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의 게시물 표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주께서 슬퍼하시며....

이미지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6:6.흠정역) '슬퍼하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atsab( עָצַב ) 이라 한다. 이는 'displease'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to hurt, pain, grieve'이란 뜻을 갖는다. please라는 단어는 '제발'(도와주세요) 또는 '부디'(간청합니다)라는 단어다.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의 상태 또는 성경 속 표현으로 바꿔 말하자면 '상한 심령에서 나오는 갈급함'이 잘 묻어 있는 표현이다. 그런 표현의 단어를 조금만 바꿔 'pleased'라고 하면, 이것은 (특별한 대상이 채워짐으로 인해)'기뻐하는' 또는 '만족하는'의 뜻이 된다. 그래서 displease라는 의미는 특별한 대상이 채워지지 못하여 겪는 슬픔과 고통 그리고 내적 상처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영어의 표현으로 히브리 원문에 있는 atsab(아짜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알고 있는 atsab의 의미다. 만일 이것으로 끝이라면 오늘의 나눔은 그다지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숨겨져 있던 신비로운 의미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 창세 당시 범죄한 여자(하와)에게 야훼께서 주셨던 고통이 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고통과 수태를 크게 더하리니; 네가 고통 중에 자식을 낳을 것이요 (창3:16a.흠정역)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 thou shalt bring forth children;   (KJV) |  본시 고통과 수태는 서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창3:16에서 고통과 수태는 하나가 된다.  하지만 창3:16에서 고통과 수태는 하나가 된다. KJV에서는 ( 내면의 고통으로서 ) ' sorrow '와

영적 성숙의 단계; 행함이 먼저요 권위는 그 다음이다.

이미지
흔히들 자신의 위대함을 내세움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듯 순종하기를 바라곤 한다. 물론 나 역시 그와 같이 생각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화려한 경력을 내세우거나 혹은 높은 지위를 내세울 때,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 ' 이들이 나를 인정하는 구나 ' 하고 생각한다. 정치인이나 목회자 분들과 같은 경우, 자신들의 연설이나 설교를 듣겠다며 모여드는 이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지자 또는 성도들의 무리들이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행동한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정신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 왔다가 흔적도 없이 빠져나가 버린다. 그럴 경우 그 수 많던 '그들이 과연 정치인 또는 목회자를 신뢰하였던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그들이 정치인이나 목회자 분들을 신뢰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 없다.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지지자들의 변화는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들에 대해 목회자는 물론 성도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파급효과는 매우 크다. 한순간에 빠져나가 버리는 상황을 본 이들 중에서 힘들게 일궈놓은 그들의 신앙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는 그런 경우를 종종 보아 왔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그와 같은 모습들이 일어날 때, 나름 열심을 낸다고 하는 이들이지만 마음의 중심까지 흔들리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그래서 생각해 보길 원한다. | 과연 성도들은 목회자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의 설교를 듣고자 몰려오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어쩌면 ' 목회자와 성도간에 신뢰관계가 세워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 스스로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부모들의 입에서 간혹 나오는 말이 있다. " 내 아들(딸), 이제보니 다 컸구나! " 어느 때에 이런 말을 하게 될까? 평소 자신의 자녀에 대해 아직도 어리다고 여기는 부모다. 그런데 어느

Gear가 보여주는 야훼 하나님의 구속사 이야기

이미지
Gear라 하면 기계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주된 통로다. 즉 정지해 있어야만 하는 쇠붙이가 살아 움직이는 존재처럼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Gear다. 쇠붙이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 곧 에너지를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옮겨주는 역할을 Gear가 담당한다. 그래서 사실상 기계에 각 부속품들은 떨어져 있어야 함이 옳은데 반해 Gear는 항상 붙어야만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 그런 Gear를 유심히 눈여겨 볼 기회가 생겼다. 아들 녀석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아들의 말에서 큰 이치를 보게 된 것이다. 두 개의 Gear가 맞물려 돌아갈 때에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 고 말을 했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나의 뇌리를 강하게 때리는 그런 깨달음을 안겨주는 말이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Gear는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하지만 둘의 회전하는 방향은 정반대의 방향이다. 서로 합력을 하는 관계이지만, 정작 회전하는 방향은 정반대다. 이럴 경우 Gear에 맞물려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 무언가는 서로 반대방향을 향해 열심히 나아갈 것이고 그 결과 한없이 멀어지는 관계를 만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Gear가 더 장착된다면 어떻게 될까? 총​ 3개의 Gear가 서로 맞물려 회전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아까와는 조금 다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다. ⓐ, ⓑ, ⓒ 3개의 Gear가 있을 때, ⓐ는 ⓑ와 맞물려 회전하고, 마찬가지로 ⓑ와 ⓒ가 서로 맞물려 회전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와 ⓒ는 서로 맞물릴 수 없는 상황인데, ⓑ에 의해서 맞물려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즉 ⓑ가 없다면 ⓐ와 ⓒ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인데, ⓑ로 말미암아 이 둘은 마치 본래부터 하나였던 양 행동하고 있다. 이때 그들의 회전 방향을 한 번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의 회전방향에 대해 ⓑ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회전한다. 하지만 ⓑ가 ⓐ와 정반대의 방향을 택해준 것으로 인해 ⓒ는 자연스럽게 ⓐ와 같은 방향으

