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믿는 자들을 향하여 던지는 메시지


jtbc에서 방영된 스카이 캐슬은

상위 1%, 내지는 상위 0.1%에 해당하는 그룹만이 통과할 수 있는 '인생의 관문'을 묘사하였다. 그 인생의 관문은 매우 좁디 좁은 문인데, 그 관문을 통과했던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위 3대째 서울대 의대 출신 가정이 되고자 갖가지 묘책들을 찾아주는 갈등의 구조들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부모세대는 특히 엄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미 자신들이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특권층의 혜택을 최대한 이용하여) '경쟁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비법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안겨주고 싶어한다. 이같은 잘못된 갈망은 '감정조차 알 수 없는 입시전문 코디네이터'를 만나는 자리까지 인도하게 된다.

대개는 학부모가 코디네이터를 선택하는게 일반적이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코디네이터가 학부모와 학생을 선택한다. 즉 '택함을 받는다'(choose; bara, ברא)는 측면에서 '성경적 입장'을 정확하게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스카이 캐슬은 '서울연고대'를 의미하는 SKY라는 의미 보다는 'Sky castle'로서 '천성'(天城; 천국)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말로 회자되고 있다.



코디네이터의 선택은

학부모와 사이에서 맺는'상호 합의'(계약)에 의해 효력을 갖는다. 효력이 발휘되면 그 순간부터 코디네이터는 학생을 전담하여 가르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코디네이터의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코디네이터는 명상실을 준비하였고 그곳으로 의기 양양한 학생을 불러온다. 그리고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의도는 학생의 내면에 숨어있는 분노를 일깨우는데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무서운 부분은 '부모의 지나친 관심에 대한 자녀의 분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녀인 자신을 그토록 힘들게 하는 부모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다는 그런 달콤한 속삭임을 듣는다.

"부모가 가장 행복해할 순간에 산산조각 내버린 거야."
"그게 진짜 복수니까"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로

십계명을 지키려하는 이들에게 좋은 권면을 준다. 하지만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부모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부모에게 가장 큰 불효를 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 원리(principle)을 알게 된 자녀는 그 기회를 얻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상위 0.1%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대학에 합격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학부모의 입장은

'너의 마음을 적극 활용해서 학습효과를 극대화 하려 할 뿐이다'
라고 스스로 변론한다.



나는 어린 두 자녀를 둔 아빠다.

그러면서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인이다. 당연히 내가 부르는, 예슈아를 부를 수 있는 그 특권층만의 혜택을 나의 자녀들에게도 가지게 하고 싶다.
그래서 신앙의 특권층이 있는 그 영역 안으로 내 자녀들도 합류하기를 바라며 이를 위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연구소에서 나름 연구성과가 우수했던, 그래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지난 날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불치병에 걸려 이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마치 나락으로 떨어진 것과 같은 이런 삶을 대하면서도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지난날 나는 이런 고백을 스스로 한 적이 있었다.

"한 2년 정도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내 아이와 함께 지내고 싶다"
라고. 연구하는 일을 그토록 즐겼으면서도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을 더욱 좋아했던 나의 진솔한 마음이었다. 내 몸에 불치병이 찾아오는 것으로 그 마음을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 깨닫게 된 나는 불치병에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내용처럼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역이용해서 '0.1%만이 합격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찾아다니는 신앙인이 되었다는 점이 가려졌던 내 눈을 자극한다. 

'아무개 목사님에게 안수기도 받으면, 지혜가 생겨서 성적이 올라간다더라.'
'다니엘처럼 하루 3번 기도하고 성경읽기를 하면, 뛰어난 학생이 된다더라.'
'부모가 새벽기도회를 3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면, 학생이 SKY대학에 붙는다더라.'
등등의 행위를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다. 

'내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 부탁드려요.'
'내 자녀가 좋은 기업에 취직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 부탁드려요.'
'내 남편이 승진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 부탁드려요.'
'내 자녀가, 내 남편이 당선될 수 있도록 중보기도 부탁드려요.'

대통령만이, 국회의원만이, 대기업의 회장 내지는 사장님만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부모 세대들.

이게 과연 스카이 캐슬에 사는 자의 참된 모습일까?


예슈아는 오히려 자신이 누리던 그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이 땅에 죄(수의 의복과 같은 죄)인의 몸을 입고 오셨다. 모두가 불평하는 상황 속에서 오로지 예슈아만이 작은 소망을 붙잡으시고 인내하셨다. 절제하셨다. 그리고 때가 이르자 만물위에 가장 높은 자로 서셨다. 이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비법(principle)'을 알려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상위 0.1%에 속하는 그 그룹 안으로 들어가고자 애쓴다. 

'매년 성경 통독을 열심히 하면, 너는 천국(Sky castle)에 들어갈 수 있어'
'성경 암송을 잘하면, 너는 천국(Sky castle)에 들어갈 수 있어'
'목사님 설교를 잘 받아 적으면, 너는 천국(Sky castle)에 들어갈 수 있어'
'무엇 무엇을 하면, 너는 천국(Sky castle)에 들어갈 수 있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 조건'을 이야기할 때, '전제로 붙이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너는 부족해.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
'그 부족한 것을 엄마가 그리고 아빠가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너는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돼.'
라고 말한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들을 찾아 나선다. 각종 간증들을 섭렵하고 이에 질세라 은사자 목사님들을 찾아다닌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가 갖춰지면 그때부터는 천국입시경쟁에 돌입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성경 3장씩 읽어야 해.'
'아침 먹기 전에 맑은 정신으로 무조건 성경 3구절씩 암송해야 해.'
'잠들기 전에 무조건 가족 예배를 들여야 해.'
'침대에 눕기 전에 5분간 스스로 기도해야 해.'
등등의 천국에 입성(합격)하기 위한 입시경쟁은 시작된다.

