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에서 엿들었다. (예슈아의) 제자는, 바로 이것이닷!!!

 서유기에서 엿들었다. (예슈아의) 제자는, 바로 이것이닷!!!



'신약 성경'에서 주로 언급되는 단어를 찾으라 한다면, '제자'라는 단어가 그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제자라는 단어를 우리들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빈번하게 접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제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의 단어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는지 질문할 수 있을까?



여기에 한 이야기가 있다. 제자라는 단어를 우리들에게 보다 쉽게 전달해 줄 수 있는 이야기다.



'서유기'라는 이야기는 종교적 차이를 떠나서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익히 잘 아는 이야기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설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서유기는

풍자와 해학을 담은 글

이라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자주로 놀러간 도서관에서 알게 되었다. 50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종교적 차이를 떠나서 나도 모르게 아이들 수준의 도서로 분류되어 있는 (아이들을 위한) 서유기를 읽어보게 되었다. 서유기의 내용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옴니버스 형식이란?

한 가지의 공통된 주제나 소재를 중심으로 독립된 짧은 이야기 여러 편을 엮어내는 이야기 형식. 스토리 내 시간의 흐름이 일부 있을지라도 각 에피소드끼리의 연속성이 없거나 서로 영향을 주지 않고, 캐릭터와 기본 배경만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여러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한 에피소드에서 '제자의 의미'를 알 수 있었기에, 그 대목을 잠시 소개하려 한다.


삼장 법사는 멀고도 험한 여행길에 올랐다. 어느덧 오행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산 전체가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공 "법사님, 어서 오세요! 무척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위틈에 끼어 있던 손오공은 겨우 고개만 내놓은 채 애원했다.

오공 "법사님을 눈이 빠지라 기다렸습니다. 어서 저를 좀 구해 주세요!"

삼장 법사는 손오공에게 지난 이야기를 듣고, 산 위에 올라가 석가여래가 돌 위에 붙여 놓은 부적을 떼어 낸 다음에 기도를 올렸다. 손오공이 몸부림을 치자 하늘과 땅이 우르르 흔들리는 소리가 나면서 바위산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어느 새 손오공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오공 "자, 이제부터 제가 스님을 모시겠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스님의 제자입니다."



오공은 바위 산에서 자신을 구원시켜 준 삼장 법사를 향해, '당신의 제자가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구원salvation이라는 단어가 스승teacher이라는 단어와 연결될 때, 그 인물을 가리켜 우리는 메시아라고 말한다.


구원 + 스승 = 메시아


우리는 메시아의 제자가 된 신앙인으로서, 제자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 제자의 삶


그렇다는 것은 제자의 삶이 어떤 삶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이에 대해 '삼장의 제자가 된 오공의 삶'을 보면 제자의 삶이 어떤 것일지 우리들 역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유기의 내용을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제자가 된 오공과 삼장 법사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삼장 법사는 무척 기뻤다. 손오공은 삼장 법사를 말 위에 태우고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길을 떠났다. 어둑어둑한 골짜기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산적들이 나타났다.

산적 "이놈들아 목숨이 아깝거든 가진 물건을 다 내놓아라!"

이를 본 순간 손오공은 귓속에서 여의봉을 꺼내에 산적들을 단숨에 해치워 버렸다. 그리고 산적들의 품 안에 있던 돈들을 챙겨 자신의 품 안에 넣고 있었다. 이를 본 삼장 법사는 손오공을 향해 심히 안타까운 듯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삼장 "오공아, 어찌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죽이느냐? 그냥 겁만 주어 쫓아 버리면 될 것을"

오공 "하지만 그러면 우리가 죽을 수 있습니다."

삼장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쁜 짓이다."




스승과 제자간의 동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첫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스승과 제자간의 견해에 차이가 생기고 있다. 산적이라는 존재를 사이에 두고 그의 생명에 대한 인식에서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그 결과 인식의 차이는 '행함의 차이'를 낳게 되니, 결국 삼장은 살생하지 않아도 될 산적을 오공은 아무렇지 않게 살생해도 되는 존재로 간주해 버렸다. 그리고서



삼장

"게다가 너는 이제 스님이 되었는데..."

삼장 "다른 이의 목숨을 쉽게 해치는 건 아주 무거운 죄를 짓는 것이란다."

