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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고백과 함께 삶에 고난이 온 이유; 내 삶에 고난이 와야만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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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를 나의 구원자요 나의 도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이 사실을 따라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자 그 이후 나의 삶은 (출세하고 명성이 높아질 것으로만 여겼던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더욱 궁핍해지게 되고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등 이유를 알지 못할 그런 고난들이 쉬지 않고 몰려오게 된다. 그래서 다들 의아해 한다. "내가 믿는 예슈아가 진정 삶을 자유롭게 하고, 내게 복...복을 주시는 분이실까?"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했던 그 말, 곧 '이제부터 예슈아는 나의 구원자시요 나의 도움이 되십니다'라고 했던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나의 달콤한 로망만을 꿈꾸며 내뱉었다는 것을 모른다. 어쩌면 오해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구원자 구원자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명이 몹시도 위태롭고 나를 비롯한 그 어떤 이도 나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없는 절체절명의 늪 가운데 내가 빠졌을 때, 그런 나를 구해 줄 존재가 바로 구원자다. 따라서 구원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고난의 수렁속에 누군가 빠져야 한다 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구원자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 평화로운 시대에선 영웅이 태어날 수 없고, 다만 난세가 되어야만 영웅이 태어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다. 도움은 무엇인가? 내가 충분히 할 수 있거나 부족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는 '도움'이라는 단어가 필요치 않는다. 재벌에게 어느 누가 돕겠다며 잔 돈을 내밀겠으며, 매우 건강한 자에게 어떤 의사가 처방을 내밀 수 있겠는가? 도움이라는 단어 역시 '몹시도 부족한데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절망적인 결핍상태'가 먼저 펼쳐져야 하고, 그때 그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다가가는 자를 (결핍상태에 있는 이의 시선에서는) '나의 도움'이라 말한다. 고로 '주는 나의 구원자시요 나의 도움이시라' 또는 '당신은 내 삶의 구원

당신은 어떤 천국을 갈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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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국을 원한다. 사실 예슈아께서 계신 곳이 천국이니, 예슈아께서 계신 곳으로 가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두 가지의 양상으로 서로를 권면한다. 하나는 두려움을 줌으로써, 다른 하나는 즐거움을 줌으로써 '함께 천국으로 가자'며 권면한다. 두려움을 주는 것만으로 신앙심을 자극하여 천국으로 가려는 열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도저히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The most dangerous road'라는 게 있다. 왜 위험한 길이라 말할까? 작은 실수가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에 충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이 엄습하는 길이다. 과연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 길을 가라하면, 어느 누가 갈 수 있을까? 보상이 없는 중에 위험을 감수하라면 어느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반드시 '위험수당'을 제시해야만 가능한 일들이 있다. 즉 위험수당이라는 인센티브를 제시해야만 누군가가 그 일을 맡는다는 뜻이다.  인센티브가 없다면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인데, 인센티브가 제시되기 때문에 인센티브를 바라보고 그 일을 하겠다는 결단이 선 것이다.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을 만한 인센티브가 제공되어야 함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준이다. 전쟁을 치뤄야 하는 군인의 경우, 물질적으로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은 매우 미약하다. #군가산점 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것일 뿐, 사실은 그들 마음 속에 애국심 또는 가족을 지켜내야 한다는 가족애가 가장 큰 보상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를 받지 않고 고된 일을 하는 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실 잔혹한 독재정권에서도 조차 대가를 지불한다. 다만 그들이 제시하는 인센티브가 좀 색다른 면(??)이 있어서 그게 문제일 뿐, 그들도 인센티브는 제시한다. " 내 말 듣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 생명만은 해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인센티브라고 말하고

