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는 하나다.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값진 요소로서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보수와 진보는 하나다.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값진 요소로서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pixabay.com/ko/users/geralt-9301



| 기업들의 홍보 문구를 보면

어느 순간부터 유행하듯 삽입되는 문구가 하나 있다. 그것은 'since'다. 기업의 장인 정신을 내포하는 단어이면서 정직과 신뢰 등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역사적인 의미도 함축하여 담고 있다. 이 같은 자랑스러운 역사적 유산을 우리는 '정통성'(Authenticity)이라 말한다.

역사적 정통성을 당당하게 내 세울 수 있는 집단을

우리는 보수라고 부른다. 보수는 정통성을 무엇보다 우선시 하기에 '학벌이나 학연, 지연' 등에 큰 비중을 둔다. 그래서 소위 오랜 기간 동안 현존할 수 있는 그 상황을 설명할 때면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실력과 능력, 그리고 정직과 신뢰 등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그것에 고귀한 것에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볼 때에는 몹시도 '권위적인 모습'을 갖는 권위주의자로 행동한다.
그렇듯 보수는 변하지 않는 생활의 이치로서 '물은 위에서 아래 흐른다'는 사실은 그들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래서 권위에는 서열(order)이 반드시 전제되기에, 이러한 서열 구조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수직 구조'로서 표현된다.

반대로 진보(진보주의; Progressivism)가 있다.

보수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수가 우선시 되던 그 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을 변혁시키고자 노력하는 전진적(前進的)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특정한 집단 또는 특권층의 권위보다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고, 권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법(규칙)에서 정하고 있는 의무와 책임보다는 개인의 인권을 중시하다 보니 (의무와 책임이 배제된) 자유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짙어서 '방종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효율이라는 개념보다 분배와 나눔이 중시된 형평성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진보라는 개념은 권위가 아닌 내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들을 자신과 동일한 인격체로 여기는 사상이 중심이 되니, 이것은 '수평적 구조'로서 표현된다.

이들 사상의 단편적인 단점을 보자면, 권위에 의한 수직적 구조가 강한 사회에서는 억압과 속박 등의 모습이 많은데 반해 평등에 의한 수평적 구조가 강한 사회에서는 일탈과 방종의 모습들이 난무하게 된다. 두 사회 모두 시민들에겐 지옥과 같은 삶을 선사하다. 할 수만 있다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 사회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두 사상이 서로 상충하는 가운데 상대진영을 누르고서 자신의 진영만을 내세울 때 나타나는 사회적 모습이다. 이에 대한 교훈은 이미 수 천년을 지속해서 이어져 온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

'법치와 자유가 밸런스를 이룰 때'에서 나누었던 내용을 기억해 보자.



법치는 권위를 중시하고 자유는 평등을 중시하기 때문에 서로 상충된다. 하지만 서로 뗄래야 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둘간의 관계는 이율배반적이다. 하지만 법치와 자유의 관계를 청중들에게 큰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운동 경기로 바라봄으로써 멋진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법치가 자유를 낳을 때

또는

법치가
자유를 사랑으로 덮을 수 있을 때

법치 안에 자유가 설명될 때 또는 법이 허락하는 수준에서 자유가 보장될 때,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물론 경기를 바라보는 청중에게도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하게 된다.

이처럼 권위를 중시하는 보수와 평등을 중시하는 진보의 관계도 서로 떼어 놓고 둘 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보다는, 힘들지만 서로를 하나의 묶음으로 인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아름답고 활기찬 사회를 일궈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법치와 자유의 관계에서 처럼, 권위를 중시하는 수직 구조의 보수를 이 땅에 세운다. 그리고 그곳에 분배와 평등을 중시하는 수평 구조의 진보를 수직 구조의 보수 위에 덧붙인다. 다시 말해서 땅에 세워져야 할 사상은 권위를 중시하는 보수주의다. 진보는 땅에 세워진 보수 위에 덧입혀 하나가 된다. 이렇게 하나가 된 보수와 진보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십자가'를 이 땅 위에 만들게 된다.

pixabay.com/ko/users/congerdesign-509903



| 이는 성경이 말하는 그 십자가와 동일한 것이다.

