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주께서 슬퍼하시며....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6:6.흠정역)
'슬퍼하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atsab(עָצַב)이라 한다. 이는 'displease'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to hurt, pain, grieve'이란 뜻을 갖는다. please라는 단어는 '제발'(도와주세요) 또는 '부디'(간청합니다)라는 단어다.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의 상태 또는 성경 속 표현으로 바꿔 말하자면 '상한 심령에서 나오는 갈급함'이 잘 묻어 있는 표현이다.
그런 표현의 단어를 조금만 바꿔 'pleased'라고 하면, 이것은 (특별한 대상이 채워짐으로 인해)'기뻐하는' 또는 '만족하는'의 뜻이 된다. 그래서 displease라는 의미는 특별한 대상이 채워지지 못하여 겪는 슬픔과 고통 그리고 내적 상처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영어의 표현으로 히브리 원문에 있는 atsab(아짜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알고 있는 atsab의 의미다. 만일 이것으로 끝이라면 오늘의 나눔은 그다지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숨겨져 있던 신비로운 의미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 창세 당시
범죄한 여자(하와)에게 야훼께서 주셨던 고통이 있다.
(창3:16a.흠정역)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children;
(KJV)
| 본시 고통과 수태는 서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창3:16에서 고통과 수태는 하나가 된다. 하지만 창3:16에서 고통과 수태는 하나가 된다. KJV에서는 (내면의 고통으로서) 'sorrow'와 (잉태 중에 겪는 육신의 고통으로서) 'in sorrow'로 나뉘어 표현했는데, 히브리어의 표기 역시 다르다.
sorrow는 'itstsabon'(עִצָּבוֹן)
in sorrow는 'etseb'(עֶצֶב)
※ sorrow는 슬픔으로서 내적 고통을 그리고 pain은 육체의 고통을 의미한다.
NSA 버전에서는 in sorrow를 'in pain'으로 바꿔 표현하고 있다. 이를 좀더 쉽게 표현해 보기로 하자.
아담(Adam)을 지으신 과정을 보자.
⊙ 흙으로 지으신 사람을 Adam이라 했다.
⊙ 그리고 생기를 불어 넣자 (생령이 된) Adam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태초에 창조된 고통이 있는데 그것을 'itstsabon'(עִצָּבוֹן)이라고 말하고 sorrow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내적 고통을 수태(受胎라는 과정)에 불어 넣자 'etseb'(עֶצֶב)이 되었고 그것을 pain이란 표현으로 바꿔 말한다.
⊙ (내적)고통은 'itstsabon'(עִצָּבוֹן)로서 sorrow라 말했다.
⊙ 그리고 (내적)고통을 (육적인) 수태에 불어 넣자 'etseb'(עֶצֶב), 곧 pain이 되었다.
그래서 Adam이 생령(living being) Adam과 다르듯, sorrow는 pain과 다르다.
하지만 이 두 고통은 분명 atsab(아짜본; עָצַב)에서 파생되었다.
⊙ atsab(아짜본; עָצַב)
⊙ 'itstsabon'(עִצָּבוֹן)
⊙ 'etseb'(עֶצֶב)
모두 'עצב'이다. 즉 야훼 하나님께서 땅에 사람을 지으신 후 '슬퍼하셨다'는 마음을 담은 단어가 '여자(하와)에게 고통과 수태를 더하신 pain(not sorrow)'과 같다는 의미다. 이는 고통이 없던 어떤 일련의 과정에 고통을 넣으신 것을 뜻한다.
| 이를 좀더 사실적인 내용으로 바꿔 말해 보기로 하자.
여자(하와)에겐 출산의 과정이 있었지만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출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어떤 변화가 생겨났을까? 어머니들은 흔히 말씀하신다.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라고. 그런 자녀를 어떻게 대하던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신다.
아담은 수고하지 않고도 소산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고를 해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다. 땀을 흘려야만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어떤 변화가 생겨났을까?
고생하지 않고 돈을 벌 때 우리는 불로소득(unearned income)이라 말한다. 즉 수고하지 않았는데 받은 대가다. 초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이들의 삶이 어떤 결말을 맞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오히려 그의 삶이 망가진다. 수고하지 않았는데 받는 돈은 가치 없이 여기고서 헛된 곳에 사용해 버린다. 반면 혼신의 땀을 흘려 번 돈은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처럼, 땀을 흘려 돈을 벌게 될 경우 우리는 그 돈을 매우 귀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까지 얻게 된다.
어떤가?
단순히 고통(sorrow)이 있었는데, 그 고통이 우리 삶에 개입되어 우리에게 고통(pain)을 안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고통(pain) 속에서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소중한 마음'을 갖게 된다. 즉 고통의 과정을 통해 얻었던 그것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을 얻게 된 것이다.
| 자! 이제 야훼 하나님께서 슬퍼하셨던 상황으로 되돌아 가보자.
사람들이 지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하고(창6:1a)...(중략)...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6)
이들의 생명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천년을 사는 시대다. 소위 '천년 왕국의 시대'였다.
