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법을 계속 만들고 개정하고 있는 이유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평소에 법을 어기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 그런 이들은 어떤 삶을 사는 이들일까?
대개는 스스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려 하지 않고, 이탈을 하려 한다.
쓰레기를 지정된 곳에 버리는 게 아니라, 자기 편한 대로 버리려 한다.
주변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낮은 소리로 말해야 하는데, 자기 편한 대로 목청껏 소리를 낸다.
길을 걷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침을 뱉어선 안 되지만, 자기 편하자고 아무대나 침을 뱉어댄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선진국 시민으로서의 시민의식이 부족한 자'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의식 수준이 낮은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자기 편할 대로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함부로 행동한다.
이를 두고 정부는 '의식 수준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여기고, 계몽운동을 일으킨다. '교육' 수준을 높여서 배움의 수준을 향상시켜,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그 결과 어떤 순간에 어떤 장소에 있더라도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여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판단을 통해 행동하고 말한다. 그와 같이 행동하는 이를 두고 우리는 말한다.
'그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
| 의식 수준이 높은 이들이 많은 사회는 굳이 개인의 행동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
추가적인 법 제정을 따로 하지 않더라도 시민들 스스로가 잘 어울려 지내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그래서 별다른 탈 없이 서로간에 잘 지낼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된다.
하지만 의식 수준이 낮은 이들만 있는 사회에서는 매순간 그리고 상황이 바뀔 때마다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제한해야 한다. 이것은 할 수 있고,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그런 가이드라인을 늘 제시해 줘야 한다. 그래야만 겨우 별탈 없이 지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결국 그런 이들에게는 스스로 호흡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생활에 대해 가이드라인이 제시될 수도 있다. 마치 로보트가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는 소프트웨어가 없이는 스스로 행동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더 많은 법을 제정하고, 더 많은 부분에서 개인의 삶을 제한해야 한다'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조차도 쇠창살 안에서 키워지는 것보다는 쇠창살 밖 더 넓은 지역에서 키워지기를 바랜다. 하물며 인간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다.
감옥이라는 곳과 일상의 삶터의 차이가 행동을 제한하는 수준에서 현저한 차이를 갖는다. 자유를 제한하는 부분은 그런 측면에서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자칫 섣부른 제한은 처벌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가진 적토마라 할지라도, 최소한 한 사람에게만은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적토마는 명마(名馬)라 불린다.
그런 의미에서 #명마란 출중한 능력을 가져야 하겠지만, 반드시 특별한 누군가에게만은 길들여진 상태여야 한다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법 없이 자유를 주장하면 그것은 방종을 의미하지만, 법 안에서 허용되는 자유는 진정한 조화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정부는 개인의 삶을 최소한의 수준에서만 제한할 수 있는 그런 법을 제정해야 하는데, 그러한 정부를 가리켜 ' #최소정부 '라고 한다.
이는 세계적인 경제학자 하이에크가 강력하게 주장하던 내용으로서 '극심한 기아로 인해 국가의 경제가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중국'을 극적으로 되살린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아사 직전에 있던 그 거대한 덩치를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스스로 행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다. '가난은 임금님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처럼, 중국인 스스로가 일자리를 만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중국에 자유주의 시장 개념이 허용된다. 최소정부의 개념을 소개하면서 최소한의 부분에서만 국가가 시민들의 경제활동에 개입을 하고 나머지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가운데 물가 조절 및 거래 등의 경제활동은 시민들 스스로가 일궈나가도록 제안하였고 하이에크는 등소평에게 제안하였고 등소평은 이를 수용한다.
그러자 사회주의 이념 안에서는 누군가 시킬 때에만 일을 하던 중국인들이 누군가의 명령이 없더라도 스스로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물건 가격을 정하는 것과 물건을 판매하려는 부분에서도 심열을 기울이고 더욱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인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물론 중국과 무역을 허용했던 많은 서방국가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최소정부의 형태가 세계의 역사상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개념이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데 있어서 어떤 사상으로 접근하느냐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고대 역사를 보면 왕이 다스리는 동안에도 이러한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등소평의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경제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여전히 시민의 자유를 극심하게 억압한 흔적이 뼈아프게 남아 있지만.
그래서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싶다는 자신의 야망을 품은 자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겠다. 민심을 등에 업고 진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왕의 씨가 어디있느냐'는 말로 군중들을 선동했던 유방이 결국 집권 후에는 '유씨 만이 왕의 씨다'는 사상을 퍼뜨렸던 것은 역사를 아는 이들은 새겨들어야 할 줄로 믿는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달라진다'는 속담처럼, 집권 세력에 의해서 억압을 받던 당시에는 진리에 따르는 말과 행동을 하다가 집권 후에는 진리를 벗어나 사리사욕에 이끌리어 국정을 운영하는 그런 경우가 문제라 할 수 있겠다.
누군가 '당신은 잘못되었으니, 이 길을 따르세요'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국정을 운영하는 이들부터서가 스스로 준법의식을 갖춘다면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로서 어찌 본받지 않을까 싶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이치의 말처럼, 나라의 지도자가 맑으니 그 국민들 역시 맑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겠다.
