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무엇인가?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죄를 이기기 위해 죄를 알아야 한다.
죄는 무엇인가?
죄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한 예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방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오직 빛 만 있을 뿐이다.
이때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그 공간은 무엇으로 가득할까?"
"과연 그 공간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답은 무엇일까? 그리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온통 빛으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공간에는 어둠은 티끌만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가? 이보다 더 명확한 답이 있을까?
그때 그 공간에 내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앞서 했던 동일한 질문을 해 보기로 하자.
"그 공간은 무엇으로 가득할까?"
"과연 그 공간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때의 답변은 어떻게 될까? 앞선 답변과 동일하다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란 존재는 아무런 나쁜 짓도 행하지 않았고, 빛을 거역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답은 앞선 경우와 달라야 했다.
"그 공간은 빛과 어둠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럼 다시 질문해 보기로 하자.
"어둠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빛으로만 채워진 그 공간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이때의 답변은 나 자신을 매우 곤혹스럽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답변만이 명확하리라.
"어둠은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함과 동시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가 존재하자 그와 동시에 어둠 역시 존재하게 되었다. 즉 어둠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어둠을 없애고 싶다면, 그 답변도 역시 단호하지만 나를 곤혹스럽게 할 것이다.
"그 공간에서 내가 사라지면 됩니다."
내가 사라지자, 그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 nothing)가 되었고 동시에 오직 빛만 존재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어떤 유익이 있을 수 있을까? 유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가 존재해야 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함께 존재(공존)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어떠한 관계도 없다. 그렇다면 관계 안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유익'이라는 단어 역시 그 공간 안에서는 사용할 수도 없고, 사용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냥 없음 그 자체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중략)...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중략)... 아브라함이 이르되 ...(중략)...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16:23~26.개역개정)
관계를 형성하고 싶으나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있어서,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고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기에, 어떤 긍휼도 나눠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유익도 없다는 뜻이다.
안드로메다 행성에 갑순이가 사는데 #코로나_바이러스'에 특효한 만병통치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질병통제센터(CDC)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제는 우리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할 있게 되었다고 환호성을 부르며, 온 세계에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때 한 아이가 질문을 한다.
"아저씨. 그 약을 어떻게 가져오실 거예요?"
이 한마디의 말은 일순간 전세계에 퍼졌고, 그와 동시에 전세계는 빙하기가 찾아온 듯 모두 얼어붙어 버렸다. 전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인도했던 그 희소식이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식이라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소망으로 가득하던 CDC는 또다시 소망없는 상태로 빠져버렸다.
왜?
유익할 거라 믿었던 소식이 사실은 어떤 유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빈 공간에서 빛이란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막9:50a)
빛은 무언가를 비출 때, 그 역할을 다 한다(요19:30). 이를 위해선 물체(육신)가 있어야 하고, 빛은 그 물체에 닿을 때 비출 수 있다. 하지만 물체가 없다. 그래서 빛이 다다를 수 없다면? 우리는 그런 공간을 가리켜 '무저갱'(bottomless)이라 말한다. 빛이 닿지 않는 공간...으로서 |
빛은 어둠을 밝혀주기 때문에 무척 좋은 것이다. 하지만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빛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빛이 필요한 이유가 없지 않는가? 빛이 빛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하기 위해선, 그의 역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곧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빛의 역할'이 수행 가능한 그런 공간이 있어야만 빛은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할 수 있다. 고로 "빛이 있다"는 사실이 유익한 것, 또는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둠이 공존한다"는 사실도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어둠은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앞선 이야기처럼, 공간에 (영이 아닌 육신의) 나(我)라는 존재가 있으면 된다. 그리고 내가 존재함과 동시에 어둠도 함께 공존하게 된다. 그러자 빛-인간-어둠이 서로 관계성을 맺게 되었고, 그 삼각관계는 사실 빛을 가장 영광되게 그리고 빛을 완성하는 데 충분했다.
