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17의 게시물 표시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 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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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 즉 ....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롬11:16) selmaala.blogspot.kr   A replica of The Table of Shewbread was part of the Old Testament Tabernacle  display last weekend at the Selma Pilgrimage. Tabernacle Ministries of Mobile  brought the exhibit to Selma. "Shewbread" or "showbread" means "bread of the face"  or set out before the face and presence of God. 그는 진설병(빵)에 관하여 말하고자 했을까? 교회는 성도 우리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각각의 성도가 거룩한 자로 거듭날 때, 성도들의 공동체, 곧 교회(공동체)는 거룩한 곳이 된다. 하지만 거룩과 상관없는 삶을 성도라 일컫는 자들이 살아간다면? 교회(공동체)는 두말 할 것 없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없다. 교회(공동체)는 이렇듯 성도 한 두명, 또는 목회자나 은사자 한 분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곳이라 칭함을 받는 곳이 아니다.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거룩할 때, 거룩한 공동체라 칭함을 얻게 될 것이다. 고로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모여서, 더불어서 행동함으로, 서로 조화(harmony)를 만들며 서로간 균형(balance)를 맞춰 나가는 것 을 통해 형성되는 곳이 교회(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사도 바울의 말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오늘날의 교회(공동체)를 겨냥하여 말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은 이렇듯 오늘 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친숙한 삶까지도 예리하고 세세하게

거짓말 한 자는 상금을 받고 진실을 말한 자는 벌을 받다? 무엇이 잘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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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한 자는 상금을 받고 진실을 말한 자는 벌을 받다? 무엇이 잘못일까? 이솝 우화의 이야기 중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 정글북의 한 장면 거짓말을 하는 이와 사실만을 이야기 하는 두 사람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원숭이의 나라를 지나쳐 갈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원숭이 왕은 이 두 사람을 초청하게 된다. 그리고는 두 여행자에게 자신과 자기 신하에 대해 평가해 주길 부탁한다. 그러자 거짓말쟁이는 "전하, 전하께서는 가장 훌륭하며 위대한 왕이십니다. 이 사실을 만천하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신하들에 대해 말하기를 "어느 면모로 보나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라고 말했다. 원숭이 왕은 기뻐하면서, 거짓말쟁이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거짓말하는 자가 거짓말을 하고도 큰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사실을 이야기하면 더 큰 선물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전하는 멋진 원숭이고, 신하들도 역시 멋진 원숭이입니다." 이 말을 들은 원숭이 왕은 몹시 화를 내며, 그를 당장 끌고 가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서로 소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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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 듣기] 서로 소통하는가? 두 사람이 있다.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상하게도 상대방의 말에 동문서답격으로 대한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pixabay 우리가 "대화를 한다"고 말할 때에는 단순히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 되는 것으로 오인하곤 한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부모가 자녀를 상대로 열심히 열변을 토하듯 말하고 그 자녀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자세로 임하는 모습이다.  이럴 경우 서로간에 대화가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부모의 의중을 자녀는 대화 내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부모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의 행동은 필경 동문서답격이 된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용어로 다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입장"(처지)이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배려"를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고 한다. Put yourself in other's shoes! 易地思之 언어는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의 결과를 기대하면서 동일한 배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왜 "입장 바꿔 생각하기"란 배려의 모습을 각 사람들이 품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는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리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 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용어를 곁들인다면, 서로 다른 "차원"을 같은 차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이들이 각자의 신령한 말들을 하겠지만, 이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꽹과리의 울림과 같을 뿐이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b) 결국 상대에 대한 배려, 곧 역지사지의 마음은 "사랑"하는

학생이 공부를 하는 본질적 이유 그리고 신앙의 본질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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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공부를 하는 본질적 이유 그리고 신앙의 본질적 이유 필자는 자라면서 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수업을 들으며 그에 맞춰 공부를 했다.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그리고 대학 4년으로 끝 마치려다가 이에 조금 더 공부하기로 결심하고서 대학원 석사 과정 3년, 박사 과정 3.5년으로 도합 약 23년(22.5년)이다. 23년간 공부를 했다. 그렇기에 이즈음에서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걸까?"라는 단순한 질문 하나 정도는 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전기(Electricity)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삼위일체(Trinity)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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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의 속성에는 함께 자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 그것은 양(positive)과 음(negative)의 성질이다. 이 두 성질은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8~9)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아브라함이 이르되......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5~26) 그런데 무지한 작업자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두 성질을 하나되게 하는 과정에서 "중간"에 저항(load; 짐, 고난)을 설치하지 않을 경우 무서운 일이 초래된다. youtube <관련 영상>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히브리의 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 (참고 자료:  남편과 아내의 히브리어에 숨겨진 구원의 이야기… ) 남편(אישׁ; eesh)과 아내(אשה; eeshah)의 히브리 표현 속에는 불을 의미하는 "אשׁ”(esh)가 각각 들어 있다.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야훼 하나님"(Yah; יה)이 함께 하지 않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면, 두 개의 불이 그 가정에 존재하게 된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가장 강력한 불"을 뜻한다. 지혜로운 작업자 혹은 마땅히 해야 할 상식을 지키는 자는 다르다. 전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두 성질을 하나되게 하기에 앞서 "중간"에 저항(load; 짐, 고난)을 끼워 넣는다. 그랬더니 안전한 전기 회로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기의 두 성질은 그저 평안함 가운데 거하는 것처럼 잔잔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해