죄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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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죄를 이기기 위해 죄를 알아야 한다.  죄는 무엇인가? 죄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한 예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방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오직 빛 만 있을 뿐이다. 이때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그 공간은 무엇으로 가득할까?" "과연 그 공간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답은 무엇일까? 그리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온통 빛으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공간에는 어둠은 티끌만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가? 이보다 더 명확한 답이 있을까? 그때 그 공간에 내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앞서 했던 동일한 질문을 해 보기로 하자. "그 공간은 무엇으로 가득할까?" "과연 그 공간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때의 답변은 어떻게 될까? 앞선 답변과 동일하다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란 존재는 아무런 나쁜 짓도 행하지 않았고, 빛을 거역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답은 앞선 경우와 달라야 했다. "그 공간은 빛과 어둠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럼 다시 질문해 보기로 하자. "어둠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빛으로만 채워진 그 공간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이때의 답변은 나 자신을 매우 곤혹스럽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답변만이 명확하리라. "어둠은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함과 동시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가 존재하자 그와 동시에 어둠 역시 존재하게 되었다. 즉 어둠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어둠을 없애고 싶다면, 그 답변도 역시 단호하지만 나를 곤혹스럽게 할 것이다. "그 공간에서 내가 사라지면 됩니다." 내가 사라지자, 그

겸손한데 당당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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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참~아이러니하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땐 쉽게 겸손할 수 있는데, 가장 낮은 자리로 가면 겸손이 너무 어렵다. 모두에게 칭찬을 받는 현장에서는 누구보다 낮은 모습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이들이 치부가 드러나는 그 순간에는 치졸하리 만큼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려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본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얻는 교훈이 있다. 가장 낮은 자리, 혹은 치부가 드러나는 그 순간에 당당하게 자신을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자가 겸손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내가 가난하다는 그 사실을 많은 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나요? 내가 학력이 부족하다는 그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더라도 당당할 수 있나요? 자신의 진솔한 모습을 모두에게 드러내더라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는 자 그가 바로 겸손한 자 입니다. 비굴한듯 허리를 연신 굽히는 건 겸손함이 아닌, 아첨이겠지요?

유교병과 무교병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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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병과 무교병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유교병은 누룩이 들어가서 누룩의 힘을 빌어 발효가 일어나니 빵이 매우 부드러운 상태로 구워진다. 부드러워진 빵은 칼로 예쁘게 잘라서 식탁에 놓이게 되니 풍요를 일컫는 안정된 분위기에서 한껏 식사를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반면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 있지 않아 빵이 매우 딱딱한 상태로 구워진다. 그래서 어떠한 칼로도 자를 수 없고 단지 손으로 부러뜨려 쪼개어서만 먹을 수 있다. 즉 한가롭게 식탁에 앉지 않고 광야와 같은 들판에서 이루어진 매우 간소한 식사를 의미한다. 식사를 하는 이들의 심정이 (풍요를 즐기기 보다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식사를 하게 될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평화로운 집 안에서의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유교병과 달리 무교병은 광야, 즉 Midbar 앞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Midbar는 광야(desert) 를 뜻하지만 한편으로는 야훼 하나님의 입(mouth; #4057) 을 의미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시23:5a) 의 말씀처럼, '어떠한 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를 안위하시는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는 다름아닌 그분의 말씀이다. '주님이 입을 열어서 말씀하시다'는 의미는 Dabar로서 이 동사의 명사형이 midbar다. 따라서 시편23편의 말씀이 전개되는 그 구도를 보자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4) 의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5) 의 말씀, 곧 '상을 차려 주심'과 '내 잔이 넘치는 현상'이 뒤따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친히 그 입술을 열어 말씀하실 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청종하며 따르는 샤마르(sha

요즘 하늘이 이상하다

  요즘 하늘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멋진 장관들이 펼쳐지고 있다. 운전하는 중에 보게 될 때 내 마음은 실로 벅찰 정도다. '다시 온다' 약속하신 그 예슈아께서 이 땅에 오실 때가 되었는지, 하늘은 벌써부터 리허설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라나타. 주 예슈아 어서 오시옵소서. 나의 마음을 담아 고백해 본다.