정부가 법을 계속 만들고 개정하고 있는 이유

이미지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평소에 법을 어기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 그런 이들은 어떤 삶을 사는 이들일까? 대개는 스스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려 하지 않고, 이탈을 하려 한다. 쓰레기를 지정된 곳에 버리는 게 아니라, 자기 편한 대로 버리려 한다. 주변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낮은 소리로 말해야 하는데,  자기 편한 대로  목청껏 소리를 낸다. 길을 걷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침을 뱉어선 안 되지만, 자기 편하자고 아무대나 침을 뱉어댄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선진국 시민으로서의 시민의식이 부족한 자'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의식 수준이 낮은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자기 편할 대로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함부로 행동한다. 이를 두고 정부는 '의식 수준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여기고, 계몽운동을 일으킨다. '교육' 수준을 높여서 배움의 수준을 향상시켜,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그 결과 어떤 순간에 어떤 장소에 있더라도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여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판단을 통해 행동하고 말한다. 그와 같이 행동하는 이를 두고 우리는 말한다. ' 그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 라고. | 의식 수준이 높은 이들이 많은 사회는 굳이 개인의 행동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  추가적인 법 제정을 따로 하지 않더라도 시민들 스스로가 잘 어울려 지내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그래서 별다른 탈 없이 서로간에 잘 지낼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된다. 하지만 의식 수준이 낮은 이들만 있는 사회에서는 매순간 그리고 상황이 바뀔 때마다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제한해야 한다. 이것은 할 수 있고,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그런 가이드라인을 늘 제시해 줘야 한다. 그래야만 겨우 별탈 없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미지
하나님께서 세상 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중략)... For God so loved the world ,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요3:16a.흠정역) |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그 세상이란 무엇일까? the world 는 κόσμον ( kosmos )로서 ' order, the world '의 뜻을 내포하고서 ' the world, universe; worldly affairs;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adornment .'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수 있는 부분은 '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세상의 거주민들)다. 이는 '열방' all nations 라고 말하는 '이방인' Gentile 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 요한이 말한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하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이교도들을 의롭게 하려 하심을 성경 기록이 미리 보고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되, 네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갈3:8.흠정역) |  성경 기록이 미리 보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아브라함을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계획된 야훼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 뜻을 성령께서 아브라함에게 넌즈시 알려주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동역자(친구)로서 함께하겠느냐고 물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주님의 뜻을 이루는 그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버지로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모습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슈아를 십자가에 내어주실 그 사건의 모형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부분에서 자신들의 믿음이 증거로 제시되어야 할 이들은 이방인이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에 의해 이미 택함받은 자들이라는 구별됨이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복음으로 하면 그(유

휴거를 설명하다.

이미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휴​거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에녹과 엘리야 선지자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 기록된 내용에서는 #휴거 #rapture 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데려가다'라는 표현만을 그 근거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다'는 표현 중에 '데려가다'는 표현은 어떤 히브리어로 사용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bibleHub.com 창5:24에 기록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다'는 부분에 '데려가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Laqach(לָקַח)로 표현되어 있다. 본래 '취하다 또는 데려가다'라는 뜻의 laqach는 여러 의미로 해석되었는데, 그 의미들을 보면 bibleHub.com 여러 다양한 의미들로 번역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번역들은 우리들이 이미 소지하고 있거나 혹은 또다른 번역본의 성경에 이미 수록된 표현들이다. 눈여겨 볼 표현들로는 bring, capture, caught, take, select, seize 등을 들 수 있다. 이때 '휴거'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신약성경의 구절을 보면, 단연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이다. 여기에서 '끌어 올려지다'caught up는 표현을 두고 '휴거'(rapture)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휴거란 '위로 끌어 올려지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런 중에 엘리야 선지자의 경우,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 2:11)에 기록된 것처럼 '하늘로 올라갔다'alah는 표현으로 설명되었으니 휴거로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상황이다. 엘리야의 휴거를 뜻하는 'alah'는

천사와 악마 그리고 인간이 공존할 수 있을까?

