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게 들려주는 이솝우화] 회초리와 형제들

[어른에게 들려주는 이솝우화] 

회초리와 형제들


나눗셈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면 대개 초등학생 수준의 이야기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누게 될 나눗셈에 관한 이야기는 초등학생 수준을 훨씬 뛰어 넘어 실질적인 삶의 지혜 수준에서 나눠보고자 한다.




| 이솝 우화 가운데 '회초리와 형제들'이라는 내용이 있다.

서로간에 우애라고는 찾아보기도 힘든 3명의 형제들과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의 이야기다. 어느날 아버지는 3명의 아들을 모두 모이게 한다. 그리고 회초리 12개를 들고 온다. 이를 본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혼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즈음 아버지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애들아, 이 회초리 묶음을 한 번에 부러뜨려 보아라."


3명의 아들들은 차례로 돌아가면서 12개의 회초리가 묶여있는 묶음을 부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하나씩 꺾어 보아라"


아버지의 또다른 제안에 형제들은 한 명씩 회초리 하나씩을 너무나도 쉽게 꺾어 보였다. 묶음을 꺾지 못했다는 실패감에서 이제는 꺾을 수 있다는 성취감이 드니 재미가 생겼다. 형제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12개 회초리 모두를 자랑스럽게 꺾어 보였다.


그들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묵묵히 지켜보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회초리를 하나씩 흩어 놓으면 누구라도 쉽게 부러뜨릴 수 있단다."

"하지만 한데 묶어 놓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부러뜨리지 못한단다."

"너희도 마음을 하나로 합한다면, 아무도 너희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란다."

"그런데 하나씩 제각각 흩어져서 싸움만 해대면 사람들은 너희들을 무시하고 얕볼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들 잘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에 나눗셈의 또다른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 하나의 묶음을 12개의 낱개로 흩으려 한다면 이는


'1set ÷ 12'


를 하면 된다. 하나의 단체를 자연수로 나누면, 그 단체는 산산조각 난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오합지졸(烏合之卒)이 되고 만다. 이 오합지졸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자연수로 나눗셈하는 실제의 경우'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오합지졸이란 질서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질서를 갖추지 못한 무질서의 상황을 일컫는 말로서, 까마귀가 모인 것처럼 질서 없이 모인 군중을 의미한다.



| 질서를 지키는 멤버와 질서를 지키지 않으려는 멤버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신의 개성 내지는 개인의 방만한 자유를 강조하는 경우와 (전체를 위해) 자신의 개성 내지는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절제력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와 반드시 함께 공존해야만 나 자신의 생명이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존이 가능한 사회 구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나 개인만 만족할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상대방을 최대한 배려할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하는 게 현명한 사회규범이 된다.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해주고 배려해 줄 때, 상대 역시 나를 먼저 배려하고 이해해주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둘은 하나라는 공동체가 될 수 있으니, 이를 묶음(set)이라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중시하고 상대에 대한 무관심이 증대되면, 자연스럽게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게 되어 서로간에 간섭하지 않는 혼자만의 삶으로 나뉠 수 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그런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런 자유는 방만한 자유로서 사회에서는 결단코 허락되지 않는 자유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에게 그런 자유가 있다고 하면서 그런 자유를 갈망하게 하고 그런 자유를 위해 노력하게끔 하면, 그 사회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각각의 마음으로 나뉘게 된다. 

이렇게 나뉜 구성을 상대로 그 사회를 점령하려 한다면, 누구나 쉽게 그들을 무너뜨리고서 정복해 버릴 것이다.



| 손자병법에 나오는 유명한 병법이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 한다.


전력이 약한 군대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적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이때 전력이 약한 군대가 어떻게 하면 강한 적군을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그건 내부 분열을 야기하면 된다.

하나로 뭉쳐있는 그 마음들을 제각각 흩어놓는 병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친분이 두터운 이들을 상대로 싸울 때 '친한 사이라면 이간질시킨다'는 친이리지(親而離之)의 계책은 주로 우둔한 자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를 위해 첫 단계는 '그 사회에 불만이 있는 자'(소외된 계층들)를 찾아서 그의 야망에 불을 지핀다.

헛된 야망을 꿈꾸게 하고, 그를 통해 팀원들에게 거짓된 정보를 흘려 보낸다. 그것으로 인해 정보를 분별할 줄 몰라하는 이들을 주축으로 하나로 뭉쳤던 마음들은 서로간에 불신이 싹트게 된다. 신뢰가 무너지게 되면서 결국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급기야 상대를 제거하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런 상황에 처한 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면, 어느 누구인들 쉽지 않겠는가?


그래서 흔히 말하는 것이 있다.


유능한 적군보다 무능한 아군이 더 두렵다


하나로 뭉쳐있어서 강력했던 아군을 오합지졸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우둔한 아군이 된다. 거짓에 선동되어 자기 편을 비난하고 조롱함으로써 내부 분열을 자행하는 그런 무리를 일컫는다.




그런 이들은 누군가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와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헛된 말을 들려주니,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 그처럼 우둔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아군은 도대체 누구일까?


젊은이를 타락으로 이끄는

확실한 방법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대신​​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이

존경하도록 지시(교육)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




| 니체가 경고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 자녀들이 우둔해 지는 것을 그 무엇보다 걱정했던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을 누구보다 바랬던 니체다. 그렇기에 반대로 스스로 생각하는 기회를 상실한 채 그저 '누군가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만이 존경받는 행동이라는 교육이 제공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럼 이러한 교육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행되고 있었을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것을 가리켜 우민화 정책이라 한다.





3S 정책을 보면 창작을 유도하기 보다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초신경만을 자극받게 할 뿐이라 여길 수 있다.

그래서 TV를 가리켜 바보상자라고 말하는 것이고, 3S 모두 스마트폰을 통해 시청할 수 있게끔 각종 다양한 컨텐츠를 개발하여 보급하게 되니 우리의 젊은이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부분에만 집중하게 된다. 사실의 진위여부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그저 자극적인 컨텐츠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갖고 추종한다. 그래서 그런 세대를 가리켜 '컨텐츠 세대'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데카르트가 남긴 다음의 한 마디의 말이 왜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당대를 풍미하던 철학자가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생각하는 자'라는 모습으로 남겨 놓았다는 그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하리라 본다. 내 자녀가 우리를 망치는 우둔한 아군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자녀에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은 오랜 시도를 통해 습득되어지는 것이기에, 실수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제공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자녀의 실수를 통해 (정죄를 하기 보다는) 개선할 부분을 찾아 더 나은 이로 성숙할 수 있게끔 이끌어주는 그런 교육을 부모가 그리고 선생님들이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나눔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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