불확실성의 시대. 그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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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그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생활이 불확실한 시대,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를  오늘날의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두려움에 떨어야만 할까? 두려우면 오금이 저려온다. 손과 발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가 실감하고 있는 내용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홀로 서 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섭게 생긴 존재가 나를 해하기 위해 달려온다. 그 순간 나는 도망가고자 하는데, 내 몸은 얼어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설령 움직인다 할지라도, 손과 발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약하게만 동작한다." 여러분. 실감나시나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자의적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두려움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억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중을 두렵게 하는 내용"을 듣거나 읽었을 경우, 삶의 소망은 오히려 사그러든다. 심지어 두려움이 더욱 커진다. 그래서 (앞선 내용처럼) 움직임이 더욱 둔해지고 둔해져서 결국엔 삶 속에서 주저 앉게 된다. 자신에게 두려움을 안겨준 그 존재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그저 그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시키는 데로 순순히 따라하는 "종"(slave) 또는 "좀비"(Zombie)같은 자가 된다. 여러분이 누구에게 자신을 바쳐 복종하면 그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면 죽음에 이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면 의롭게 될 것입니다.(롬6:16.현대인의 성경) 그는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상실된 자다.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자가 되어 버린다. 그저 "누군가가 명령하는 데로"만 살아갈 뿐이다. 여기서

내 삶의 건강을 추구하는 자, 점진적으로 변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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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건강을 추구하는 자, 점진적으로 변하는 자 "노다메 칸타빌레".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다. 그 중에서 여주인공 노다메의 방 안 풍경은 매우 인상깊었다.  <노다메 칸타빌레 중에서> 이 방이 처음부터 그랬을까?   No! 남자 주인공 치아끼의 반응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초 깨끗한 곳에서 살던 자에게 곧바로 이처럼 지저분한 방을 주면서 살라고 하면, 어느 누가 살 수 있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도망칠 것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깨끗하고 상쾌한 공간을 찾는 것은 모든 인간의 바램이요 자연스런 모습이다. 하지만 자신이 익숙하게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집안의 깨끗함"은 결정된다. 이를 성경적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집안의 청결도가 결정된다. 믿음의 분량이 모두가 다르다면 모든 가정의 청결도 또한 천차만별적으로 다양할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 그 자체다. 그런데 깨끗한 방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쓰레기를 옮겨 놓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도 본인 스스로가. 목이 말라 생수를 하나 사왔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신 후 빈 pet 병을  방 구석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놓아 두었다. 솔직히 그냥 방치하듯 버렸다.  그치만 그의 인식은 "방은 여전히 깨끗해"라는 생각한다. 매우 당연하게.  **** 몇 시간 또는 몇 일이 지나 배가 고파 컵라면을 끓여먹었다.  먹고 난 라면찌꺼기와 빈 컵은 컴퓨터 옆에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그의 인식은 "여전히 방은 깨끗해"라고 생각한다. 매우 당연하게.  **** 이런 식으로 적은 량이지만 매일 매일 아주 조금씩 주변에 쓰레기를 더하는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그는 "지저분한

[질병은 없다.] Ep-1. 질병이란 무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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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없다.] Ep-1. 질병이란 무슨 말이지? ※ 본 글은 학계에 보고되었거나 각종 전문 서적 또는 매스컴 등을 통해 발표된 의학적 사실들을 토대로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다만 이러한 자료들을 찾는게 어려운 부분에서는 일반적인 사실, 곧 상식(common sense)에 입각한 내용 위주로 작성하였으니 "참고 수준"에서 이 글을 읽어보시길 강권합니다. 현시대를 살면서 질병 없이 사는 가정을 찾아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 만큼 질병이 창궐 한 세상이다. 만성질환 1천만 시대…질병예방서비스위원회 구성 by KBS NEWS 질병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일반인들은 쉽사리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기는데, 사실은 질병에 관해 명료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이가 없다. 그 이유는 질병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를 확정하지 못한 체 여전히 철학적 논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이란 무엇인가 질병을 어떻게 보고 개념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의학의 핵심 문제이다. 질병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다루는 의학의 기본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의학 발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늘 이 문제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질병을 정의하는 문제, 혹은 질병을 개념화하는 문제는 단지 의학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의학 철학의 핵심 물음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질병은 실체적 존재인가 아니면 하나의 과정인가?" "질병은 객관적 실재의 반영인가 아니면 인위적인 구성물인가?" 물론 이러한 물음을 유명론자와 실재론자 사이의 해묵은 철학적 대립을 의학에서 다시 재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학에서 이와 같은 대립은 질병이라는 현상에 현실적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추상적인 철학 논쟁에 새로운 빛을 던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질병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과 관련해 의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두 가지 대립되는 병리 이론

