될 수 없다. 
만일 그 유언을 욕심 많은 이웃이 듣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기 때문이다. 평소 게으름만 피우던 자녀들보다 앞서서 포도밭을 파헤쳐 숨겨 놓은 보물을 훔쳐가버릴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유언을 남기는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경륜과 지혜를 짜내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비밀스런 내용의 유언을 남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생전에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는 자녀들이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훈계했던 그 마음까지 담아낸다. 그래서 유언의 비밀을 열어보게 될 즈음,

그 비밀을 보게 되는 자녀라면...
..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서 올바른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충분히 바라보았으리라. 비밀을 알기 이전에, 자신들의 욕심에 이끌리어 아버지의 유언을 해석한 이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순전히 자신의 욕심에 이끌린 부지런함이었지만 결국 아버지의 의도된 모습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렇게 외적인 모습에서 만큼은 아버지의 뜻대로 변화된 형제들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생전에 자신들이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어 본 적이 없던 그들은 낙심이라는 그 자체를 알지 못한 채 살았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떠하든 그들은 생전 처음으로 노력을 했다. 그런데 결실이 없음에 대해 난생 처음으로 실망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풍족한 삶 속에서 늘 부족한 것 없던 마음의 소유자들에게 처음으로 공허한 마음이 자리잡게 된다.


자신이 노력하면 쉽사리 보물을 찾게 될 거라던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아버지가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지?'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존재가 어떤 이였는지 아울러 평소 아버지가 들려주셨던 그 모든 말씀들을 되짚어 생각해 보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비록 지금은 아버지가 계시지 않지만, 아버지의 모든 말씀들이 옳다는 것을 내가 인정한다. 혹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다면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 수 있을거야'라는 식의 뉘우침(테슈바; repentance)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기적은 뉘우침이 있었다고 해서 몇 일만에 일어나지 않는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무르 익을 무렵이다. 한 동안 실망감에 사로잡혀 낙심 속에 살아가던 이들은 포도밭에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부분에서 자신감이 상실된 이들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이보게들. 자네들 포도밭에 포도가 예년보다 훨씬 잘 열렸는걸. 냉큼 가보게나

이웃 사람들의 말이 그들의 귓가에 들려온다. 평소같으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느끼지 않던 형제들은 자신감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그들의 마음은 이미 가난해졌다. 그리고 주변의 도움에 귀를 기울여야 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웃의 말에 이끌리어 자신들의 발걸음을 포도밭으로 향한다. 실망을 안겨주었던 그 포도밭이었지만, 왠지 모를 설레임을 가지고 다가가 본다. 그리고 변화로 가득한 그 포도밭을 보고서, 그들의 마음 속에는 아버지의 유언 속에 담긴 참 의미가 밝히 해석된 채로 가득채워지게 된다. 


"아~ 이것이었구나.
"형제들의 변화된 부지런함이 아버지의 포도밭에 뿌려질 때,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보물이 드러나는구나.

그렇다. 어느 포도밭보다 훌륭한 포도밭이다. 하지만 그 포도밭의 훌륭함은 그냥 드러나지 않는다. 게으른 자 앞에 드러날 그런 시시한 훌륭함이 아니다. 오직 성실하고 정직하게 땅을 일구는 그런 이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훌륭함이다. 

아버지의 보물을 바라본 형제들은 부지런한 자로 변화된 그들의 삶에 지런해야만 하는 그 필요성이 더하여지게 된다. 그리고서 이내 아버지가 바라던 그런 자식들이 된다.



이솝의 우화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유대인들의 지혜가 담긴 탈무드 못지 않게,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지혜와 교훈들이 이솝의 우화 속에도 함께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솝 우화는 성경을 대하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고 본다.

성경 말씀을 주신 그분은 오직 '자녀에게'만 교훈을 주신다. 그래서 아버지가 들려주는 유언처럼, 우리에게 남겨주신 이 말씀들의 이해는 그 깊이와 너비와 길이와 폭이 얼마나 큰지 아는 이가 없다. 성경 말씀을 대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성경 말씀을 대해야 하는 지 깨닫게 하는 부분이다.


그분의 경륜과 지혜의 크기가 얼마나 클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담아낼 수 없다.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조차 없다. 그런 분이 들려주신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이해했다고 말하는 건 아닌가 우려된다. 그분의 말씀은 어느 철학자의 말보다 심오하고 오묘하기에, 그분의 말씀을 섣부르게 이해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요. 그분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해서 자신의 깨달음만을 고집하는 우둔한 모습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리라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했듯이, 우리의 이해와 깨달음 역시 우리의 수준 안에서 비롯된 충만함일 것이다. 3명의 사람에게 각각의 유리잔이 놓여 있고, 주님은 그들의 잔에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하지만 잔의 크기가 같다고 여겨선 안 된다.



한 명은 소주잔이고, 하나는 머거컵일거며 다른 하나는 물조리개처럼 커다란 잔일 수 있기 때문이다. 3명 모두에게 차고 넘치도록 부어진다고 하더라도, 부어진 물의 양은 차이가 난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믿음의 크기를 거론하는 이유가 이러한 사실들을 언급하기 위함이지 않나 싶다.


이솝 우화에서 처럼 사랑하는 아버지는 전심으로 노력하는 만큼의 보물 수준을 제시한다. 성실하게 포도밭을 일군 자에게 그들이 땀을 흘린 그 수준에 맞춰 포도의 풍성함을 선사했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성실히 살았던 그 수준만큼의 천국 역시 준비될 것으로 생각하는 판단도 이런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를 주신 분에게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더 나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요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시기 위한 배려'이기 때문이라 여길 수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 말씀의 크기가 오늘 따라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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