성격이 급한 손오공은 화가 치밀었다. 삼장 법사를 구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되리어 야단만 맞게 되자 손오공은 획 사라져 버렸다.




아~ 이 대목에서 스승이라는 존재가 제자의 정체성을 누설하고 있다.


  • 스승이 스님인 것처럼 제자도 스님이다.
  • 아비가 Lion이듯 그 아들도 Lion여야 한다.
  •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고 말하고 있다. 이를 성경 속 표현으로 바꿔 말하자면,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문구는 단순히 Goodman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에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이시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고 본다. 이 구절의 말씀은 일반적인 의미의 성도들 모두에게 전달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에서.


위 구절의 말씀은 제자로서의 삶을 제시하는 명백한 말씀이다.


스승이 거룩하게 살았으니, 제자 역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스승이 십자가를 짊어지는 그런 삶을 살았으니, 제자 역시 십자가를 짊어지는 그런 삶을 당연히 살아야 한다. 아울러 스승이 학자scholar로서의 삶을 살았으니, 제자 역시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된다.


제자(Talmid)란 스승이 아는 것을 배우는 것은 물론 스승을 닮아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런 제자를 가리켜


talmid


라고 말한다. talmid는 영어식 표현이 아니다. '제자'를 일컫는 히브리식 표현으로서 앞서 설명되었던 것처럼, 스승이 거룩한 삶을 살았으니 제자 역시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함이 옳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제사의 종류 가운데 #흔들어_드리는_제사, 곧 #요제'와도 같은 의미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슈아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부활하신 육신을 요제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0


수확시기에 놓인 보리들에 낫을 대기 직전 가장 좋은 보릿단에 낫을 대고 첫 열매로 삼아 요제의 재물로 드린다. 첫 열매는 이렇게 늘 야훼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서, 야훼 하나님의 것이다. 제사장은 첫 열매인 곡식단을 들고 앞으로 한 번 흔드는 데 이것은 야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다. 그리고 앞으로 흔들었던 곡식단을 다시 뒤로 흔들어 보이는 데 이는 야훼께 드렸던 최상급의 재물과 동급의 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야훼 하나님께 가장 좋은 극상품의 곡식단을 먼저 드리면, 야훼께서 가장 좋은 극상품의 곡식단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러한 이치가 너무나도 단순해 보이지만, 율법이 전하고자 하는 전부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창12:3a


먼저 행하는 이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후속 단계에서 받게 될 복과 저주가 결정된다. 그래서 모든 것은 '먼저 하는 자'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미래는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예정설에 해당하리라.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먼저 행하는 단계에서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인생 전부가 이미 결정된 시나리오 안에서 펼쳐진다는 식으로 풀어 놓는 것은 예정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슈아는 먼저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까지 거룩하게 살았다. 그렇다면, 예슈아의 제자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스승과 같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는 필연성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말로만 신앙인이요 제자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의 그 주장이 납득될 만한 사실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주장은 반드시 설명이 동반되어야 한다. 신앙인으로서 제자라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고 싶다면, 제자의 삶을 살아 내야만 한다. 그렇게 살아낸 그 삶은 당신이 진정한 예슈아의 제자라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게 될 것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2:26


서유기에서 볼 수 있듯, 스승이 살생을 매우 신중하게 여기는 화두로 삼고 있다면 제자 역시 살생에 대해 신중하게 여기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예슈아께서 거룩하게 사셨듯 제자 역시 거룩하게 살아내야 한다.


예슈아께서 1만 달란트에 달하는 우리의 빚을 먼저 탕감해 주셨듯,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18:32~33


예슈아는 이러한 모든 일들이 매우 마땅한 일이라 말씀하신다. 그렇다. 우리는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할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위 속담은 사실 율법을 세상 사람들에게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간편하게 바꾼 메시지라 할 것이다. 이것처럼 살면 된다는 이치는 세상의 모든 만인이 알고 있듯, 율법은 이미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 그가 종교적 활동을 하던 하지 않던 상관없이. 그래서 우리는 서로간에 어색해 질 수 있는 분위기로 복음을 전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대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그 이치에 따라,


내가 사랑받고 싶은 만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삶


을 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내가 사랑받고 싶은 만큼'만 하면 된다. 내가 사랑받고 싶은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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