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을 준비하는 자 그러나 냄비 안의 개구리로 남는 자
| 냄비 안의 개구리boiling frog에 대해 먼저 잠깐만 설명합니다.
개구리가 냄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가운데, 개구리를 냄비 안에서 죽이려는 계획자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냄비 안에서 개구리를 죽일 수 있을까?' 하고 그는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하며 머리에 번뜩이는 하나의 멋진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제로 진행합니다. 어떻게 진행해 나갈까요?
개구리가 차가운 것보다 약간 따스한 것을 좋아하나 봅니다.
그래서 냄비 안의 물 온도를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올립니다. 그러자 개구리는 몸을 무리하게 자극하지도 않으면서 따스하게 하는 그 기분이 너무 좋아 냄비에 머물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이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너무 좋아서 자신의 현실을 충분히 만족하게 됩니다.
한편 사방이 가뭄이 들어 모든 샘이 메말라 버린 상황에서 물을 찾아 다니던 두 마리의 개구리가 오랜 시간 뒤에 우물을 하나 발견합니다. 한 개구리는 "야~ 물이다. 이제 살았다"라고 말하며 주저하지 않고 그 우물에 뛰어 들려고 하는데, 다른 개구리는 이를 말립니다. "저 우물을 좀 봐봐. 지금 당장은 좋은데 이 물도 말라 버린다면 우리는 저 안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죽고 말거야"라고 말하며, 아쉽지만 다른 우물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이처럼 어떤 개구리는 따스한 냄비의 손길이 매우 매력적이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고 냄비 밖으로 뛰쳐 나갑니다.
죽음이 도사릴 수 있고 혹독한 추위가 앞을 가로막을 지라도, 그는 스스로 노력하여 사는 삶을 택합니다. 반면 떠나가는 개구리를 보면서 "너는 세상 사는 법을 몰라서 그래. 세상이 주는 혜택을 받으며 사는 게 나쁜 것이 아닌데 너는 참 별나다"라고 핀잔을 놓으며 냄비가 주는 혜택에 한껏 들떠 있는 개구리가 자랑스럽게 소리 높여 말합니다. 냄비 밖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개구리는 그 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갑니다.
냄비 안에서 그 따스함에 익숙해 질 즈음 개구리는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어떤 자극을 원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내 냄비 안의 물 온도가 상승합니다. 이처럼 물의 온도에 개구리가 익숙해질 즈음 물의 온도는 늘 상승합니다. 개구리는 한시도 빠지지 않고 자신을 즐겁게 하는 그 따스함 속에서 물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해 있다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 온도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준에 도달해 있음에도, 개구리는 그 사실 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무슨 가당치 않은 말을 하고 그렇습니까. 내가 느끼기에 아주 따스할 뿐인데, 어떻게 위험한 수준까지 물의 온도가 상승했다고 주장하세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장 내 앞에서 떠나주세요. 나는 당신을 믿기보다는 이곳을 더 신뢰하고 믿습니다."
개구리가 30도의 온도에 적응하게 되면, 그 순간 따스함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따스함을 느끼려면 물의 온도를 5도 상승시켜 35도로 유지해야 합니다. 역시 35도의 온도에 적응하게 되면, 자극을 느낄 수 있는 온도차를 만들기 위해 40도로 상승시켜야 합니다. 개구리는 타인이 제공하는 따스함의 혜택에 심취해 버림으로써 스스로 물의 온도를 구별할 수 있는 신체의 기능을 잃게 된 것입니다. 사회 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일하지 않더라도 생활비를 주는데, 어느 누가 일을 하려하겠습니까? 이치는 같습니다. 스스로 땀 흘려 일하려는 그런 의지가 사라지면서 그 몸의 근력 역시 소멸되어 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의 실제 온도를 느끼지 못하게 된 이유는 신체의 모든 장기들이 서서히 익어가면서 감지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편리함이 있는데, 내가 왜 땀을 흘려야 해?"
"내가 무슨 근육이 필요하겠어? 다 알아서 해 주는데."
"재능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 나는 놀고 먹기만 하면 되는데."
그는 아무런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어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합리화 합니다. 냄비 안에서 개구리를 죽이고자 했던 그의 계획은 이렇게 성공합니다.
| 하지만 냄비 밖으로 뛰쳐 나간 그 개구리의 경고를 그가 들었더라면, 개구리는 그리 단순하게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지난 10년 전 즈음 교회(공동체) 안에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초대교회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되돌아 가니, 교리로 인해 분열된 것은 사라지고 다시 합하여 지게 되어 결국 초교파적인 모임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인 가정 교회로의 회복을 기대하십시오."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지금의 교회(공동체)의 모습이 변화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준비가 너무나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교회 시스템, 편리가 제공되는 시스템에 안주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성경 말씀을 스스로 깨달을 필요가 있었어?"
"우리는 최고의 설교를 언제든 찾아서 들을 수 있는 세상 안에서 살고 있어. 그런데 내가 힘써서 성경 말씀을 깨달아야 해? 그럴 필요는 절대 없어."
