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numbers)와 숫자(word)의 차이를 아시나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와 숫자"라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고 있다. 더 쉽게 영어로 표현해 보면 number(수)와 word(숫자)다. 표현을 바꾸었더니 무언가 차이가 보이는 것 같지 않나?

Number & Word


우선 word(숫자)를 설명해 보자.

글을 쓰는 모든 것은 문자(word)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문장을 이룰 때 그 의미가 만들어지고, 문장이 많아질 수록 정확도는 높아진다. 하지만 이러한 문자는 단지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것으로 표현하는게 전부다. 그래서 표현되는 그 자체 외에는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다.

반면 number(수)는 순차적으로 배열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연산(operation; +, =, ×, ÷)이 가능한 것으로서, 연산에 의해 그 의미는 변화무쌍하게 다양해진다.

점(dot) 하나가 있다. 하나의 점(dot)에 무수히 많은 점들(dots)을 더하는 연산을 가하면, 이들은 서로 합력하여 "선분"(직선)이라는 변화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곧 무차원의 공간이 변화되어 새로운 차원, 곧 1차원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1차원의 선분이 또 (일정한 양 만큼)더하여지면, 평면으로 발전하면서 (가로와 세로가 같아지는) 특정한 순간에 2차원을 만들게 된다. 2차원 평면이 또 (일정한 양 만큼) 더하여지면, 입체로 발전하게 되는데 (가로, 세로의 길이와 높이가 같아지는) 특정한 순간에 3차원을 만들게 된다.
차원이 달라진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영적 변화를 일컫는다.

※ 칼 세이건의 "와 닿는 차원의 이야기"(4분여 분량)를 보시길 강권한다. 영적으로 더 높은 차원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문자(word; 숫자)는 차원의 문을 열 수 없다.

하지만 수(number)는 연산이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차원을 열 수 있다. 곧 연산의 가능성은 차원을 여는 열쇠(key)가 된다. 이렇듯 "연산이 가능하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너무나 큰 영적 비밀을 갖게 된다.


연산이 불가능한 숫자(문자; word)

pixabay (below all)


숫자는 그저 문자(word) 그 자체다. 그래서 연산을 한다는 자체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핸드폰 번호를 생각해 보자.
두 개의 핸드폰 번호가 있다. 우리는 그 번호에 "더하기"라는 연산을 적용해 보자.

(010 234 5678)  +  (010 432 8765)  =  ???

이때 얻을 수 있는 결과값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결과값은 이 세상의 무엇과 대응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 결과값 "???"은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대응되지 않는다. 고로 아무런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다. 물리학에서는 자연의 섭리 또는 물리적 현상과 대응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물리적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는 "진리를 찾기 위해 탐구하는 이들에게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같다. 고로 물리적인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그 결과값에는 어떠한 진리도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그래서 존재의 가치조차 없는 nothing 그 자체다.

성도간 합력을 한다고 한다. 합력의 결과가 야훼 하나님의 뜻에 부합(대응)되면 그 합력(더하기; 연산)의 결과는 영적 가치에 해당하는 의미가 부여된다. 허나 야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못한다면, 그들의 합력이 낳은 결과는 결국 헛된 것(nothing, valueless)이 된다.


연산이 가능한 수(number)



수(number)는 다르다.

연산을 통해 차원의 문을 열어서 "새로운 차원의 증가"를 이룰 수 있다. 



  • 무차원이 1차원으로 변화되어, 무차원에 거하던 이들을 1차원의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 놓게 한다.
  • 1차원이 2차원으로 변화되어, 1차원에 거하던 이들을 2차원의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 놓게 한다.
  • 2차원이 3차원으로 변화되어, 2차원에 거하던 이들을 3차원의 새로운 공간으로 옮겨 놓게 한다.


이처럼 연산이 가능하다는 그 자체는 실로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게 하고, 매우 커다란 영적 변화를 이끌어 낸다.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점(dot).

세상에 점(dot)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을 "무엇"이라 칭하여 말할 수 없다.

점(dot)은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철학적, 물리학적 개념을 동반할 때 이해가 쉬워진다. 점(dot)이란 위치(position)는 가지고 있는데, 크기(volume)가 없는 것이라 정의된다. 곧 눈에 보이기는 하는데, 그것을 손으로 잡고자 해도 잡을 수 없는 (바로 영적인) 존재를 뜻한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점(dot)들이 서로 합력하면, 1차원이라는 (손에 잡히는) 거시적인 존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1차원의 존재 또한 그 의미는 지극히 적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1차원의 선분(line)들이 서로 합력하면, 2차원이라는 (손에 잡히는) 거시적인 존재로서 평면을 만들어 낸다. 평면이 갖는 (기능과) 의미는 1차원에 비해 무한히 많지만, 그래도 역시 부족하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2차원의 평면(area)들이 서로 합력하면, 3차원이라는 (손에 잡히는) 거시적인 존재로서 입체(volume)를 만들어 낸다. 입체가 갖는 그 의미는 무한히 많다. 그 많음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모든 변화들, 곧 연산의 결과들은 한결같이 물리적 현상 또는 자연의 섭리에 대응(부합)된다. 고로 그들 안에는 "진리로 향하는 길"이 있다. 그래서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무한한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의 가르침을 낳는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 능력은 "서로 합력할 수 있는 자들에게 있음"을 뜻한다.

야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 합력할 수 있는 자들
에게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나온다. 그들에게서만 더 높은 차원으로 세상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흘러 나온다.

우리는 먼저 야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뜻에 따라 합력할 줄 아는 인내와 절제, 겸손과 충성 그리고 온유함으로 헌신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먼저 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한 채, 그저 합력만 외친다면

그들의 합력은 어떠한 의미도, 가치도 부여받지 못한 그저 헛된 일이 되고 만다.

합력은 어느 때 가능할까?

독불장군에게는 합력이 있지 못한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허나 부분적으로만 잘하는 이들은, 합력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갖춘 자들이다.
사지가 멀쩡한 장님과 앉은뱅이는 최고의 콤비에 적합한 조합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각자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상대방이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이야 말로 합력이 가장 필요하고 합력의 절실함을 가장 크게 갖는 이들이다.



하지만 온 몸이 멀쩡한 우리들은 어떻던가?
틈만 나면 혼자 잘났음을 알리고, 혼자서 모든 명예와 영광을 독차지하려 한다.
합력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잠시 잠깐 사용하는 부속품으로만 여긴다.

야훼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온전한 자들에게는 합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교만한 이들에게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나오지 못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5)

반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이들은 합력의 필요성을 절실히 요구하기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눅17:33)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말자.

오히려 자신의 단점을 자랑하자.
그 단점은 서로 합력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에
이러한 능력있는 삶이 피어나게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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