우리는 잘 안다. 입시생 중에서 어떤 학생이 즐거워하는지를.



| 인격적인 관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마치 목줄이 매어진 강아지처럼 졸졸졸 따라다녀야만 한다. 그에겐 어떠한 자유도 없다. 그런데 그 삶에서 기뻐할 수 있을까? 어린 그 마음 속에 소망을 품을 수 있을까?

창조주 야훼 하나님을 두고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맞다. 진리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있는 분들은 '그분의 인격적인 면모'를 경험하게 된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어느 누구의 도움조차 필요치 않는 완전하신 분이시지만, 그런 분이 감히 나같은 이에게 "너의 생각은 어떻니?"하고 물어오신다. 우리는 그런 주님을 경험한다.

어떤 일을 하려는 상황에서, 그분은 절대로 내게 강요하지 않으신다. 강제로 끌고 가지도 않으신다. 내가 승낙할 때까지, 자신의 마음을 절제하시고 인내하신다. 그리고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나의 그 결정에 대해 '한 없는 기쁨'을 감추지 않으신다.

이 사실을 체험한 이들은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는 못 배긴다. 저토록 전능하신 이가 바람에 날리는 먼지보다 하찮은 나에게 생각을 물어 오셨고, 그 하찮은 논리도 빈약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에 심히 크게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like 창12:3)
처럼, 주님이 나를 먼저 칭찬(praise; 경배)해 주셨는데 이제는 내가 주님을 칭찬(praise; 송축, blessing)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그거 참 잘하신 일이예요.'
'그렇게 역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감사해요'
라고 말하는 것이 그분을 송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이같은 삶을 살기만 하면 되는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6~18a.개역개정)

우리는 이렇게만 살면 된다. 상위 0.1%의 그룹에 들어가야 하는 의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니라
(살전5:18b.개역개정)
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안다고 하지만 늘 부분적으로만 아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과 계획에 따라 행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온전한 자가 될 수 없다. 행한 것으로 사랑을 확인하려 들지 말자. 오히려 사랑을 믿는고로 행해보자.



그런 이유에서 담대함을 가져보자.


까짓거 우리를 자녀로 삼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일단 사랑하는 마음이 최소한 주님에게는 있지 않겠는가? 그 사랑이 나를 긍휼하게 보실 것을 믿어보자. 그 믿음 안에서
나 또한 주님을 사랑하기에
나의 사랑을 표현하고자 몸부림 쳐보자.

  • 작문 능력도 없지만, 주님께 늘 기도로서 연애편지도 써보자.
  • 이해력도 떨어지지만 주님에 대해 기록한 내용을 읽어보자.
  • 청력도 나쁘지만 주님의 실제 음성도 들어보기 위해 애써보자.


주님이 기뻐하시는 어린 자녀의 모습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누구나 그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이 행복은 인본주의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내가 먼저 배려하고,
  • 내가 먼저 섬기고,
  • 내가 먼저 용서하는,
  • 내가 먼저 칭찬하는

그런 삶 속에서만 피어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꼽으라 하면, 대부분 방글라데시를 꼽을 것이다. 반면 세계에서 국민들 스스로가 가장 행복해 하는 나라를 꼽으라 하면, 이 역시 대부분 방글라데시를 꼽는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지도 않는다.



캄보디아나 인도네시아로 단기선교를 떠난 적이 있었다.

필자는 내가 가진 행복을 나눠줘야 겠다는 일념으로 그곳으로 떠났지만, 실제 상황은 너무 달랐다. 취악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의 모습은 불평하고 분노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그 가운데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저들의 행복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 왔구나."
"저들의 복된 심령, 곧 주 안에서 심령이 가난한 저들의 모습을 배우기 위해 내가 왔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후진국에 사는 이들이지만, 주님의 관점에서는 신앙의 선진국이었다.

내가 가진 게 없어서, 아는 게 부족해서 천국에 못들어가는건 아니다.
단 하나의 사실이라도,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면,
단 한 줄의 성경만이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로 실천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히브리서 4장(흠정역)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분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의 어떤 사람이 거기에 이르지 못할까 염려하노라.
2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선포된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섞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

아무리 많은 말씀내지는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내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유익)이 있겠는가? 실천하지 않은 자는 듣지 않는 자와 차이가 없다.

마태복음 25장(개역개정)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달란트 비유는 '받았지만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 자'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아무리 많은 '안식에 들어갈 약속'(히4:1)을 받았더라도, (오로지 요행만 바란 채)실제 삶에서 자신은 전혀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천국으로의 입시는 오직 "주님과 나"만의 'Man to man'의 관계일 뿐이다. 누가 대신 해 주거나 요행으로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피흘리기까지 애쓰는 상위 0.1%의 성도에게만 허락된 곳이기 때문이다.



자녀에게 강요하지 말고, 부모가 스스로 먼저 실천하자.

그러면 자녀는 그 부모의 모습을 보고서, 그대로 따라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개역개정)

위 말씀을 믿는가?
그렇다면 부모된 우리 자신부터 바뀌면, 우리의 자녀는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다.
Photo by Kouji Tsuru on Unsplash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윗물이 더러운데

어찌 아랫물을 향해
더럽다고 탓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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