몸이 불편한 지체와 그를 향한 판단과 정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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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인 부분에서 치료를 받으며 약을 20여년 가까이 먹고 있는 한 지체가 있다. 공동체 안에 있다지만 대부분 어느 정도까지만 교제를 하고 그 이외에는 제한을 둔다. 물론 나 역시 그렇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그의 병력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체와의 거리두기를 하는 것과 더불어 그를 향해 난무하듯 쏟아지는 각종 판단과 정죄는 교회 공동체 안의 심각한 잘못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9:2.개역개정) 대부분은 그 지체의 행동 하나 하나에 '악한 귀신으로 부터 비롯된 행동'이라는 판단을 던졌다. 그의 정신과적 병력 역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죄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죄했다. 그런데 말이다. 정신과의 치료를 받고 있는 그 지체는 겉으로 보더라도 '약간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조차도 늘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지체는 살아 숨쉬는 그 모든 순간들이 누군가로부터 오는 판단과 정죄에 의해 고통을 받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하는 인고의 순간들인 셈이다. 사방에서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판단과 정죄가 쏟아지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우리들까지 그 지체를 향해 판단과 정죄를 쏟아내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또는 선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主님은 우리에게 판단과 정죄의 역할을 맡기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처럼 믿고 있으며 그렇게 알고 있다. 예슈아는 우리에게 그 대신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을 주셨다. 어느 것 하나 은혜를 받을 자격도 되지 않는 우리들이지만, #일만_달란트 라는 초월적 수준의 빚을 탕감해 주셨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은혜를 받았으니, 그 마음이 어찌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겠는가? 그 마음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슈아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노아의 때에 가벼운 멍에를 지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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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으로서 중간고사 또는 기말고사와 같은 시험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있어서 시험이란 '하기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험이라는 부분은 신앙인에게도 가장 듣기 싫은 말이요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시험의 때를 면해 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여기서 잠깐! '면하여 준다' 또는 '면(제)한다'라는 말은 면역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감기 바이러스가 온 땅을 휩쓸 때, 어떤 이는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지나가는 반면 다른 어떤 이는 극심한 고통과 아울러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차이는 '면역(력)'이다. 면역력이 높은 이와 낮은 이 모두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하지만 면역력이 높은 이는 바이러스의 효과가 전혀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면역력을 더 높여주는 그런 기회로 작용된다. 따라서 면역력이 높은 이에겐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그 시점이 별 문제가 되지 않은 채로 넘어가게 된다. 면역학에선 이를 두고 '면(제)한다' 또는 '면제된다'라고 말한다. 학생으로서 성실하게 공부를 한 이에겐 다가올 시험이 무섭지 않다. 물론 신중해야 함은 있다. 그러나 두려움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상황은 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대로 평소 공부를 하지 않았던 불성실한 학생의 경우는 다르다. 시험이 무섭다. 그래서 결국 자포자기를 해 버린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받게 될 합당한 처벌' 앞에서 스스로 시인하였다. 지난 날의 불성실했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인정하였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그가 받게 될 처벌이 어떠한 것인지 알기에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고 그 두려움 앞에서 스스로 자멸하듯 저항조차