내 삶의 추장 되시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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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추장 되시는 이> 부족에는 추장이 있다. 그는 그 부족의 모든 대소사를 직접 결정하는 최고 통수권자다. 그래서 그 부족은 추장의 말 한 마디에 의해서 운영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가라"고 말하면, 부족민들은 그저 가면 된다. 그가 "서라"고 말하면, 부족민들은 그저 서면 된다. 추장의 결단은 부족의 모든 흥망성쇠를 이룬다. 추장의 결정권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부족에게 늘 평안함과 부국강병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느 때는 어떠한 노력을 가해도 해결되지 않는 재앙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극심한 가뭄, 혹독한 질병, 누구도 가리지 않는 죽음 등. 추장은 갖은 방법을 도모해 보는데,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추장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 이다. 추장이 스스로 산제물이 되는 방법만이 마지막 방법이다. 그래서 추장은 스스로 죽는 자리에 내려간다. 이것이 최고 통수권자가 갖는 마지막 권위요 의무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의 명령, 누구의 훈계를 받으면서 살아가시나요? 여러분에게 명령과 훈계를 주시는 이가 누구이신지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목회자 이십니까? 은사자 이십니까? 직장 상사 이십니까? 돈 많은 이웃집 재벌 이십니까? 학식이 많은 자 이십니까? 학원 선생 이십니까? 점쟁이 이십니까? 좋습니다. 모두 다 좋습니다. 한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재앙과 같은 극심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떠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못합니다. pixabay 그때 여러분에게 명령과 훈계를 주시던 그가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시던가요? 여러분이 "재앙과 같은 문제에서 자유하게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 놓던가요? pixabay &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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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2) 5월 2일 오후 4시 경에 찍은 사진 몇 장을 나누고자 한다. 이사를 온 집 앞에 다소 큰 규모의 유치원이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이 동네의 아이들을 도맡아서 돌보아온 곳이다. 화분들을 줄잡아 놓고 그 화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본시 사진 찍는 일에 관심이 없었지만, 새로 이사를 온 이후부터는 주변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면 곧잘 사진을 찍곤 한다. 사진 속 꽃이 참으로 아름답다. 작고 가난한 동네의 골목인데도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답고 즐거움을 안겨다 주는 꽃이 내 집 앞에 활짝 피어있다니... 나는 참으로 복 받은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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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날씨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처음 구경하러 올 당시 나와 아내를 맞이하는 이 집은 음산한 느낌의 거부감을 나타냈다. 낡고 오래된 다세대 건물은 처음으로 이곳을 찾는 아내와 나의 마음에 스산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필 그날따라 햇살조차도 집의 음산함을 더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사를 온 이후 약 한달 하고 일주일이 지난 즈음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 보였다. 외관에서 비춰지는 스산한 분위기를 달래보자며 아내는 2층 베란다에 작은 화분 몇 개를 사다가 놓았다. 그래서 일까? 정말로 집이 달라 보인다. 어떤 순간에는 사람에 의해서 버려진 장소가 있다. 그러다 보면 그 장소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사모하면서 누군가가 그곳을 다시 찾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찾아오는 이가 없다면,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던 마음은 이내 심한 거부감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러면서 그 장소는 사람들에게 음산한 느낌을 내 비치면서, 스스로 사람의 발걸음을 거부해 버린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오랜 기다림 속에 지쳐서, 이내 원망으로 바뀌어 버린 그 장소를 다시금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지 않을까? 

파마 머리 아줌마 부대를 구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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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전해 들은 말이 있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아주머니들은 대체적으로 파마머리를 즐겨 하신다. 언제 마음 편하게 머리를 다듬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리라. 파마 머리를 하고 계신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본 외국인은 이 모습을 매우 특이하게 여기고 있었다. "한국의 아주머니들은 죄다 파마 머리를 하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다." 는 식이다. 웃자는 이야기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가슴이 찡하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나눠보자. 이는 인종 차별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앞선 파마 머리는 외국인이 본 우리 나라의 모습인데 반해, 이번에는 우리 나라가 바라 보는 외국인의 모습을 논하기 위함이다.  아프리카의 아주머니들을 모와 놓았다고 하자. 이 아주머니들을 바라본 우리들은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이같은 사실은 누구나가 잘 아는 이야기다. 그래서 필자는 누구나가 잘 아는 이야기를 통해 성경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제 그 여행을 떠나 보자.  마파 머리를 하신 아주머니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그분들은 모두 구분지어 분명히 볼 수 있다. "개똥이 엄마, 유복이 엄마, 순복이 엄마, 등등"으로.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의 삶이 거의 없는 외국인은 이러한 사실들을 구분해 낼 수 있는 안목(분별력)이 없다.  반대로 아프리카 아주머니들을 바라본 우리 나라 사람들 역시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안목(분별력)이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간단한 사자성어로 말하면 "유유상종 또는 동변상련"이라 할 수 있겠다.  Biblical Proof - WordPress.com 처지가 다르면,  상대를 정확하게 바라보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