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누구에게 필요한 것일까? 유대인? 아니면 이방인?

| 복음, 곧 기쁜 소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제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1:14~15.흠정역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부분으로서, '회개와 복음'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이 이렇게 선포되었다.

그럼 이는 누구를 위하여 선포되는 것일까?


주는 의미없는 일을 하지 않으시며, 주가 주신 Torah는 과녁을 정확하게 겨냥(yara)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복음이란 '특별한 대상과 반드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야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는 계획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는 이가 있다. 그는 사도 바울이다.

Torah, 곧 모세오경(과 선지서 등을 담은 구약성경)에 능통한 성경학자 중의 학자이면서 인간의 시점을 벗어나 성경을 주신 이의 시점에서 성경 속 예언들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된 그가 복음에 대해 설명하기를,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롬11:28.새번역)


복음에 관하여 이야기해 볼 때, 복음이 유용하게 작용한 이들은 이방인(Gentile)들이다.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son of God)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계기로 복음은 작용하고 말았다.


만일에 복음이라는 것이 애시당초 선포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이방인은 복음이 선포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된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왕국의 복음은 선포되었다. 야훼 하나님의 거의 일방적인 계획이라 표현하는 게 옳을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선포되었다.


또 [하나님]께서 믿음(faith)을 통해 이교도들을 의롭게 하려 하심을 성경 기록이 미리 보고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되 , 네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갈3:8.흠정역)


이방인에게서 믿음(faith)을 보신 후 그들을 의인이라 인정해 주시려는 계획을 아주 오래 전부터 세우셨고, 성령께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셨다. 당신의 계획에 아브라함이 동참해 주겠느냐고.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7:2~3.개역개정)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참의사를 밝힌 아브라함은 '야훼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그 땅'으로 정처없는 유랑생활을 떠났다.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당시에는 씨족사회의 일원이었기에 아브라함은 그 지역의 이방인(낯선 사람; stranger)이 아니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정처없이 떠도는 인생이 되다보니 그가 가는 곳마다 그는 이방인의 취급을 받게 되었다.

포스트 코로나 이후에 급변한 사회적 정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한층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족간에는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11월 13일을 기점으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 되었다. 낯선 사람은 외지인 또는 이방인이라 표현된다. 깊은 산 속에 몇 가구 되지 않는 마을이 있다 할 때, 그곳에 찾아든 외지인이 있다면 마을 주민들은 그 외지인을 어떻게 대할까? 


외지인에게서 위험요소가 없다, 곧 외지인이 적대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방문을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적대적인 자, 곧 해적이나 산적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마을 주민들은 힘을 합쳐 그를 내쫓거나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이처럼 낯선 사람이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입장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같은 역경의 삶을 선택하였다.


어떤 마을에 낯선 이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서 말한다.

"내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좀 나눠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집주인은 문을 열고 문 앞에 서 있는 외지인을 쳐다 본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 줄 어찌 알고 내가 당신을 내 집에 들어오도록 모시겠소? 어림없는 소리말고 냉큼 저리 가시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어떤 이는

"먼 길을 걸으시느라 무척 힘드신 것 같아 보이는 군요. 편안한 집은 아닐테지만 들어와서 좀 쉬십시오. 내가 속히 먹고 마실 것을 내 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외지인을 집 안으로 영접하는 이 역시 있을 것이다.


얼마나 먹고 마셨을까? 외지인의 주렸던 배와 갈급했던 목이 생기를 찾게 되자 집 주인을 향해 함께 자리에 앉아줄 것을 부탁한다.

"저는 아주 먼 곳에서 특별한 소식을 전하고자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답니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는데 먼저 나쁜 소식을 전해 드리지요. 이 세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멸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멸망받지 않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소 황당하기도 하면서 몹시 궁금하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평소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마을 주민에게는 너무 황당하게 들릴 것이 당연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외지인이 전하는 말에 오히려 불쾌한 감정이 생겨 외지인을 곧장 집 밖으로 내쫓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지인의 말에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는 다가올 세상의 종말에 대해 크게 슬퍼하고 두려워하면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 내용을 들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할 것이다. 외지인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명에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이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외지인의 모든 말을 부인하게 될 것이다. 반면 외지인이 전해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마음으로 영접하는 이는 더 이상 집 안에 머물러 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집을 나와 그 역시 외지인의 삶을 자청하며 살아갈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자신처럼 구원의 길 역시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롬11:28에 기록된 '하나님의 원수'라는 부분에서 원수는 헬라어로 ἐχθρός, ά, όν(echthros)인데 히브리어로는 'שנואים'이라 표현되고 'hated, dislike'의 의미를 갖는다. 왜 (하나님의) 원수라는 표현에 'hated'(미움받는), 'dislike'(싫어하는)이라는 의미가 속하게 되는지 이제는 이해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원수가 된다는 의미는 '마을의 안정적인 주민'이었던 자가 '외지인 또는 낯선 자'로 신분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슈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원수는 'devil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마5:44a)


