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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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8. 개역개정)
주님의 입장에서는 "하루가 천년처럼, 천년이 하루 처럼" 여겨진다는 뉘앙스로 이해할 수 있다.
one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like one day.
(2 Peter 3:8b.NASB)
이 부분에서 오늘은 액면 그대로의 느낌을 논하고자 한다. 과연 어떤 상황이 되어야 "하루가 천년과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한 번에 하나의 측면만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두 측면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전지전능하심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입장에서, 그래야만 실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참된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본다.
하루가 천년처럼, 천년이 하루처럼 느껴지는 경우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극도로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강제적으로 책상에 앉혔다. 그리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듯 말했다. 2시간 공부를 해야 한다고도 말해 주었다. 이때 아이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에게 있어서 2시간은 2일간 책상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의 크기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단 2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계를 쳐다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야. 겨우 2분 지났어?"
반면 틈만 나면 책을 펼쳐들고 책상에 앉아 독서하기를 즐기는 아이를 상상해 보자.
그에게 책 한권을 주면서, 2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서 독서하라고 말했다. 아이는 흔쾌히 그 말에 순종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가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책의 내용에만 집중했다. 그랬더니 시간이 언제 흘러갔는지 알지도 못한 사이, 벌써 2시간이 넘어 4시간을 채워가고 있는게 아닌가. 이 아이에게는 시간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로지 책이 주는 즐거움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선 아이는 시간의 흐름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에겐 책(이 주는 즐거움)에 관심이 없었다.
오늘 나누고자 하는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노아의 시대를 생각해 보자.
당시에는 대부분이 900세 이상의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천년을 살던 시기" 곧 "천년 왕국"이라고 과히 표현할 수도 있었던 시기다. 그토록 기나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삶의 내용"이 없다면, 그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지낼 수 있었을까? 무엇 하나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없다면, 대략 천년을 살아가는 이들은 무엇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을까?
노아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 주어졌다.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고, 배가 무엇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 만들어야 한다. 노아는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 일에 집중하여 성실하게 임했다. 그랬더니 하루 하루가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지나간다. 삶에 의미가 생겼다. 소망을 둘 만한 일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서,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콧노래를 부르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노아를 쳐다보던 이웃 사람들은 달랐다.
특별한 일거리가 없다. 주변에는 온통 먹을 것으로 넘쳐났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의식주"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일을 해야하는 부담이 전혀 없었다. 대략 천년 동안 백수로서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천년 동안 백수 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삶의 무게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료한 삶에 자극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자극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아처럼은 아니라 여겼다. "힘들게 땀흘려 가는 그 모습"에서 무슨 선한 것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여겼다. 그들은 "힘들이지 않고, 땀도 흘리지 않는 생활" 속에서 삶의 자극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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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이전 사람들은
노아가 배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다가
(마24:38)
자신이 가진 밑천은 몸둥아리 하나 뿐이다. 그래서 이것만으로 삶의 자극을 만들어 내고 싶다. 힘도 들이지 않고 땀도 흘리지 않는 방법 안에서. 그들의 고민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거란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향략적인 삶"을 누리는게 삶의 최고 자극제라 여기게 되었다.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남녀간에 뒤엉켜 성적 유희를 누렸다. 그리고 아침이 되니, 지친 몸을 누울 수 있는 곳을 찾아 그저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잠을 잔 후, 눈을 뜨면 또다시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간다. 그러면 또 다시 모여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았다. 남녀간 성적 유희를 또 다시 누렸다. 이러한 자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중에, 더욱 자극적인 것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먹고 마시는 것은 더욱 강한 것을 찾게 되니, 더 강하게 취할 수 있는 술을 찾게 되었다. 남녀간의 성적 유희에 더욱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니, 이들의 생각은 점점 기존의 보편적인 생각 곧 자연의 섭리가 정해놓은 경계를 넘어서는 일에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로마서 1장(현대인 성경)
26.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끄러운 정욕대로 살게 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여자들까지도 정상적인 성생활을 버리고 변태적인 짓을 즐기며
27.남자들도 그와 같이 여자들과의 정상적인 성생활을 버리고 자기들끼리 서로 정욕을 불태우면서 부끄러운 짓을 하여 그 잘못에 대한 마땅한 댓가를 받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천년을 살아가는 삶의 몫"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더 솔직하게는 "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이와 다르게 노아가 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지혜로운 이의 그 지혜를 따라 살았던 노아에게는 "천년이 하루와 같다"는 느낌으로 살았지 않았을까? 매일같이 "크기와 길이와 너비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간다는 그 삶의 소망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에게, 하루가 갖는 삶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태어나면서 받은) '자신의 재능을 누군가를 위해 활용하는 삶'은 그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오던 사람과 어떤 큰 차이를 보일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우리가 먼저 (내가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베풀어 보라. 그리하면 남이 먼저 채워지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게도 채워진다. 그 이유는 말씀이 이미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받고자 한다고 해서 나만 먼저 채우면, 그에게 이루어질 말씀은 없다. 고로 그에게는 풍성한 결과가 없다.
연산 가능한 수(number)의 삶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가 있는가? 그럼 타인에게 먼저 채워주라. 그리하면 내가 받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결과를 얻게 된다. 셈하였더니 더 커진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왕상 17장(개역개정)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다. 엘리야가 사르밧 여인에게 말한다.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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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가?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없어져야 할 가루와 기름이 또 생겨났다. 자신이 가진 하나를 다른 이에게 먼저 주었다. 그랬더니 "소멸"된게 아니라, "또 생겨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르밧 과부와 그의 아들에겐 "야훼께서 계획하신 가뭄의 기간"을 능히 지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에겐 "능히 지날 수 있는 기간"으로서 "천년이 하루같은 마음"이었지 않을까?
하지만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위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만 떡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그 떡을 마지막으로 "변화없는 시간"만이 지속되었으리라. 고로 그들에게는 가뭄이 지속되고 배고픔에 죽음이 다가오자, "하루를 천년같은 마음"으로 힘든 삶을 살아야 했으리라.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분별이 나타난다.
성경을 아는 지식은 결국 이 두 가지로 나뉜다는 뜻이다.
먼저 타인을 위하고, 그 후에 자신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성경의 말씀대로 행한다면 그의 삶은 연산이 가능한 수의 삶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각종 연산들은 허다한 변화들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리라. 그런 그는 "천년을 하루와 같이"사는 그런 기대와 소망 안에서 살아가는 자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을 위하는 이는 어떠한 연산도 일어나지 않는, 그래서 연산을 하겠다는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 혹은 가치도 부여받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즉 그의 삶은 연산이 가능한 수(number)가 아닌, 그저 단어(word; 숫자)에 불과한 삶이고 말 것이다. 단어에게 적용된 연산은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못하는 것처럼, 그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늘 끌려다니는 수동적인 삶이 될 지니, 그는 하루를 천년과 같이 여기는 매우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자로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저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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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저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우리를 통해 세상엔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생명으로의 변화가. 그런 우리, 그런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그런 여러분이, 그리고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삶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그 의미는 "연산이 가능한 수(number)의 모습"이며, 그것이 생명력을 가진 자의 참된 모습이지 않을까 하고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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