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나엘은 어떻게 예슈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되었을까?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설교자 분들은 다양하게 거론해 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분들은 그 이름을 익히 잘 알고 있다.pixabay (below all) |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떠 올라서 질문을 해 본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슈아께서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던 너를 보았다는 그 말에 예슈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그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목숨조차 아끼지 않을 만큼 메시아에 대한 신뢰가 큰 이스라엘 백성인데, 그 한 마디에 예슈아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있다는게 너무 궁금합니다."
이같은 질문을 던진 이가 또 있을까?
필자는 너무 아는게 부족한 건지 혹은 쓸데없는 부분에서 의문이 생기는 건 아닌지 싶다.
하지만 궁금하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면 납득할 만한 답변을 주는 이가 없다. 왜 설명을 못할까?
일전에 한 연구소에서 잠시 근무하던 적이 있었다.
당시 3쪽 짜리 짧은 논문(paper) 하나를 골라 팀원 앞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는 광학이라는 학문을 약간 배웠을 뿐, 자세히 배운 적이 없었는데 그 논문은 광학에 관한 연구 자료였다. 책상 앞에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발표 시간은 다가오는데...발표 시간이 되었다. 내가 나름대로 요약정리한 내용을 팀원들 앞에서 설명해 나갔다. 그런데 내 설명을 듣던 팀장이 발표를 중간에 끊고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되는 군요."
그렇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인터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이지 설명하는 나 조차도 모르면서 그저 "횡설수설"할 뿐이다. 팀장의 지적은 명확했다.설명이 난해하고 복잡하다는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말하려는 그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을 지적했다.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설명 또는 횡설수설 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자신도 모르고 그 조상도 모른다 할 정도로.
그러나 논문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했다면,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시간을 충분히 갖는다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조심스럽지만, 내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 주지 못한 분들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을 수 밖에 없었다. 필자가 경험했던 사실이 있었기에.
그러던 어느날 주일 설교를 듣던 중에 무심코 나다나엘과 예슈아의 대화하는 장면을 펼쳐보게 되었다. 그 순간 "아~"하는 작은 탄식의 소리와 함께
왜 나다나엘이 예슈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가 일순간에 깨달아졌다. 어떤 자료를 찾았거나 혹은 설교자의 설명을 들은 것도 아니고그저 성경책을 펼쳤을 뿐인데.
요한복음 1장 46~50절에 이르는 내용이다.
| 나다나엘이 예슈아를 알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확신
나다나엘이 그에게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니 빌립이 그에게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1:46.흠정역)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선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것과 동시에 그는 생명의 떡(빵; lechem, 레헴)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같다. 그래서 최소한 빵을 구워내는 빵집(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면 모를까 나사렛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것은 납득할 수 없었던 자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확신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예슈아는 비록 '나사렛 예슈아'로 불리고는 있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립과 매우 두터운 친밀함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당신의 확신과 다를지라도, 나를 믿고 와서 봐 보세요"라는 그 말에 자신의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빌립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예슈아가 계신 그곳으로 나갔다.
| 나다나엘에게 먼저 말을 건네신 예슈아.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 하시니 나다나엘이 그분께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1:47~48a.흠정역)
이 부분의 상황을 3류 영화처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 슈 아 ▷ "저기 걸어오는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같은데."
나다나엘 ▷ (빈정대듯) "저기요. 저를 아세요?"
예슈아의 말씀이 거짓이었기에, 혹은 가증스런 아부였기에 나다나엘의 태도가 그랬을까? 예슈아는 진실을 말씀하셨다. 예슈아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또한 진리까지도 직접 들었지만, 무조건 "아멘~"하고 인정하는 그런 상황은 오지 않는다. 나다나엘의 저런 태도를 보면 예슈아께서도 상당히 무안하셨지 않았을까?
