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과 책망'(Torah)은 어떤 이에게 필요한 것일까?

성경이라는 단어는 본래 이스라엘의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단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나라 말 또는 영어권 언어에서 그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성경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토라(Torah)라고 말한다. 토라에는 2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야훼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모세의 글 또는 모세의 율법이라 불리는 토라가 있고, 다른 하나는 (모세의 토라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가 오셔서 들려주시는 '진정한 토라'(사2:3, 미4:2)가 있다. 이 토라는 마지막 때에 임할 주님의 말씀이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사야 2:3.개역개정


토라는 우리에게 가르침(teaching)을 주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훈계(Instruction)를 준다. 메시아가 들려주는 토라를 통해 Teaching과 Instruction을 받은 이들은 능히 의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이는 마지막 때, 예슈아의 신부가 되어 신랑의 집으로 인도함을 받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러한 teaching과 instruction은 과연 어떤 이가 받을 수 있는지를 나눠보고자 한다.

왜 이같은 의문을 갖는지에 대해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으리라. 예슈아를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나'(everybody) 해당되는 내용이라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느낀 영적 감동은 그렇지 않기에 그 사실을 나누려 한다. 혹시 조금이라도 오해함으로 인하여 예슈아의 신부로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하기 위해서다.


| 우리가 익히 아는 공자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자

그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순행하던 중에 겪은 일들 중 한 이야기다.

공자와 그 제자들이 길을 걷는 중에 길 가장자리에서 똥을 누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러자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을 시켜 '똥을 누는사람'을 잡아오게 한다. 그리곤 인간의 윤리를 바탕으로 그를 엄청나게 꾸짖는 것이다.

"사람이 개나 소, 까마귀 등과 같은 금수가 아닌 이상, 어찌 가리고 못 가릴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가? 길가에 똥을 누다니, 당신은 사람인가, 짐승인가?
공자의 교훈과 훈계를 듣던 그 사내는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매고 도망하고 만다.

그러고 얼마 후 이번에는 길 가운데에서 대담하게 똥을 누는 사람을 만난다.

제자들은 똥을 누던 그 사람을 잡아올 채비를 하고 있는데 아니 웬걸. 이번에는 "지금 길 가운데 똥 싸는 놈을 피해서 가자"라며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자들은 궁금했다.똥을 누던 자로부터 멀리 떨어지자 제자들은 공자에게 묻는다.

스승님, 길 한 가운데 똥을 누는 자를 왜 피해갑니까? 저런 사람은 길 가장자리에 눈 자 보다 훨씬 나쁜 자 아닙니까?
그 질문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 사람에게는 일말의 양심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길 가장자리에 똥을 눈 자는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기에 가르침을 주는 것이 그에게 유익할 수 있었지만, 길 한 가운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똥을 누는 자는 양심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그에게 가르침을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https://pixabay.com/ko/users/geralt-9301




공자의 이야기는 예슈아를 믿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본다. 성경 말씀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7:6.개역개정)
는 구절이 있다. 공자의 이야기와 성경 말씀을 비교해 보자면, 서로간에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겠다.

| 일말의 양심도 없는 자

곧 양심에 화인을 맞은 이는 '개와 돼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해 보자.
일말의 양심도 없는 존재(개)에게 토라(가르침과 훈계)를 준다해서 그가 토라의 길을 따를 없음을 알 수 있다. 먹을 것을 보는 순간 주저하지 않고 달려드는 돼지에게 인내의 삶 또는 인내함의 유익을 알려준 들 무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역의 산수몽(교육)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 " 규율을 견디는 아이가 있다면 그는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치고, 참을성이 없는 아이는 제자로 받지 말아야 한다."
  • " 집안의 형편(살림)이 어떠하더라도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 자식은 결혼을 시켜주고, 바람기가 있는 여자는 아내로 삼지 말아야 한다."


준비된 자, 곧 규율(율법; Torah)을 견딜 마음의 준비가 된 자는 토라의 가르침(teaching)과 훈계(instruction)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는 스스로 토라의 가르침과 훈계를 즐거이 따르게 되나니, 그런 자는 예슈아의 참된 제자(신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규율 자체를 수용(영접)하지 않는 자에게 어떻게 가르침과 훈계가 있는 제자의 삶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그러한 알려줌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 해야 준비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공자의 이야기에서 명확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양심을 따라 사는 자와 양심없는 자로 사는 자의 차이에서 알 수 있다.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자와 양심을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자의 차이가 바로 준비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다. 주님의 말씀(토라)는 오로지 양심을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온 자에게만 임하신다. 교회(공동체)에 출석한다는 이유로 예슈아의 신부가 되는게 아니란 뜻이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허울좋게 행동할지라도, 평소의 삶이 양심을 거부하는 자의 모습이었다면 그는 거짓된 삶을 사는 자다.

lebtahor.com


여러분.
성경책을 읽는다고 해서 주님의 마음(Heart of father; Leb)을 이해할 수 있는게 아니랍니다.
주님의 마음(Leb)은 양심(Leb; conscience)이기 때문에, 양심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4:2.개역개정)
어느 누가 지켜보고 감시하지 않을지라도 스스로 주님의 규율을 즐겁게 지켜 나가는 자의 모습을 살아가십시오. 오직 양심만이 여러분에게 능히 지켜 행할 수 있는 수준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 수준이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수준'이 될 것입니다. 

양심을 지키십시오. 양심을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양심의 소리를 듣고자 노력하십시오.
그 소리를 듣고 준행하면 분명히 믿지 않는 이들도 여러분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인정함은 증거가 되어 훗날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여러분을 의인이라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축복이 임하시는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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