빛이 있는 공간에 빛이 다다를 수 있는 물체(곧 바닥)가 있다. 이는 바닥이 없는 공간(무저갱; bottomless)과 정반대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빛은 물체에 닿는 자신의 역할(로서 예언을 성취하는 일)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요19:30). |
이제 죄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흔히 아는 사실처럼, 죄는 규칙을 어긴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기차의 탈선(죄)은 기차가 기찻길(철로; 규칙)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그럼 철로가 없는 곳일지라도 기차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탈선(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그 세계에서는 탈선(죄)이라는 사실도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즉 어느 누구도 탈선(죄)을 기억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거운 기차가 철로없이 운행한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기차가 땅 위 어디든 굴러간다는 그 의미가 사실은 정말 안타까움 그 자체이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총체적인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기차의 원활한 운행을 계획할 것이고, 이를 위해 기찻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들은 규칙을 만든다. 그 규칙 안에서 기찻길은 완성되고, 기차는 그 기찻길 위를 원활하게 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 세계에는 그 이전에는 생각해 본적도 없는 새로운 단어, 곧 탈선이라는 단어(또는 죄)를 인식해야만 한다.
이와 같다.
죄는 규칙 또는 율법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규칙 또는 율법이 없었기에, 죄를 죄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세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부모(규칙 또는 율법)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어린 꼬마 아이들만 남아 있는 집을 상상해 보면 어떨까? 그 세계는 모든 것이 자유만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동시에 혼돈 역시 함께 한다. 그래서 이때의 자유를 우리는 방종이라 부른다.
얼마 후 부모가 돌아온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집 안을 (규칙에 따라)정리한다. 그리고 어린 자녀들에게 규칙을 들려준다.
"너희는 엄마와 아빠의 규칙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단다."
그렇다. 통제된 상황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를 만들기 위해 '통제의 수단으로서 규칙'이 존재해야 하고, 규칙이 존재함과 동시에 규칙을 어기는 행위로서 죄도 함께 명시되어 공존하게 된다.
따라서 '죄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죄는 규칙(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지만 규칙(율법)과 죄는 야누스의 얼굴처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죄를 없애고 싶다면, 규칙(율법)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죄를 없애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럼 규칙(율법으로서 계명)을 없애면 죄는 사라질까?
예슈아는 계명을 어기는 행위와 죄를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12:5.개역개정)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는 십계명 중 한 계명을 제사장이 어겼다. 그것도 성전 안에서 말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가차없이 돌맹이를 던져 그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게 유대인들인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지키거나 혹은 어긴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이슈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예슈아는 계명을 어기는 일과 죄를 구분지어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규칙(율법으로서 계명)을 어기는 것은 죄가 아님을 의미한다고 본다.
한 예를 들어보자.
'신호등을 무단으로 건너지 말라'는 교통법규가 있다. 그런데 횡단보도 한 가운데에 장애를 가진 어린 아이가 넘어져 있고, 횡단보도 양방향으로는 차들이 무섭게 달리고 있다. 여러분이 이 상황을 보았다고 하자.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옳은 판단일까? 아니면 (신호등은 빨간불일지라도) 차의 이동이 뜸한 틈을 타서 넘어져 있는 아이를 재빠르게 도로 밖으로 꺼내오는 게 옳은 판단일까?
후자를 택하는 경우, 교통법규를 어긴 건 맞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
왜?
그것은 사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 교통법규를 제정했다'는 법의 취지 또는 법을 만든 본래의 목적을 오히려 더 온전하게 지켜냈기 때문이다. 매우 #이율배반적'인 사실이지만, 이게 옳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살생을 해야 한다.
내 생명을 위해 가축의 생명을 빼앗아야 한다.
는 사실들도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사람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규칙을 제정한 것이지, 규칙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있는 건 아닌 것과 같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개역개정)
이로써 "규칙 또는 율법(으로서 계명)을 어기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사실은 그릇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본다. 앞선 설명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율법을 주신 이는 빛과 인간 그리고 어둠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지켜나감으로써 빛을 더욱 온전하게 세우기 위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쉽게 말하자면, 주님은 어둠을 없애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다. 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다만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하시고, 그 빛이 보여주는 길을 따라 함께 걷는 그런 이를 찾으시기 위함이다.
죄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통해) 뜻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삶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그런 동행하는 삶을 원하신다.
그렇기에 "죄가 없는 삶", "어둠이 없는 삶"을 찾기 위해 열심을 내는 건 그분의 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죄가 없는' 또는 '어둠이 없는' 그런 공간(삶) 자체는 존재할 수 없다.
없다! 없어!!
오히려 예슈아께선 죄와 어둠을 필요로 하신다. 공존하기를 원하신다. 죄와 어둠이 예슈아와 함께 공존해야만 예슈아의 메시아로서 역할이 더욱 빛나고 가치를 더하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죄와 어둠'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로 인해 그분의 뜻을 아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직 그 길만이 죄를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길이라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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