수학 시험을 본다. 주관식 문제가 출제 되었다. 그런데 학생은 (풀이 과정을 남기지 않고) 단지 "답"만 적었다. 물론 답은 맞다. 이 경우 체점은 어떻게 될까?
답만 남기는 주관식 문제는 오답처리가 된다. 풀이 과정 곧 "명확한 설명"(증거; 증인)이 없기 때문이다. 풀이 과정이 없다는 것은 (필자의 앞선 경험처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못했는지를 가늠할 수 없다. 혹은 옆 사람의 답을 몰래 받아 적는 부정행위를 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관식 문제는 반드시 '풀이 과정'(증인)을 서술해야만 점수가 인정되는데, 풀이 과정을 남기지 않았다. 그럼 당연히 오답처리가 된다.
예슈아와 나다나엘의 대화도 그렇다. 예슈아는 풀이 과정이 없는 "정답"만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그 부분은 인정할 수 없다. "당신이 나를 언제 봤다고 그렇게 말하세요?"라는 다소 언짢은 표현으로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나타내는게 당연하다.
| 예슈아의 황당한 부연설명
예슈아는 풀이 과정, 모든 사실을 명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증인(proof)을 가장 중시하시는 분이시다. 율법이 이를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슈아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나다나엘에게 언듯보면 매우 황당한 부연설명을 곁들이신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 하시니(요1:48b.흠정역)
예슈아의 이같은 부연설명이 있자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 저 양반이 어떤 생각으로 저렇게 말씀하셨을까?"
모두들 난감해 하는 표정들이었지 않았을까? 빌립을 만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다짜고짜 그 이전에 나다나엘을 만났었다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황당한 설명인가.
그런데 나다나엘에게는 그 부연설명이 '마음의 정곡을 제대로 꽂았'(yara; to throw, shoot)다. 예슈아의 이 말을 들은 주변의 모든 이들은 황당해 하는 반면, 나다나엘의 마음에는 그 무엇보다 명확한 설명이 들어온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과거 경험을 제대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 나다나엘의 지난 과거
나다나엘이 왜 무화과 나무 아래에 갔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아래에서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그곳에서 메시아와의 '영접 만남'(encounter)이 있었다. 그리고 그분과의 만남 중에서 나다나엘은 메시아로부터 뜬금없지만 귀한 한 마디의 말을 들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
명확한 증거로서 A가 있다. 하지만 이 증거가 엉뚱한 시간대에 놓이면 횡설수설하는 설명으로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이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정확한 시간대에 그 증거가 놓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듣는 모든 이들에게 어떠한 의문도 들지 않을 정도의 명료함(clarity)을 전해 준다. 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퍼즐이 정확하게 결합된 것처럼,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명확함을 안겨 준다.
물리학에서도 공명효과라는 것이 있다. 두 개의 파동이 있는데, 두 파동의 주파수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면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큰 효과가 나타난다.
나다나엘에게 있어서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의 경험은 어느 누구도 모르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들었던 "그 말"도 오직 자기 자신과 메시아 만이 아는 말이다. 그런데 예슈아께서는 "그 말"을 정확한 시간대에 올려 놓았다. 그 순간 나다나엘은 100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된 듯, 꼼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예슈아의 황당한 답변에 놀라고, 그 답변에 경직해 버린 나다나엘에 또 다시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크게 경악할 만큼 놀랄 일이 남아 있다.
| 나다나엘의 고백과 그의 영접
나다나엘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선생님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요1:49.흠정역)
나다나엘의 태도가 바꿨다.
초반에는 빈정대듯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했다. 존칭이나 어떤 호칭도 없이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랍비여~ 선생님~"으로 불렀다. 유대 사회에서 랍비는 존경의 대상이며 "율법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다. 그래서 나다나엘의 호칭이 갖는 변화는 예슈아를 향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개역개정)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즉 예슈아는 메시아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다나엘의 이같은 태도 변화를 목격한 주변 인들은 어땠을까? 삽시간에 100만 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듯 상황이 급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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