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숙의 단계; 행함이 먼저요 권위는 그 다음이다.

흔히들 자신의 위대함을 내세움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듯 순종하기를 바라곤 한다. 물론 나 역시 그와 같이 생각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화려한 경력을 내세우거나 혹은 높은 지위를 내세울 때,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

'이들이 나를 인정하는 구나'

하고 생각한다. 정치인이나 목회자 분들과 같은 경우, 자신들의 연설이나 설교를 듣겠다며 모여드는 이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지자 또는 성도들의 무리들이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행동한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정신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 왔다가 흔적도 없이 빠져나가 버린다. 그럴 경우 그 수 많던 '그들이 과연 정치인 또는 목회자를 신뢰하였던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그들이 정치인이나 목회자 분들을 신뢰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


없다.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지지자들의 변화는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들에 대해 목회자는 물론 성도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파급효과는 매우 크다. 한순간에 빠져나가 버리는 상황을 본 이들 중에서 힘들게 일궈놓은 그들의 신앙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는 그런 경우를 종종 보아 왔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그와 같은 모습들이 일어날 때, 나름 열심을 낸다고 하는 이들이지만 마음의 중심까지 흔들리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그래서 생각해 보길 원한다.


| 과연 성도들은 목회자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의 설교를 듣고자 몰려오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어쩌면 '목회자와 성도간에 신뢰관계가 세워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 스스로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부모들의 입에서 간혹 나오는 말이 있다.

"내 아들(딸), 이제보니 다 컸구나!"




어느 때에 이런 말을 하게 될까?

평소 자신의 자녀에 대해 아직도 어리다고 여기는 부모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녀가 하는 행동이 대견'스럽게 여길 때, 부모는 그 자녀의 행동을 보고서 '그가 이제는 어른이 되었구나'하고 인정하게 된다. 즉 소년의 지역에서 장성한 자의 지역으로 경계를 넘어올 수 있음을 그 부모가 인정(admit)한 것이다. 평소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의 뜻대로만 행하려 했던 소년이 '웃 어른을 먼저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을 먼저 챙겨'주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 부모는 대견스럽다고 생각하고서는 그가 이제부턴 소년이 아니라 장성한 자로 여김을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된다.


자녀에게

장성한 자의 권위를 인정(부여)

한 셈이다. 


'나이가 성년이 되었으니, 저를 어른으로 인정해 주세요'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스펙이나 조건들을 보고서 나의 권위를 인정해 주세요'라는 것도 아니다.


내 행동을 보고, 

그 행동의 수준에 맞는 권위

인정해 달라

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만물이 이치인 셈이다. 권위는 '인정하게끔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인정받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던 목회자의 내용으로 되돌아 가보자.


| 목회자라는 경력을 내세워 성도분들을 향해 설교를 한다.

성도분들은 설교를 듣는다.

목회자의 설교 내용에 매력을 느낀 이들은 목회자에게 몰려든다. 다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은 목회자가 아닌 그분의 설교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설교의 내용이 참신하거나 경이롭다면서 목회자에게 열렬한 충성심까지 보여준다. 그러다 설교의 내용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수용할 수 없는 신학적인 내용이 담겼다는 구실을 대고는 언제그랬냐는 듯이 그 목회자의 곁을 떠나가 버린다. 마치 정치인을 지지하다가 자신의 이익에 불리하다 싶으면 다른 정치인을 추종하기 위해 떠나는 이들처럼.


설교를 듣겠다며 앉아 있는 허다한 성도들을 보고 있노라면 목회자 분들은 '아~ 저 성도분들은 나를 신뢰하는구나'하고 혼자서 김칫국을 마시곤 한다. 매우 흐뭇해 한다. 그러다 모두가 빠져나가 버린 그 빈자리들이 눈 앞에 펼쳐지게 되면, 목회를 그만두고 싶을 만큼 크게 낙심되는 게 현실이다.


성도가 많은 대형교회의 목회자라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고 어떤 모임 자리일지라도 청중을 휘감는 그런 말을 쉽게 하곤 한다. 또한 대형교회의 목회자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쪼그라드는 작은교회의 목회자 분들도 계신다. 왜 이런 걸까? 



물론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매우 많은 부분에서 그렇다. 왜 그럴까? 혹 목회가 아닌 '의자를 채우는 머릿수'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권위는 성도의 수 또는 교회의 규모와 같은 그런 양적인 요소로 구분되는 게 아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규모에 따라 행동했던 그 수준에 의해서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는다. 대형교회 목회자로서 더욱 겸손하며 더욱 헌신적인 모습을 보일 때, 그건 누구나 쉽사리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수준의 헌신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진솔한 모습을 본 이들은 그분의 성숙된 크기를 정하고, 그 만큼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 


"아~ 그럼 그렇지. 저분의 그릇이 다른 분들과 다른 건 분명해"

 

비록 작은교회일지라도 주변 이웃들에게 베푸는 헌신의 모습이 역시 쉽사리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그 목회자 역시 주변 이웃들은 감동하며 말할 것이다.


"그럼 그렇지. 저분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돌볼 수 없지"


이같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 평가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권위를 그 목회자 분게 안겨줄 것이다. 이것이 성숙된 자로서 그의 수준에 맞는 또는 믿음의 분량에 맞는 영적 권위를 인정받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성도는 직업의 귀천을 떠나 

'자신의 삶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말의 무게를 새삼 깨닫게 될 줄로 믿는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일4:20b.새번역)


현실의 삶에서도 성실하지 않은 이가 휴거된다거나 혹은 천국에 들어갈거라 믿으면, 그건 매우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의 하루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런 주님의 성도가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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