환난 날에 임할 그 시험을 준비하라.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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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은 평소 공부를 한다. 누구 하나 공부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 스스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자율)의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절대로 영원하지 않는다. 반드시 주어졌던 자유에 대해 '확인받는 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것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야훼 하나님의 질서( the principle, the order, the commandments )요 만물의 이치다. 그런데 말이다. 공부를 못하는 이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시험을 준비하면 되는 지 그 사실을 모른다. 가령 수학 시험을 치뤄야 하는 상황에서, 시험에 관한 정보, 곧 시험범위와 어떻게 시험을 공부하면 되는 지에 대한 설명을 누구에게 들어야 할까? 이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답을 할 수 있다. 가장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국어 선생님께? 교장 선생님께? 아니면 부모님께? 아니다. 담당 수학 선생님 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가 시험문제를 출제할 수 있는 ' 유일한 권한 '을 가진 분이기 때문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반드시 찾아올 것은 무엇일까? 평소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자유)를 만끽하며 살아왔다. 어느 누구도 나의 자유의지적 선택에 대해 이렇다할 반문을 하지 않았다.  왜? 그게 내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하지만 자유의지적 선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기는 영원토록 지속되지 않는다. 반드시 '나의 자유의지'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야훼 하나님의 질서로서, 내가 뿌린 씨앗에 대해 거둬들이는 추수의 때가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12:36) 이때 평가 항목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평가가 진행되는 지에 관한 '정보'를 아는 이가 있을까? 누구에게 그 정보를 묻는 게 현명하고 지혜로운 모습일까? 교회 목사님? 은사자? 아니다. 평가하는

잘못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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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겸손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나 같은 하찮은 존재'라는 고백이 매우 값진 것으로 우리는 이해하곤 했다. 그렇기에 대표기도문에도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 '벌레만도 못한 자신'을 고백하는 표현들이다. #자기_자신을_비하'하는 말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작은 자'라는 말의 표현이 가치없는 혹은 하찮은 존재를 의미하는 말일까? 땅을 팠을 때 나오는 보석은 실상 보석이 아닌 원석의 형태로 나온다. 돌과 같이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는 의미로서 raw material이라는 의미의 raw ore라고 표현한다. 한 예로 raw iron ore를 보면, 돌멩이다. 길바닥에 그리고 땅을 파다보면 흔히 나오는 그런 돌멩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돌멩이를 제대로 볼 줄 아는 그런 보석상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들은 이 돌멩이를 그냥 발로 차 버리고 말것이다. 하지만 보석상의 눈을 가진 자라면 어떨까? 세상 모두가 '하찮은 돌멩이요 하찮은 존재'라고 부를 때, 오직 그 한 사람만은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세요. 이 돌멩이는 매우 값진 것이랍니다! 라고 부를 것이다. 모두가 'No'라고 말할 때, 오직 그 한 사람만은 'yes'라고 말할 것이다. 왜? 오직 그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 존재만이 지닌 유일한 형상 이 있기 때문이다. 겸손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자 나만 할 수 있어! 너희는 할 수 없어 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자기만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교만이라 말한다. 이러한 교만은 나만 있으면 돼!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다른 사람들은 필요치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전부이고 그 전부가 바로 나야! 라는 믿음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 어떠한 가치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은 늘 강조하듯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 라

내 안에 여전히 어둠을 남겨 놓으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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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사역의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라는 부분을 접한 이래로 영적 전쟁을 실감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안수기도를 통해 내면의 어둠을 떼어내는 #축사 #deliverance_from_sin'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한 때는 축사 사역을 통해 내 안의 어둠을 제거하는 게 너무 즐거웠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둠을 제거해 나가는 정도 또는 수준에 따라 영적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축사 사역에만 전념하던 내 스스로에게 의문이 생겨났다. "안수 기도를 받았음에도 왜 나는 여전히 아내와 싸움을 하는 걸까?" 내 삶의 변화가 나타나서, 아내와 정신없이 싸우던 예전의 내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않기를 내심 기대했었는데 막상 현실 속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변화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내면 속에는 아내와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아주 충분히 내재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축사 사역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기를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최근 교회(공동체) 안에서 60세의 나이에 가까운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었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사도 바울에게 제거되지 않았던 사단의 가시'라는 내용이 언급되면서, 나도 모르게 '사단의 가시를 남겨 놓으신 이유는, 바울을 겸손한 자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이라 하신지라 (고후12:7b, 9a)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자에게서 온전해진다. 이 말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데, 축사 사역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던 나에겐 '복음'Good News 그 자체였던 것이다. 비록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내 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