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병과 무교병의 차이
유교병과 무교병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유교병은 누룩이 들어가서 누룩의 힘을 빌어 발효가 일어나니 빵이 매우 부드러운 상태로 구워진다. 부드러워진 빵은 칼로 예쁘게 잘라서 식탁에 놓이게 되니 풍요를 일컫는 안정된 분위기에서 한껏 식사를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반면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 있지 않아 빵이 매우 딱딱한 상태로 구워진다. 그래서 어떠한 칼로도 자를 수 없고 단지 손으로 부러뜨려 쪼개어서만 먹을 수 있다. 즉 한가롭게 식탁에 앉지 않고 광야와 같은 들판에서 이루어진 매우 간소한 식사를 의미한다. 식사를 하는 이들의 심정이 (풍요를 즐기기 보다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식사를 하게 될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평화로운 집 안에서의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유교병과 달리 무교병은 광야, 즉 Midbar 앞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Midbar는 광야(desert)를 뜻하지만 한편으로는 야훼 하나님의 입(mouth; #4057)을 의미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시23:5a)
의 말씀처럼, '어떠한 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를 안위하시는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는 다름아닌 그분의 말씀이다. '주님이 입을 열어서 말씀하시다'는 의미는 Dabar로서 이 동사의 명사형이 midbar다. 따라서 시편23편의 말씀이 전개되는 그 구도를 보자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의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의 말씀, 곧 '상을 차려 주심'과 '내 잔이 넘치는 현상'이 뒤따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친히 그 입술을 열어 말씀하실 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청종하며 따르는 샤마르(shamar)의 삶이 시23:4로 표현되었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바로 시23:5로 표현되었다. 이때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이가 먹는 양식, 곧 생명의 빵이 무엇으로 표현되었을까?
그것이 바로 누룩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식탁도 없고 칼로 없는 그런 초라한 식사가 연상되는) 손으로 빵을 쪼개어 먹을 수 밖에 없는 식사다. 고로 생명의빵은 다름아닌 무교병이요 마짜(Matzah)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주변의 여느 부잣집과 비교해 볼 때, 초라하고 여유롭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중증근무력증으로 12년째 투병 시기를 겪고 있는 나 역시 그와 같이 생각할 때가 매우 많다.
하지만 이는 무교병을 먹고 지내야만 하는 그 시기, 곧 광야에서 주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매우 강력하고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 칼럼에 소개된 내용을 잠시만 인용해 보기로 하자.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유월절이면 먹는 ‘맛짜’는 마치 얇게 구운 ‘비스킷’처럼 생겼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부활절이 되면 그 ‘맛짜’를 무교병이라고 수입해서 판다. 하지만 성경 시대 무교절에 먹던 무교병은 오늘날 ‘맛짜’와 같이 얇은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랍비문헌에 의하면 성전시대의 무교병은 그 두께가 1 트파흐였다고 한다. ‘트파흐’란 손바닥 넓이를 가리키는 성전시대 물건을 재는 단위로 약 10cm정도의 넓이다. 즉 그만큼 두껍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구운 무교병은 식어지면 딱딱하게 굳어서 다시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7일 동안 매일 새롭게 무교병을 구워야 했다고 한다. 랍비문헌에서는 이렇게 무교병을 두껍게 구운 이유를 무교병을 먹는 7일 동안 무교병의 의미들을 매일 매일 새롭게 되새길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HaShulchan Aruch, 459장)
출처 : 장재일 목사가 들려주는 배경으로 읽는 성경절기의 7번째 이야기 '무교병 이야기' 중에서 (기독신문)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무교병의 두께가 얇아졌지, 허리에 띠를 두르고 급하게 불에 구워 허겁지겁 먹어야 했던 출애굽 당시엔 언제 빵을 얇게 펼치고 있었겠는가? 그럴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지 않는가. 언제 어디에서 아말렉과 같은 위협이 다가올 지 모르는 광야의 땅이다. 그런 곳에서 어찌 편안하게 빵을 얇게 펼치고 구수한 빵내음을 맡으며 즐거운 식사시간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대충 손으로 치댄 두툼한 무교병을 굽고, 식탁도 없이 땅바닥에 엉거주춤 앉아서 빵을 부서뜨려서 먹는데 어찌 그 빵이 맛이 있으리요. 하물며 시간이 지나 굳어버리면 너무 딱딱하여 더 이상 이빨로 깨물어 먹을 수 없을 정도가 되는데, 어찌 부녀자들이 한 번 구워낸 빵으로 여러 번의 식사를 가능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는가?
소위 식사가 즐겁지 못하다. 매 순간 식사를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한다. 매우 무미건조한 식사요 삶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거 아는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8)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시104:34)
그렇다. 단 하나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는 그 기쁨은 오직 단 하나 밖에 없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어떤 것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요소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군데에서만 기뻐할 수 있음을 찾을 수 있나니, 나는 고백한다.
나는
여호와, 단 한 분만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닛산월 14번째 날은 유월절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곧 15번째 날은 무교절이다.
예슈아의 죽으심을 경험했고, 그로 인하여 주인을 잃어버린 이들이 매우 불안한 상황에 처하는 시기를 겪는다. 하지만 그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극복할 수 있는가를 '무교병'이라 불리는 마짜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시기를 극복한 이들에겐, 부활의 주님이 친히 그 입술(midbar)을 열어서 말씀하실 것(dabar)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눅16:10a)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19:17)
지극히 작은 것, 곧 삶의 윤택함(누룩; 하메츠, חמץ)이 제거된 그 삶 속에서 오로지 주님 한 분만으로 기뻐 노래할 수 있던 그 심령을 가진 이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왕으로 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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