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대가 악한 이유

먹고 마시는 일에 집중했을 뿐인데, 왜 그런 세대를 악하다고 말할까?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집중했을 뿐인데, 왜 그런 세대를 악하다고 기록했을까?


먹고 마시다.

"먹고 마시다"는 의미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켰다는 1인칭 시점을 가리킨다. 즉 배고픈 옆 사람에게 먼저 먹고 마시도록 배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배고픔을 먼저 고려하였고, 자신의 어려운 문제에만 집착하여 주변의 어려운 사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래서 자신의 배고프고 목마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삶을 살았던 모습은 "먹고 마셨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소위 타인에 대한 배려를 "타인의 대한 무관심"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은 오늘날을 보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었더니, 도리어 보따리를 내 놓으라"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이 각종 매스컴의 핫이슈로 전달되었다. 이러한 메시지는 삽시간에 얼음장처럼 얼어 붙은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옆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냥 바라보고만 있다. 혹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수준은 '경찰 또는 119에 전화를 걸어 주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 된다. 심지어 미투(Me too) 사건은 이러한 사회적 풍조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젊은 세대는 물론 기성 세대까지도 "타인의 문제에 무관심하는 것이 타인을 돕고,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같은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맞는 이들끼리만 어울리고 식사하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마음에 맞지 않는 동료에 대해선 전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러한 태도는 "마음에 맞지 않는 동료에 대한 배려"라는 차원에서 합당히 여겨진다.

이것이 오늘날의 사회적 풍조로 인식되어지고 있고, 상당히 많은 이들에 의해서 합당하게 행해지고 있다.

자신을 위해서만 "먹고 마시는 것"이 부당한 처사나 도리에 어긋난 삶이 아닌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노아의 시대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하고, 이를 "평행 이론"으로 정립하여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먹고 마시는 문제가 왜 문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얻었을 줄로 믿는다.

시집가고 장가가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 또한 사회적으로 합당하여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은 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유행하듯 행할 수 있었다. 노아와 그의 자녀들만 제외하고. 어떻게 되어야 이처럼 될 수 있을까?

요즘 젊은 청소년들에게서 볼 수 있다.
여러 명의 남녀로 이루어진 그룹을 예로 들어보자.
A라는 남자가 a라는 여자는 연인이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헤어진다. 이후 얼마되지 않아 A의 친구인 B라는 남자와 a라는 여자가 사귄다. 그러면서 A와 B가 친구로서 만나는 자리에 자연스럽게 B의 연인으로서 a가 등장한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무척 복잡하게 얽히고 섥혔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상황으로서, 아무런 문제될 게 없다.

"과거의 관계가 왜 중요하죠?"
"우리에게는 현재가 중요해요"

20여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사회적 풍조이지만, 매스컴을 통해 소위 "막장 드라마"는 사회 전반에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내 여인이 얼마 후엔 동생의 여인이 되고, 그 이후에는 친구의 여인이 되며, 마지막에는 다시 내 여인이 되는 상황.

그런데 이러한 막장의 상황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미롭게 그려졌다.


겨울연가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드라마라 평가될 만큼 강력하게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강준상(배용준)과 정우진(최지우)의 연인 관계는 김상혁(박용하)과 정우진(최지우)의 연인으로 바뀐다. 이후 이 관계는 반복적으로 바뀐다.

이처럼 반복적으로 관계가 바뀌는 것을 극적 효과를 높임으로 인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애절한 마음을 품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의 변화에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라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인식의 단계에서 인정하게 되면, 그러한 메시지는 사회 전반적으로 가시화된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애정의 관계들이 점차 삶의 주변에서 실체화 되어 쉽사리 보게 된다. 그리고 사회 전반적으로 "연인이 바뀌는 것"은 대수롭지 않는 일상의 다반사 가운데 하나로 가볍게 여기게 되고, 이후 "이혼은 인생의 흠이 아니야"라는 또 다른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된다.

pixabay (below all)


어찌보면 이혼은 흠이 아닌, 보다 더 나은 부부간의 성생활을 도와주는 화려한 훈장이 될 수 있다는 개념으로까지 확대된다. 미국의 청년 세대에서 인정된 이같은 인식은 미국을 세계 최고의 퇴폐적인 성 문화를 이끄는 선두주자로 만드는데 매우 강력하게 기여한다. 부부라는 개념이 상당히 희박해졌다. 서로 눈이 맞으면 낮에는 부부였지만 밤에는 그저 잠자리 파트너 가운데 하나로 바뀐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이혼을 염두에 둔다. "내가 번 돈은 내가 저축하고, 네가 번 돈은 네가 저축하라"고 한다. 그리고 "서로 일정액의 공동 금액을 책정해서 그것으로 생활비를 삼자"라고 합의한다. 아울러 "자녀를 낳는 문제는 유보"하는게 참으로 멋지고 쿨(cool; smart things)하다고 여긴다.

노아의 시대는 이보다 덜 했을까? 아니면 이보다 더 했을까?

"50보 100보"이지 않을까?

대략 1000년을 살던 시대로서 "천년 왕국"이라 부를 수 있는 시대다.

창5장(개역개정)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대충 몇 사람을 살펴 보았다. 대략 100세 전후에 자녀를 낳았으니 분명히 100세 이전에 결혼을 했으리라 가정해도 무난하리라. 그래도 100세에 결혼했다고 해 보자.