※ 천(thousand)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는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을 뜻한다. 반면 만(ten thousand)는 (인간은 불가능하며) 오로지 '전능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수준, 곧 무한의 경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천년 왕국이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불로소득이 총 집중된 시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최고의 수명과 최고의 기후 조건, 그리고 안락함이 있는 삶을 거저 받았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 것들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욕심과 끝없는 욕망을 탐닉하는 부분에만 집중할 뿐, 거저 주신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그래서 야훼께선 인간에게 고통 없는 인생을 주신 것에 대해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신다. 마치 Adam을 창조했으나 홀로 있던 그를 보시고 '홀로 있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여기신 그 감정을 다시금 품으신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창2:18a.흠정역)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여기신 것은 후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개선이 아닌) 더 나은 단계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에 있던 이들을 이끌어 가나안 땅으로 옮겨주신 것과 같다. 야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던 (이방인의) 무리들을 이끌어 경배할 수 있는 삶으로 이끄시는 그 모습이 바로 '좋지 못하다'고 느끼신 감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이 바로 '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라는 문장 속에 깃들어 있는 야훼 하나님의 감정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23:19a)의 말씀이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창6:6)의 말씀과 서로 적대시 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더욱 견고하게 지지해 주는 말씀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모습 가운데 그릇된 것이 있다면, 물질만으로 자녀를 키울 수 있다고 여기는 자세다.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부모는 자녀에게 물질만을 제공한다. 그리고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녀는 다르다. 돈만 휫 던져주고서 자리를 떠버린 부모의 빈자리를 보면서 자녀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은 사랑이라 여길 수 있을까?
그렇게 제공되는 사랑은 어떤 자녀도 만족시킬 수 없다. 그 사랑을 경험한 자녀들 가운데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고 여기는 자녀는 하나도 없다. 대신 자녀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실수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무엇인가를 함께 일궈나가는 그런 일상의 삶들이 서로 공존할 때 자녀는 사랑을 느낀다.
그래서 부모지만 자녀를 통해 얻는 기쁨만을 바란다면 그건 참된 부모의 자세가 아니란 의미가 된다. 자녀를 대하는 부분에서 부모에게 '책임'이라는 고통(pain)이 전가될 때, 그 고통스러움을 잘 견뎌내는 부모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며 그 자녀는 부모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고통(pain; atseb)은 사랑을 완성시키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119:71a)
그렇기에 야훼 하나님은 천국 왕국을 완성시켜야 하는 단계에서 '유일한 해법'을 시도해 보시고자 계획을 품으셨으니,
그 마음은
'슬퍼하시다'(sorrow; atsab)로 표현된 히브리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젊은 부부의 사랑이 완성된 사랑이 아니라, 온갖 희노애락을 겪어 오면서 '배우자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진정한 마음'이 생긴 어느 노부부의 사랑이 오히려 아름답고 완성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 하겠다.
|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편리지상주의'에 빠져들기 쉽다.
조금만 불편하더라도 불쾌함을 느끼고, 스스로 노력하기를 거부하는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내가 오늘 무슨일을 하면 즐거울까?'라는 고민조차도 하기 싫어서 그 고민을 기계에게 맡기려는 시대다. 4차 산업혁명은 AI 주도로 인간이 관리를 받는 산업구조가 된다는 의미다.
이건 어떤 특정한 악한 집단이 강제로 이끌어가는 시대적 흐름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땀흘려 정당한 대가를 받기보다는, 힘들이지 않고 값비싼 것을 벌겠다는 요행의 마음에서 비롯된 시대적 변화다. 자녀를 양육하는 데 돈만 주면 다른 이들이 알아서 키워주기를 바라는 그런 부모의 마음이 인공지능 개발을 부추긴 것이다.
자녀를 위해 쏟아야 할 시간이 남게 되자,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남는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유익하게 보내는 걸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삶을 위해 자기개발에 남는 시간을 쏟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누구나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기업에 '충분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자에게만 입사의 기회가 주어지듯,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에게만 주님의 나라는 입국을 허락한다. 그곳이 천국이 될테이며, 휴거는 그곳으로 가는 방식일 것이다. 따라서 '누가 휴거될까요?'라고 묻는다면, 그건 당연히 '주님의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자'가 휴거의 대상이 될거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야훼 하나님은 천년의 시간을 '자기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데 소진해 버린 세대'를 악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그런 이들에게 '타인을 생각할 수 있는 고통(pain)'을 안겨주고자 했다.
우리는 그 고통을 '책임'이라 말하고, 그 책임은 성경 속 표현으로 바꿔 '기름부음'이라고 말한다. 기름부음은 자기의 영광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용되는 게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섬기는 '헌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타인을 위해 버릴 수 있는 자'(헌신)에게 천국은 입국을 허락할 것이다.
야훼 하나님의 슬퍼하셨던 그 마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도 깊이 있게 새겨질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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