성경을 모르더라도 이처럼 누구나 십자가를 이룰 수 있다.

위 사실들은 이론적인 개념에서 만들어진 십자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십자가를 머릿 속에만 남겨 둬선 안되고, 실제 삶에서 만들어 가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에게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지혜'라는 짧은 영상에서 직감할 수 있는 사례가 허다한 경우들 가운데 하나다.





누구든 범죄했다면 반드시 예외없이 죄의 값을 지불해야만 한다.

그러나 스스로 법의 권위를 존중함으로써 법의 심판을 받겠다는 이와 끝까지 자신은 옳다고 여기고서 법의 권위를 무시하는 그래서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겠다는 이와는 다르게 대해야 한다.

스스로 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권위를 존중한다.

그래서 자신의 범죄한 것을 시인하여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겠다고 스스로 법 아래에 무릎을 꿇는 자는 양심이 살아있는 자다. 그런 이에게는 그의 마음에 처벌을 고한다. 즉 훈계와 가르침으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리하면 그 마음은 그 고통으로 자신의 양심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때부터 그의 양심은 가책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처벌은 더 이상 육신을 괴롭게 하지 않는 수준에서 끝이 난다. 즉 육신에는 처벌하지 않고 마음에만 처벌을 가한다. 양심이 살아있는 자는 스스로 벌을 받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벌이 끝나는 날이 오면, 그 날에 양심에 메달려 있던 양심의 가책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자유를 얻게 된다. 그의 삶은 양심의 가책을 지니고 살아가던 그 과정을 통해 죄를 멀리하고 이웃을 배려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으로 바뀌게 된다.

끝까지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면서

법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아니하는 이는 양심이 화인을 맞은 자로서 소위 일말의 양심조차 없는 자다. 그런 이에겐 훈계와 가르침이 무익하다. 그런 자는 아예 '없는 존재'처럼 여기거나 혹은 그의 육신을 강압적으로 속박하여 세상으로부터 격리를 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전자의 경우와 후자의 경우가 서로 다른 결과를 맺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를 아름답게 구현한 실질적인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죄를 미워하는 것은 법치를,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나도 당신도 모두가 털어서 먼지 나는 사람이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모두가 사랑받기에 합당한 인격적인 존재라는 의식을 갖는다. 이로써 차별없는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구현할 수 있다.


mathsmadeeasy.co.uk



과학자들이 미지의 세계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하는 경우, 미지의 세계에서 최소한 5 가지 이상의 자료(data; 증거)를 얻고자 노력한다.

| 왜 5 가지 이상의 자료를 얻어야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를 예측(추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5 가지 이상의 자료를 얻고자 노력하면서, 그와 동시에 5 가지 이상의 자료들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하나의 스토리'(수학적 방정식; Equation)을 만들어내는지 확인한다. 이렇게 유추된 하나의 스토리(방정식)은 미지의 세계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 과학의 세계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 10 가지 정도의 팩트(증거)들이 제시되고 있다는 기사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증거들이 어떤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면, 조국 후보자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는 예측 가능한 그 스토리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대개 설명이 부족할 수는 있겠지만 틀린 경우가 거의 없다.

누구든지다.

재산이 많은 자든 가난한 자든, 젊은 자든 나이든 노인이든 상관없다.
누구든지 스스로 법의 권위를 인정하고서 자신의 잘못을 법 아래에서 처벌받겠다고 말하는 그에게는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그런 이에겐 훈계와 가르침으로 마음의 짐, 곧 양심의 가책을 주는 것으로써 그의 육신이 받을 체벌을 마음의 체벌로 바꿔주는 그래서 그가 사회를 살아가는 중에 어느 누구에게도 판단과 정죄함을 받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런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의 심리………를 정확히 지적한 댓글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키질과 휴거는 예루살렘 성전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던 의외의 장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