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춤추게 하고 싶다면? 그의 장점을 찾아 '칭찬하라'(praise)

신앙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든 속하지 않은 이들이든 모두가 잘 아는 말이 있다.
"칭찬(praise)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pixabay (below all)


인간의 말(sound; word)을 알아듣지 못하는 고래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에게 "인간의 지시에 따라 춤을 추"게 하고 싶어한다. 그 모습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고래를 자신의 본래 의도대로 따라오게 하기 위해, 또는 자신은 목자가 되어 고래를 인도하고자 할 때 가장 좋은 것은

"판단과 정죄"
가 아니다. "칭찬"을 해 주어야 고래가 스스로 인간의 지시(명령)을 따라 순종한다.

그럼 무엇을 칭찬해야 할까?


못하는 모습 또는 악한 행동을 했던 그 모습을 칭찬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런 부분들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칭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칭찬할 수 있을까?

세상의 어떤 존재든 "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특기"가 있다. 어느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필코 행하는 그 존재만의 장점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굴하지 않고 행할 수 있는 그런 삶의 모습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쓰레기 장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재생 가능한 물품이나 실수로 잃어버렸던 진귀한 보석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 부분을 찾아야 한다.


매일같이 실수하는 실수투성이지만, 늘상 자신의 업무량에 미달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그의 진귀한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겐 "영적 안목"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필요하다. 그 안목을 가진 가운데 그에게서 그가 잘하는 부분을 찾았다면, 혹 그것이 100의 1가지 밖에 되지 않더라도 그 부분을 칭찬해 줘 보라.

그 칭찬이 처음에는 무척 낯설어서 그가 오히려 반색하여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내"를 품고서 거부하는 그에게 매달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를 칭찬해 보라.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거부하겠지만, 이후에는 주저하면서 쑥스러워하지만 칭찬받는 것에 얼굴에 화색이 돈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에게선 99가지를 못하는 무능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리지고, 비록 한 가지밖에 잘하는게 없을지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 당찬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에 머무르지 않고, 두 가지를 정복하고 세 가지를 정복하는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즐겁게 넓혀갈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정복한 능력들을 통해 자신을 두렵게 했던 이전의 세상들을 이제는 다스리는 자로 그는 변모할 것이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정죄와 판단"을 앞세우는 우를 범하지 말자.

성경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서 "인내와 절제 등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요구하고 있지 않는다. 믿음이 굳건하다는 이들에게서만 요구한다.

왜 열매를 요구하겠는가?
그 열매를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수확하여 나눠야 하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고래도 춤추게 할 수 있는 "칭찬"을 우리 신앙의 공동체에 속한 이들도 즐겨 행하는 모습으로 삼아보자. 일단은 필자 본인도 무척이나 칭찬하기에 인색한 삶을 살았었다. 그러나 오늘 이후부터는 칭찬하기를 즐겨보고자 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칭찬하기를 뱀과같이 빨라야 하겠고, 정죄와 판단하기는 우둔한 자와 같이 더디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보려 한다.

자신의 처소가 어디에 있든지, 마음에 합한 감동이 든다면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세워주는 그런 사역을 각자의 삶 속에서 행하는 동역자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의 심리………를 정확히 지적한 댓글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키질과 휴거는 예루살렘 성전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던 의외의 장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