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를 설명하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휴거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면 그는 에녹과 엘리야 선지자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 기록된 내용에서는 #휴거 #rapture 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데려가다'라는 표현만을 그 근거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다'는 표현 중에 '데려가다'는 표현은 어떤 히브리어로 사용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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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24에 기록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다'는 부분에 '데려가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Laqach(לָקַח)로 표현되어 있다. 본래 '취하다 또는 데려가다'라는 뜻의 laqach는 여러 의미로 해석되었는데, 그 의미들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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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다양한 의미들로 번역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번역들은 우리들이 이미 소지하고 있거나 혹은 또다른 번역본의 성경에 이미 수록된 표현들이다. 눈여겨 볼 표현들로는
bring, capture, caught, take, select, seize
등을 들 수 있다. 이때 '휴거'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신약성경의 구절을 보면, 단연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이다.
여기에서 '끌어 올려지다'caught up는 표현을 두고 '휴거'(rapture)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휴거란 '위로 끌어 올려지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런 중에 엘리야 선지자의 경우,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 2:11)에 기록된 것처럼 '하늘로 올라갔다'alah는 표현으로 설명되었으니 휴거로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상황이다.
하지만 에녹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는 '땅에서 하늘'로의 이동으로 설명되진 않았다. 단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다'는 표현만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빌립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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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자.
#에티오피아_내시'와 빌립이 만났고, 이사야서의 내용을 설명한 후 내시는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한다. 물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빌립은 내시를 붙잡고 세례를 베푼다.
하지만 침례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물에 들어가는 입장에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물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아울러 에티오피아 내시는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자'로 묘사된다. 따라서 매우 높은 고급 관리로서 어쩌면 요셉과 같이 여왕 다음의 2인자로 간주될 수도 있는 그런 인물이다. 그렇기에 세례가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차원에서 세례현장을 지켜보는 보디가드들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의 눈길에도 포착되지 않은 채 빌립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갔다'는 표현처럼, (인간의 통제 수단을 뛰어넘는) 강한 힘에 의해 강제로 옮겨진 것이다.
| 빌립은 하늘로 향해 옮겨졌을까?
그렇지 않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아스돗)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8:39~40)처럼, 물이 있던 사막의 어떤 장소에서 아스돗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것은 수직이 아닌 수평방향으로의 이동을 기록하고 있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갔다'는 표현은 harpazó로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휴거의 상황을 설명하는 '끌어 올려지다'(살전4:17)는 표현과 동일한 헬라어다.
곧 데살로니가전서 4:17에서는 '하늘방향으로의 이동'이 있었지만, 사도행전8:39에서는 '사막에서 도시로의 수평이동'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 단어가 휴거를 설명하는 #하르파조 #harpazo 였기 때문에, 이 두 상황을 적절하게 합한다면 보다 정확한 휴거의 설명이 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와중에 에녹의 휴거는 하늘로 인지 혹은 땅으로 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단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다'라고만 서술되어 있다. 그 표현은 히브리어 laqach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Paul Lehr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장차 오실 예슈아는 신앙인들에겐 신랑이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신부다. 장차 일어날 휴거의 현상이 야훼 하나님의 뜻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면, 이는 반드시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에 의해 미리 알려졌다고 여기는 것이 옳다고 본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3:7
선지자들을 통해 보이셨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속 또다른 기록들을 통해 '휴거'의 상황을 보다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신부를 데려오기 위한 시도와 야훼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동행하던) 에녹을 데려가신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그분의 은밀한 계획'이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삭의 신부로 취해진 리브가와 엘리에셀의 여정을 살펴보면 매우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 수 있다.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창세기 24:61~62
이삭의 신부가 되기 위해 엘리에셀을 따라 가던 리브가는 네게브 지역에 다다른 것이다. 그 많고 많은 지역 중에 왜 하필 네게브(광야) 지역으로 가야만 했을까? 앞서 설명했던 아브라함의 '애굽에서 네게브로 올라가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매우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창13:1
'애굽에서 네게브로 올라가다'는 표현은 엘리야가 휴거되던 상황을 설명하던 히브리어 'alah'(עָלָה)로 기록되었다. 그 의미는 아브라함의 행보 역시 '전능자에 의해 강권적으로 옮겨진 상황'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고, 그렇게 해서 휴거된 지역은 다름아닌 '네게브'다.