그렇습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도 교회가 제공하는 '영성 훈련' 프로그램만 수료하면 영성은 자연스럽게 상승하는 것인데, 직장에서 신앙인으로서 애써 살 필요가 있었을까요? 내가 스스로 말씀을 깨닫기 보다는 설교자의 설교 내용을 암기하기만 하면, 내 입에서 유창한 말이 흘러나오는데 왜 괜시리 땀을 흘릴 필요가 있을까요. 설교자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서 살아가면 설교자의 영성 수준이 마치 내 영성 수준인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이 시스템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요.
| 그런데 코로나는 시대에 큰 획을 그어 버렸습니다.
세상은 교회 안에서의 모임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불법이라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불법이라고 서슴치 않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시스템이 제공하는 혜택을 영원토록 누릴 수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그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누린다 할지라도 국가가 정해주는 수준 안에 드는 사람들에게만 제공될 뿐, 그 외는 제공받지 못하게 됩니다. 국가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성경 속 말씀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매주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마음 속 불안함을 씻어 낼 수 있던 이들이 이제는 스스로 씻어내야 할 판인데 그 일이 불가능해 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불안감을 씻어내지 못하는 이들은 페닉상태에 빠지게 되면 더 이상 올바른 판단조차 불가능하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재난 영화에 자주로 등장했던 모습들이기에 이런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하던 분들은 과연 있었을까요?
설교자 중에 성도들을 향해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가 반드시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날이 오기 때문에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신 분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설교자의 설교를 듣지 않더라도, 스스로 성경을 읽고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이 되셔야 할 그 날이 오고 있습니다. 설교자 없어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 훈련(준비)하십시오"라고 목청껏 소리 높여 경고하신 분들이 계셨을까요?
설교자는 야훼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알리는 역할만 있을 뿐, 그분들이 야훼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 저를 믿으시나요? 그럼 제가 전하는 그 사실 또한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그 분이 제게 알려주신 대로 했더니,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었을 때, 대개의 성도분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래. 저 분은 야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분이시니, 나도 저분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있을거야."
"앞으로는 저 분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저 분이 하라고 하는 대로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요. 이것은 너무 잘못된 생각입니다. 설교자의 설교가 의도했던 바는 이같은 반응이 아닙니다. 설교자에게 역사하신 야훼 하나님의 본 의도는 그런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 역시 성도분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입니다. 소위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에게도 음성을 들려주시는 그런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것을 설교는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설교를 들은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함이 옳습니다.
"그래? 저 분이 그토록 초라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었단 말이지?"
"그럼 나도 힘써 노력하면 주님의 음성을 충분히 들을 수 있겠구만."
"그래. 나도 결단했어. 설교자 분처럼 내게도 말씀해 주시는 주님을 내가 스스로 찾을 거야."
설교자의 씨(seed)와 성도의 씨(seed)가 따로 구분되어 태어난 것 아닙니다. 설교자나 성도나 모두가 하나의 씨(seed)입니다. 그러니 "설교자 분들에게는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게 주님이 어디 말씀이나 해 주시겠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겸손한 모습이 아닙니다. 무능한 모습입니다.
목회자 앞에서 아첨을 하는 말이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비굴한 모습입니다. 야훼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는 동일합니다. 그분 앞에 나란히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분의 은혜가 임하면, 모두가 형제요 자매로 인정받게 될 그런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당신의 음성을 특별한 씨(seed)에게 들려주길 원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을 듣고 싶으면, "너희는 신학을 전공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영접하는 자'
만을 찾으셨을 뿐입니다. '누.구.나'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다시 바꿔 말하면,
'누.구.나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소.유.했.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실 것인가요? 비굴한 자의 모습을 마치 겸손한 자의 모습인양 생각하면서 "목사님은 대단하시니 주님의 음성을 들어서 저처럼 미천한 자에게 주님의 뜻을 들려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충성스런 노예의 모습을 보일 것인가요? 그런 무능한 모습으로 어떻게 마지막 때의 시련을 견디어 나갈 수 있으며, 그런 노예가 어떻게 세상에 속한 또다른 노예를 자유한 자로 해방시킬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해방시키지 못하는 무능력한 신세인데 말이죠.
만일 어떤 누군가가 '목회자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여러분들은 속히 그 자리를 떠나십시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마땅한 권리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 기회는 여러분의 당연한 권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들은 눈먼 자들을 인도하는 눈먼 지도자로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 다 도랑에 빠지리라, 하시매 (마15:14.흠정역)
여러분이 눈먼 자가 되면, 여러분의 자녀는 도대체 어느 누가 인도하겠습니까? 목회자께서 인도해 줄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목회자 분들 역시 내 자식도 힘든 판에, 어느 집안의 자녀를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 분들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전심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판인데, 어떤 성도의 구원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 이건 상식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가 편하게 구원받는 길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주 아주 기본적인 상식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런 상식조차 망각해 버리고 말하는 목회자라면 그분 역시 눈먼 자 가운데 한 분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군요.
여러분.
마지막 때에는 목회자도 잘 갖추어진 교회(건물)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영적 편의를 제공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도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스.스.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런 자의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준비'하는 것입니다. 준비의 다른 말은 훈련입니다.
훈련은 실패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실패는 당연히 건너가야 할 코스 중 한 부분이닌까요. 주님의 음성을 양심의 소리에서 들어보시고, 그 양심의 소리가 시키는 데로 천천히 행동해 보십시오. 그 양심의 소리가 충분히 잘 들릴 때가 되면, 그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실 것입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 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딤전 1:19.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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