허나 국민들에게서 맑은 물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워서 국가는 더 많은 법을 제정하고 더 포괄적인 의미로 확장된 개정안들이 속속 입법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윗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이 깨끗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 게 순리이지 않을까?
'나쁜 개는 없다. 다만 나쁜 견주는 있다'는 것처럼, 견주가 잘못된 환경을 제공하였기에 나쁜 개가 되었을 뿐, 본래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만 있다면 결코 나쁜 개가 되지 않는다. 반려견의 행동을 바꿔주는 그런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 역시 자신들의 역할에 소홀히 한 것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성경은 '(율)법을 없애고 자유를 만끽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율)법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할 공중도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 데 너무 소홀히 해 왔다. 그리고는 '성공하는 비법'에만 눈독을 들였다. 이러한 풍조를 ' #기복신앙 '이라고 한다. 신앙인으로서 이웃을 위해 (예슈아의 가르침을 따라) 행동하는 게 우선일 텐데, 교회의 설교는 그렇지 못했다. 먼저 성공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 성공을 발판으로 획득하게 된 '권위'가 있을 때,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설교했다.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했다.
내 자녀가 최우수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내 자녀가 항상 1등을 하게 해 달라고.
내 남편이 가장 많은 돈을 벌게 해 달라고.
내 남편이 가장 높은 인사가 되게 해 달라고.
결국 그런 기도에 집중하다 보니, 자신의 주변에는 어느덧 '경쟁자들'만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놈도 경쟁자고
저 놈도 경쟁자였다.
이 놈을 이겨야 했고
저 놈도 이겨야 했다.
신앙은 그렇게 '사랑'보다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의식수준만 높이는 방향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앙심이 깊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그의 주변에는 소탈한 속내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 하나 남지 않게 되었다. 신앙인이 일상의 삶에서는 섬김과 헌신으로 소외받은 이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신앙인은 섬김과 헌신을 배워 본 적이 없었다.
(율)법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쓰레기로 어지러워지고, 그러면 신앙인이 그곳을 깨끗하게 치워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더러움과 악함이 더 이상 자리잡지 못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경쟁만을 배우다 보니 섬김과 헌신을 어느 세월에 배웠겠는가? 그런 상태로 세상에 나가보았을 때, (경쟁심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먼저 앞서갔다. 그리고 지나간 뒤 어지럽혀진 그것들을 세상 사람들이 어련히 치워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출세하기 전까지는. 그러나 그들도 치우지 않았다. 그러자 세상에는 더러움이 점점 차 오르기 시작했고, 더러움이 모이자 그곳에 악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세상은 그렇게 더러워져 갔고, 그렇게 악해져 갔다.
| 교회는 성도들에게 섬김과 헌신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섬김과 헌신을 가르쳐서 자신들이 살아가야 하는 그 삶의 현장에서 마땅히 행할 수 있도록 강하게 훈련을 시켜야 했지만, 그런 메시지를 설교에 담게 될 경우 그 교회를 떠날 거라는 두려움에 설교자는 그런 설교들을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이제부터라도 섬김과 헌신, 배려와 용서 등의 것들을 실제 삶에서 행할 수 있도록 설교에 메시지로 담아내야 할 것이다. 요셉이 감옥으로 내려갔듯이 먼저 낮은 자리로 찾아가는 그런 신앙인의 모습을 회복시켜야 하리라. 그리하면 야훼 하나님은 그를 들어 올리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것이다. 야훼 하나님이 강제로 들어 올리는 일(휴거; rapture)이 있을 것인데, 이는 주변 사람들이 그의 성품을 이미 인정할 수 있을 때 일어나게 될 것이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존경할 수 있는 자 또는 주변의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자를 주님은 들어서 사용하신다. 요셉이 감옥 안의 죄수 신분에서 패권국가의 총리 신분으로 격상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성도 자신이 잘 되는 법에 치우친 설교'는 잠시 내려 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코로나 바이러스의 역풍' 속에서 힘들어 허덕이고 있는 이웃들에게 힘과 용기를 전해줄 수 있겠는지, 그것을 위해 어떤 헌신과 어떤 배려 등을 베풀면 되겠는지 등에 관한 내용들을 설교의 메시지로 삼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특정한 세력들이 교회(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할지라도, 당신에게서 섬김과 헌신 그리고 배려와 사랑을 받은 당신의 이웃들은 여러분들을 고난 가운데 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들을 지키는 든든한 성벽이 될 것이며 여러분들을 세워주는 반석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여러분을 대적하는 그들이 여러분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그래서 여러분들이 안전하게 지켜지는 그런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우리는 율법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율법은 우리 삶의 최소한에만 개입하시는 주님의 모습일 뿐, 우리는 내 자유를 주님의 즐거움을 위해 스스로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런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정부의 법이 없더라도 아름다운 사회를 세우는 밑거름이 될 때, 그런 밑거름을 먹은 사회는 분명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겠는가? 그 국가 역시 작은 정부가 되어 모든 시민들이 최소한의 법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런 나라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나라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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