' #왜_네게브_광야였을까? '라고 질문한다면, 그곳에는 땅의 신부를 맞이할 '하늘의 신랑'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부 리브가를 맞이하려던 신랑 이삭은 네게브에 거하고 있었던 것이고, 리브가 역시 아버지의 종, 엘리에셀을 따라 걸어갔던 종착지가 네게브 광야였던 것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창24:67a
이삭이 신부 리브가를 맞아 들인 곳은 '어머니의 장막'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침을 하여 아내로 삼았다.
| 어머니 사라의 장막은 누가 만들어 준 것일까?
남편이 마련한 장막tent에는 두 공간이 함께 공존한다고 한다. 장막의 입구 부분은 손님 접대와 같은 목적을 위해 마련된 남자의 장막이 되고, 그 뒤에는 아내를 위해 마련된 여자의 공간이 있다고 한다. 여자의 공간은 남편 이외엔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므로 지성소처럼 커튼에 의해 가려진 신성한 곳이라고 한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18:10)의 내용은 그런 의미에서 이해가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사라가 일부러 엿듣고자 노력한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은 사라가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그런 곳에서 고의적으로 들리게끔 그러한 예언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1년 뒤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언급은 사실 아브라함보다는 경수가 끊어져 버린 사라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11:32)는 사실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12:4b)는 두 사실을 토대로 짐작해 볼 때, 데라가 죽자 마자 장례 후 곧바로 하란을 떠났다고 가정하면 데라와 아브라함간의 나이차는 130세다. 곧 아버지 데라는 13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 따라서 100세의 아브라함이 자녀를 낳는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경수가 끊어진 나이든 여자의 경우는 지극히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추정할 때, 창18:10의 야훼의 약속은 사라를 겨냥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후에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할 예정이다.
이같은 사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 사라의 장막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만들어준 장막이라는 내용이다. 고로 아들을 위해 마련된 장막이라는 의미는 '어머니의 장막'을 아들이 물려받아 자신의 아내인 리브가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느냐고 이해할 수 있겠다.
| 엘리야의 alah와 에녹의 laqach는 모두 휴거를 가리킨다.
엘리야 선지자의 휴거(엘리야의 alah)처럼 아브라함 역시 네게브 광야로 옮겨졌(아브라함의 alah)는데, 그 네게브 광야는 신랑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 네게브 광야로 인도함 받는 신부는 (성령의 예표인) '아버지의 종'에 이끌리어 택함받은(리브가의 laqach) 자다. 그렇게 택함받은 것을 우리는 '휴거'(laqach)라는 사실로 인지할 수 있겠고, 그 휴거(laqach)는 에녹에게서도 동일(에녹의 laqach)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정리하자면 엘리야와 에녹은 휴거라는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거론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휴거를 표현하는 히브리어는 alah와 laqach로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 두 사실은 결국 하나의 사실을 가리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그것은 휴거였다.
엘리야의 alah
▶ 네게브로 올라간 아브라함의 alah
▶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의 거처, 네게브
▶ (신랑)아버지의 종에 의해 네게브로 인도된 택함받은 신부의 laqach
▶ 에녹의 laqach
alah가 laqach와 결국에는 같은 의미(휴거)를 가리키고 있음을 이와같이 설명할 수 있다.
엘리야의 휴거(alah)와 에녹의 휴거(laqach)가 같다는 것을 설명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휴거에 관해 보다 상세한 설명까지 가능해 졌다고 생각된다.
휴거는 땅에서 하늘로의 들려짐을 의미할 수도 있겠으나, 리브가가 신랑을 찾아 주인의 종(성령)에 이끌리어 다른 지역으로 옮겨진 사실 역시도 휴거를 설명하는 또다른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 하늘이 아닌들 어쩌하리, 땅인들 어쩌하리요.
우리가 들림받게 될 그곳에 신랑 예슈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그 휴거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의 들림받음은 신랑 예슈아가 계신 그곳으로의 옮겨짐(bring)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하리라.
그렇기에 리브가가 주인의 종(성령)에 이끌리어 신랑 앞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휴거 받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에 더욱 매진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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