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성(representative)에 대한 오해가 심각한 시대
동일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단체)을 이루려 할 때, 구성원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를 찾는다. 우리는 그를 대표성이라 말하고, 그 대표성에는 선거를 통해 선출될 수 있는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기관장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은 대표성을 가진 이들에 대해 심각하리 만큼의 오해를 지니고 있는듯 보인다. 그것은 "대표성을 가진 자"를 마치 (신격화 한) "하나님"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이나 시민의 의견을 묵살한 채, 그저 자신의 의견(이 국민의 의견이라는 생각에서 그 내용)을 실행에 옮기려고만 한다면 이것은 오해 중에서도 가장 큰 오해다.
하지만 이러한 중재는 아무에게나 부탁할 수 있는게 아니다.
자신의 실질적인 이익과 손해가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인물을 세운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등은 국정을 논하여 운영하기 위해 세움받은 이들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party)적을 유지하는 마인드로 국정에 참여하기 보다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마인드로 국정에 참여해야 함이 옳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쉽지는 않겠지만, 당파를 떠나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왔던 왕들에 대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의 정치는 선정(善正)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중보자 또는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서, 분열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사역을 행하는데 있어서 성도에게는 "일방적인 순종"(복종)이라는 미명하에 제시된 의견에 대해서 수용을 강요받는다. 여기에 질문을 하거나 토를 다는 것은 성역을 건드는 것처럼 매우 불온한 행동으로 치부된다.
그 일을 행해야 하는 우리 각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큰 틀은 유지할 지라도 사역의 세부 내역에 있어서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충분히 조율(조정, 균형)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동참하는 성도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게끔 배려해 주신다.
그런데 중재를 맡은 목회자 분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모습이 보이는 분들도 충분히 계시지만, 막상 찾으려 하면 찾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이는 자신에게 임한 대표성을 마치 신격화 된 자(God)로 여기는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은 중재자 일 뿐, 신 중의 신(God of Gods) 야훼 하나님처럼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된 의견을 성도들에게 전달만 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가 수용하든 수용하지 않든, 강요를 해서도 안 된다.
인내하고 절제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이 야훼 하나님의 뜻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기까지, 자신은 모든 기름부음(은사)을 사용하여 충분히 설명(설교)하고,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기에 (찬양으로) 힘써야 하리라. 은사란 이를 위해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대표성을 오해하지 말자.
자녀는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것이라 했으면서도, 마치 내 것인양 내 뜻대로 양육하려 한다. 올바른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올바르지 못한 (양육의) 양식을 먹고 자란 자녀는 결국 올바르지 못하게 자란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대표성은 중재자의 역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되어선 아니 되리라고.
고로 자신의 뜻이 담긴 목소리는 앞으로 삼가고, 서로 상반된 의견을 지닌 양측의 견해만을 전달할 수 있길 바란다.
중보자의 역할은 이처럼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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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은 대표성을 가진 이들에 대해 심각하리 만큼의 오해를 지니고 있는듯 보인다. 그것은 "대표성을 가진 자"를 마치 (신격화 한) "하나님"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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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함의 최종 결정권자라는 부분에서
국민 또는 시민의 뜻을 "먼저 헤아린" 후, 그 헤아린 정도에 따라 의견을 결정해야 하리라. 이는 각자의 다양한 의견들 중 하나를 선택하기 보다는 각자의 의지를 조금씩 반영함으로써 "하나의 통일(조화)된 의견"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행위로 도출해 나가는 것이 대표성을 가진 자의 책무(의무)라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그런데 국민이나 시민의 의견을 묵살한 채, 그저 자신의 의견(이 국민의 의견이라는 생각에서 그 내용)을 실행에 옮기려고만 한다면 이것은 오해 중에서도 가장 큰 오해다.
대표성을 가진 자는 어찌보면 중매장이라 할 수 있다.
양가의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이를 중재할 수 있는 이가 필요하다.하지만 이러한 중재는 아무에게나 부탁할 수 있는게 아니다.
자신의 실질적인 이익과 손해가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인물을 세운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등은 국정을 논하여 운영하기 위해 세움받은 이들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party)적을 유지하는 마인드로 국정에 참여하기 보다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마인드로 국정에 참여해야 함이 옳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쉽지는 않겠지만, 당파를 떠나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왔던 왕들에 대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의 정치는 선정(善正)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을 성경에서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기 위해 선택된 자들이기 때문이다.이들은 중보자 또는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서, 분열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나아간 이들 가운데에서도 큰 오해가 발견되곤 한다.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두 집단의 중간에서 중재를 맡기로 한 자가, 양측의 의견을 수렴하여 공정하고 양측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게을리 하곤 한다. 마치 자신의 생각과 추론에서 나온 의견을 양측에서 수용하라는 일방적인 자세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쉽게 볼 수 있다.교회(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역을 진행하려 한다.
그 사역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진행하길 원하는 사역인지, 혹은 목회자 자신의 야심에서 비롯된 사역인지 성도들은 알 수 없다.그런데 사역을 행하는데 있어서 성도에게는 "일방적인 순종"(복종)이라는 미명하에 제시된 의견에 대해서 수용을 강요받는다. 여기에 질문을 하거나 토를 다는 것은 성역을 건드는 것처럼 매우 불온한 행동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앞서 설명하였듯이, 주님의 사역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 일을 행해야 하는 우리 각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큰 틀은 유지할 지라도 사역의 세부 내역에 있어서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충분히 조율(조정, 균형)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동참하는 성도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게끔 배려해 주신다.그런데 중재를 맡은 목회자 분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모습이 보이는 분들도 충분히 계시지만, 막상 찾으려 하면 찾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이는 자신에게 임한 대표성을 마치 신격화 된 자(God)로 여기는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은 중재자 일 뿐, 신 중의 신(God of Gods) 야훼 하나님처럼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된 의견을 성도들에게 전달만 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가 수용하든 수용하지 않든, 강요를 해서도 안 된다.
인내하고 절제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이 야훼 하나님의 뜻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기까지, 자신은 모든 기름부음(은사)을 사용하여 충분히 설명(설교)하고,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기에 (찬양으로) 힘써야 하리라. 은사란 이를 위해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대표성을 오해하지 말자.
비단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라.
자녀는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것이라 했으면서도, 마치 내 것인양 내 뜻대로 양육하려 한다. 올바른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올바르지 못한 (양육의) 양식을 먹고 자란 자녀는 결국 올바르지 못하게 자란다.우리 모두가,국정을 논하는 이들이나 목회에 전념하시는 이들, 그리고 가정을 이루신 모든 분들에게 함께 나누길 원한다.
그리고 우리들 각자는 그 오해의 늪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자신에게 주어진 그 대표성은 중재자의 역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되어선 아니 되리라고.
고로 자신의 뜻이 담긴 목소리는 앞으로 삼가고, 서로 상반된 의견을 지닌 양측의 견해만을 전달할 수 있길 바란다.
중보자의 역할은 이처럼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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