이때의 (너희)'원수'는 역시 롬11:28의 표현과 동일하게 ἐχθρός, ά, όν(echthros)가 된다. 그렇기에 예슈아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개역개정)


내 집의 문을 두드리는 낯선 이방인(외지인)을 통해 복음의 전파, 구원의 길이 전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낯선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율법의 요구를 정확하게 들어줄 수 있는 지 또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12:3a)


낯선 이방인의 신세로 전락해 버린 아브라함을 어떻게 해야 축복할 수 있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를 저주하는 것인지 어찌 알 수 있겠느뇨 마는. 성경은 우리에게 정확하게 알 수 있게끔 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내가 사랑받고 싶거나 혹은 대접을 받고 싶은 수준이 있을 것이다. 그 만큼 낯선 이방인에게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만큼 각양각색의 사람에게 정확히 지시할 수 있는 표현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리 사정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다 할지라도, 성경말씀은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그 기준을 향해 기록하였다. 그러자 모든 이들은 각자의 분량에 따라 능히 낯선 이방인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섬기고 나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을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b)


낯선 이방인이었던 그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모든 이방족속들'(열방; all nations)에게 구원의 기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22.개역개정)


그렇기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는 복된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런 귀를 가진 이가 과연 몇이나 될 수 있을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중략)...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개역개정)


'적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들을 귀를 가졌다고 하지만 듣고 행함까지 이어져야 하는 상황까지 있는데, 행하는 그 상황이 그리 만만하지 않는다는 게 제일 큰 문제일 수 있다. 넓고 편한 길을 놔두고 '좁고 협착'한 곳을 어느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식을 스스로 거부하고서 기꺼이 '좁고 협착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그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성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말씀하시는 분에 대해 신뢰(faith)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 셈이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그는 분명하게 생명의 문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belief with faith)을 지닌 성도다.


그래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들려주는 그 말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을 듣는 것과 더불어 그에게 은혜로서 부어지는 믿음(신뢰; faith)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게 사도바울이 전하고 하는 말(갈3:8)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faith)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롬10:17.새번역)

또 하나님께서 믿음(faith)을 통해 이교도들을 의롭게 하려 하심을 성경 기록이 미리 보고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되, 


네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갈3:8.흠정역)


그래서 복음을 받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방인이 유대인을 향해 자랑하듯 말하려는 그런 상황을 사도 바울은 미리 염려하고 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11:18~20.개역개정)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전달될 수 있던 것은 '가루가 거룩한 즉 떡덩이도 그러하고...'라는 말씀처럼, 이미 유대인은 복음을 담을 수 있을만큼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이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는 물음에 우리는 간략하게 답할 수 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중략)...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11:13~14.개역개정)


이스라엘을 미전도 종족으로 분류하고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달려들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율법을 더욱 온전하게 하려는 그런 삶'(마7:12)을 살아가면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더욱 힘써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만 한다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이방인을 보는 그 이스라엘은 어찌 당황하지 않겠는가? 분명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그 이방인을 향해 시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삼하6:12.개역개정)

※ 오벧에돔(Obed-edom; servant of Edom)은 아낙자손이 불리는 가드사람(Gittite)으로 소개된다. 

A Gittite to whose house the Ark was taken when removed from that of Abinadab in Gibeah.


이방인과 함께하는 성령님을 볼 때, 한때는 두려워했던 이를 이제는 기쁨으로 메고 자신의 성 안으로 모셔가고자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니 애써 유대인을 개종시키겠다는 선교전략을 짜려 하기 보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실하게 행하기만 하면 그 모든 소식이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의 귀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야훼의 영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실 것이며 그로 인하여 야훼의 율례와 규례를 스스로 지켜 행할 수 있도록 주께서 친히 행하실 것(겔36:26~27)이라 믿는다.


복음(궤; the ark)은 이방인을 위한 것이며,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은 이방인의 소식이 유대인들에게 전해지게 되기를 야훼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나눔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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