얼굴과 몸매에 반하여 결혼을 할 경우, 그 감정은 잘하면 6개월 또는 1년 간다. 그런데 천년 왕국 시대에는 100년 간다고 가정해 보자. 개인의 소욕을 채우는 데에만 집중하는 이들은 첫사랑이 식어지면 쉽게 이혼하고 다른 상대를 찾아 떠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혼을 한다고 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어려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홍수도 없었고 기근도 없었으니, 지천에 깔린 풍부한 먹거리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이혼이라는 문제가 삶에 어떠한 어려움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처럼 풍요로운 생활 환경은 이혼에 대해 모든 이들이 일상의 다반사로 가볍게 여기게끔 도왔다. 최소 노아와 그의 3 아들들을 제외하고, 그 외 모든 이들은 이혼은 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성생활을 보다 더 퓽요롭게 만드는 삶의 경력으로 여기게끔 했으리라. 지금의 미국 사회가 갖는 풍조처럼.

100년에 한 번씩 배우자를 바꾼다 할지라도 이들은 최소 7~8명 이상은 이혼과 결혼을 번갈아 할 수 있다. 그런데 퇴폐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결혼의 서약이 지속되는 기간이 매우 짧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략 3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오늘날처럼 이혼과 재혼이 많지 않았다. 이혼은 커다란 아픔이요 인생의 흉으로 여겼기에, 가정을 깨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결혼을 언제 했느냐가 결코 중요하지 않아졌다. 마음이 상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지, 결혼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는 사라진지 오래다. 초스피드로 이혼한 사례가 보도되듯 결혼식을 끝마침과 동시에 이혼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신혼여행 도중에 남편(또는 아내)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다른 상대를 찾아 결혼한다.

노아의 때에도 유사했으리라.

처음에는 100년만에 이혼을 했지만, 이 기간이 짧아진다. 50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이후에는 25년, 10년 등등으로 짧아질 수 있다.

"저 사람은 500년 전에 나와 결혼했던 사람인데."
"저 사람은 700년 전에 나와 살았던 배우자인데."

이러면서 몇 백년이 흐른 뒤에 다시 만난 이들은 다시금 육체에 매료되는 일이 발생하여 새롭게 결혼관계를 만들 수 있다.

부족함이 없는 생활 환경 속에서 삶의 고난이 있다면 무엇이 있었을까?
환경은 부족한게 없다. 마치 재벌의 초호화로운 삶처럼. 그래서 환경에서 비롯되는 고난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 특히 부부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문제가 삶에서 가장 큰 고난이 될 것이다. 이 고난을 피하지 않고 극복하는 이들은 고난 속에 감춰져 있던 (세상이 줄 수 없는)진귀한 비밀을 얻게 된다. 세상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절친한 친구를 얻게 된다.



그런데 부부간에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고난이 생길 때마다 이혼을 해 온 이들은 진귀한 비밀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늘 생각한다.

"이번에는 어느 누구와 결혼할까?"

우리는 귀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권면하기를 "의미있는 인생을 살라"고 말한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충고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어서 "가정"이라는 것이 "의미"(가치)가 있었을까?
그는 가정을 지키고 유지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까?



그는 인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 밀려오는 홍수를 바라보면서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리 소리질러 도와달라고 외쳐보지만, 그에게 있어서 "죽음을 감수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친구"가 있었을까? 부족함이 없는 이들은 아쉬운 말을 하지 않고 산다. 항상 뻣뻣하게 쏟아 오른 목을 지니고 산다. 그래서 그는 "도움을 주는 입장"은 될 수 있지만, "도움을 받는 입장"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할지라도, 감히 "나의 행동을 용서해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 백억의 재산을 위자료로 지불하는 일이 발생할지라도, 결코 머리를 숙이는 않는 재벌들 처럼. 사과할 생각도 없고, 용서할 마음도 없는 세대들이 바로 대홍수의 시대를 살던 세대였다. 그런 이들에게 친구는 없다. 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했던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땀을 쏟아가면서 의미를 심어 놓았던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먹고 마시며 성적 쾌락만을 즐기고자 시집가고 장가가기를 즐겼던 그런 파트너만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이처럼 행동할 때, 노아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았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그 때에도 노아(와 그의 자녀들)만은 "서로 다른 이들이 공존(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을 선택했다. 이혼은 일상의 다반사로 여기는 무리들 속에서 노아(와 그의 자녀들)만은 마치 양떼가 목자의 걷는 길을 "지켜 유지해"(shamar, 샤마르)나가듯, 결혼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이들을 성경은 "의인"이라고 말한다.

눅1장(개역개정)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은 칠거지악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를 빌미삼아 합당한 강제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 합당한 것이니 전혀 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사회가 흠이 없는 삶의 모습이라 여겼음에도 사가랴는 그리하지 않았다. 세상이 흠없다고 여기는 그 일은 야훼 하나님 앞에 반드시 흠이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흠없는 일을 따르지 않았던 사가랴는

"흠없는 자"로 인정받았다.


창세기 6장(개역개정)
9. ...(중략)...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여러분.
악한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개역개정).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세상이 옳다고 여기는, 세상이 합당하게 여기는 그 일을 직면할 때면 반드시 분별을 시도하십시오. 교회(공동체) 안에서 옳다고 여기는 그 일에도 분별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계획하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분별하십시오.
자연의 섭리요 창조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들, 그리고 서로 다른 이들이 공존(공생)하는 일을 우선하여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십시오. 그 기본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가정이고, 더 확장하며 서로 다른 둘 이상의 당파(party)들이 국정을 올바르게 인도합니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왼손과 오른손이 합력할 때, 물건을 가장 단단하게 쥘 수 있다는 창조의 질서를 지켜나가는 그런 여러분이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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