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삶. 일석이조의 원리를 실천하는 삶
창세기 1장 1절(흠정역; KJV)을 보면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 하늘과 그 땅을 창조하시니라.
로 기록되어 있다. 이 한 줄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늘상 해 보는 그런 보편적인 질문을 떠나서 좀더 색다른 의문을 가질 순 없을까?
지구는 어떤 형상으로서 물질계(Material, Physics)다. 그래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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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하늘은 어떤 것일까? 하늘은 비물질계(Nonmaterial, non-Physics)다. 그래서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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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계와 비물질계를 분별할 수 있는 우리 감각기관의 대표적인 예로 구분할 때 이렇다.
학생이 찰흙으로 원숭이형상의 조각을 만들고서 책상 위에 놓고서
"나는 원숭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안의 공간도 만들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이건 올바른 정신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정상적인 표현이라면
"나는 원숭이를 만들었습니다."
라고만 해야 한다. 이게 정상이다.
이같은 생각으로 창세기 1장 1절을 이해하려 한다면, 성경의 첫 구절은 분명히 잘못된 표현이다. 그러나 창1:1을 잘못된 표현이라고 말하는 이는 이방인에서도, 유대인들 가운데에서도 없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듯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의 이해 또는 창1:1을 이해하는 우리의 인식에서 오해가 있는건 아닐까?
오늘의 나눔은 이렇게 시작해 보기로 하자.
우리 앞에 백지 도화지가 한 장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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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도화지를 보고 우리는 어떤 의미 또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의미 또는 가치를 부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누구의 흔적도 없고 그저 하얀 빈 공간만으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 백지 도화지는 '작품'으로서 의미 또는 가치를 받을 수 없다.
작가의 수고가 스며들지 않았고,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이처럼 매우 단순하게 '작가의 수고 또는 작가의 피와 땀'이 섞여 있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헌데 눈 앞에 또 다른 도화지가 한 장 나타난다.
매우 간단하지만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이 도화지도 백지 도화지처럼 어떤 의미 또는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고 말할까?
그렇지 않다.
분명히 허다한 '백지 부분'(여백)이 있지만, 그 안에는 작가의 생각과 표현이 '함께 어우러져'(harmony, balance)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가의 값진 생각이 담긴 중요한 서류로서 도화지는 인정받는다.
여기에서 여백은 더이상 의미없는 빈공간이 아니다. 작가의 의중을 더욱 분명하게 그리고 집중 시켜주는 역할자로서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었다. '여백의 미'로 간결하게 미화되기까지 의미와 가치를 얻는다.
이로써 작가는
(자신의 생각이 담긴)그 그림과 그 여백
을 창조하였다
는 평가를 모든 사람들로부터 받게 된다.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창조하심도 이러하지 않으셨을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하늘'(A heaven)은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허공'(empty)일 뿐이었으리라.
- 그때에 솔로몬이 이르되, 주께서 친히 짙은 어둠 속에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사오나(왕상8:12.흠정역)
의미가 없던 허공에 (창조주의 마음이 향하는) 어떤 것이 창조되자, 그 순간 의미없던 허공에 의미있는 허공으로 바뀌게 된다. 이리하여 창조주께서는 의미있는 허공인 '그 하늘'과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그 땅'을 동시에 창조한 것이 된다. '그 땅'을 창조함과 동시에 '그 하늘'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하늘과 땅에 대한 창조'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하늘'은 반드시 '그 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강한 마음으로 연결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다.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a.흠정역)
그래서 이같은 사실은 또 다른 이야기를 통해 묘사되었으니, 그것은 아담과 그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다. 태초에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았고) 스스로 존재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였다. 그렇게 혼자 있는 것은 그 남자에겐 무척 자유했을까?
-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a.흠정역)
그 남자에겐 어느 것 하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동기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둘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남자가 마치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이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창2:23a.흠정역)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love; אהבה)을 두길 원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키우길 원했다.
-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하였으니 이는 이브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더라(창3:20.흠정역)
남편으로부터 받은 자녀(씨)를 잉태하고 자라게 할 수 있는 그 터전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그 터전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어머니'라 불리게 되었다.
- 옛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흔한 말로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다'는 표현과 '천하대장군 & 지하여장군' 또는 '가이아'(Gaia란 고대 그리스인들이 대지의 여신을 부른 이름으로서, 지구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등으로 표현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고대 사상에서는 이같은 조화(harmony, balance)를 '태극'(太極; 중국 고대 철학에서,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실체)이라는 형상으로 표현했지 않았나 싶다.
성경의 말씀들은 모두 예언이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들은 예언 그 자체로만 존재해선 아무런 의미가 없고 반드시 '성취'(fulfillment)되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신18:22.개역개정)
이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한 그림자가 땅 위에 있다. 그렇다면 반드시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서 어떤 실체(the real)가 존재해야만 한다. 이건 상식이자 만물의 이치다.
그런데 실체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그 그림자가 거짓이란 뜻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범행을 눈치채고서 그를 범죄자로 지목하려 한다. 이때 재판장은 '합당한 증거물'을 제시하라고 명령하는데, 그 증거물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를 뜻한다.
모든 성경 말씀은 이처럼 우리가 능히 볼 수 있는 주변의 사실들 또는 '만물의 이치'(物理; Physics)를 통해 알 수 있게끔 숨겨 놓으셨다.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개역개정)
그래서 눈에 보이는 만물의 이치를 '비유'(그림자)삼아 눈에 보이지 않는 야훼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갈 수 있다. 예슈아께서는 우리 주변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셨으니, 이러한 접근방법이 옳다는 것은 예슈아는 친히 증명하셨다.
창1:1의 말씀은 그런 측면에서 매우 실질적이며, 이미 옛 고대인들 조차도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인정하고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 한 가지의 일'(only one thing)을 행했을 뿐인데, 동시에 두 가지의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것인가?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개역개정)
이 말씀은 바로 창1:1절의 '일석이조'를 그대로 담아낸 구절이다.
나는 배고픈 타인(他人)에게 빵을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효과는?
한 가지는 타인의 배고픔이 채워졌다는 그 사실과 이후 야훼 하나님께서 배고픈 내게 빵을 주시는 두 번째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일석이조의 기쁜 일이 일어났다.
나는 평생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두 계명만을 지켰다. 나머지 8 개의 계명은 안중에 두지도 않고 오직 2 개의 계명만을 지켜 행하고자 집중했다.
마지막 심판대에 섰다.
재판장께서 물으셨다.
"8 개의 계명은 행하지 말고, 2 개의 계명을 행하라고 했는데"
"너는 어떻게 하였느냐?"
"저는 단지 (행하라는) 2 개의 계명만을 지켜 행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은 이렇게 답한다.
"너는 행하라는 것과 행하지 말라는 두 종류를 모두 지켜 행했구나"
"네가 정령 십계명 10가지를 모두 지켜 행했구나"
바로 일석이조다.
성경은 생활 속에서 일석이조의 원리를 실천하길 원하신다.
그리고 이를 알리는 첫 가르침은 역시 창1:1절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땅을 창조하심으로 인하여 동시에 (의미있는) 그 하늘을 창조하신 것처럼.
나만 배 부르고, 나만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렇지 말자.
내 배만 부르고, 나만 행복하라는 측면에서 예슈아의 거룩한 피가 나의 죄를 사해 주신 것 아니다. 일석이조 곧 자신이 받는 것보다 배를 거두는 자에게만 예슈아는 착하고 충성되다고 말씀하신다.
마25:21~22.개역개정
-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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