이미지
부활의 몸이라 함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슈아께서 부활하실 때의 육신을 일컫는다. 반면 육의 몸이라 함은 (부활의 몸과 차별화 하기 위한 개인적인 표현으로서) 현재 살아서 움직이는 우리들의 육신을 일컫는다. 부활의 몸과 육의 몸에 대한 정의를 간략하게 설명 하였기에, 다음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명확하게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부활의 몸은 천국에 들어갈 때 우리들의 육체가 된다고 우리는 말하고 또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럼 '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와 함께 공존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육의 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육체다. 그런 육의 몸을 가진 자와 부활의 몸을 가진 이가 공존할 수 있겠느냐는 부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한다. | 공존할 수 있을까? 한 공간에 함께 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어쩌면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사실로 답변할 수 있으리라 본다. ' 공존 할 수 있다 '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슈아를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예슈아께서는 40일간 제자들과 더불어 지상에서의 삶을 더 이어나가셨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1:3) 즉 부활의 몸을 지닌 존재가 육의 몸을 지닌 존재들과 함께 40일간 공존했다는 뜻이 된다. 부활의 몸을 지닌 존재와 육의 몸을 지닌 존재들이 이렇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거나 혹은 천국에 들어간 자들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제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40일간의 여정이었지만, 천국에 속한 자가 땅에 속한 이들과 함께 동거동락을 한 것이다. | 이건 어떤 의미일까? 이 사실을 정반대의 경우로 해석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는 의미이지

복음은 누구에게 필요한 것일까? 유대인? 아니면 이방인?

이미지
| 복음, 곧 기쁜 소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제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1:14~15.흠정역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부분으로서, '회개와 복음'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이 이렇게 선포되었다. 그럼 이는 누구를 위하여 선포되는 것일까? 주는 의미없는 일을 하지 않으시며, 주가 주신 Torah는 과녁을 정확하게 겨냥(yara)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복음이란 '특별한 대상과 반드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야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는 계획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는 이가 있다. 그는 사도 바울이다. Torah, 곧 모세오경(과 선지서 등을 담은 구약성경)에 능통한 성경학자 중의 학자이면서 인간의 시점을 벗어나 성경을 주신 이의 시점에서 성경 속 예언들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된 그가 복음에 대해 설명하기를,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롬11:28.새번역) 복음에 관하여 이야기해 볼 때, 복음이 유용하게 작용한 이들은 이방인(Gentile)들이다.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son of God)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계기로 복음은 작용하고 말았다. 만일에 복음이라는 것이 애시당초 선포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이방인은 복음이 선포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된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왕국의 복음은 선포되었다. 야훼 하나님의 거의 일방적인 계획이라 표현하는 게 옳을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유능한 좌파보다 무능한 우파가 더 두렵다

이미지
  '유능한 적군보다 무능한 아군이 더 두렵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

이미지
내가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과연 몇 명이나 할까?'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공부를 하면 하는 것이지, 굳이 공부를 해야만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공부를 해야 하는 그 이유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크다. 공부를 해야만 하는 그 이유 또는 목표가 있는 이는 스스로 공부를 하게 되며 성실하게 공부에 임하게 된다. 반면 공부를 해야만 하는 삶의 목표가 없는 이는 수동적이다. 누군가가 시켜야만 공부를 하고 할 수만 있으면 감독관의 눈을 피해 놀면서 공부하는 척만 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에게 '누가 보고 있지 않더라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자녀의 모습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것일까? 지금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부모가 나이들고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때가 오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경제적인 활동을 담당하면서 부모님을 도와주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창조의 섭리를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순간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경제적 활동을 책임지을 수 있는 자로 성장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한다.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듯, 장차 다가올 미래를 안정적으로 이끌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 여기서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우리가 성경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회자께서 깨달은 바를 그냥 편하게 전달받는 그런 삶을 평생토록 살아간다면 안 되는 걸까 이 상황도 역시 앞선 경우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홀로 신앙생활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때가 온다. 나에게 성경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