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 발전해야 할 Interface 기술은 결국 베리칩을 구하는 세대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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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Electricity)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속성이 있다.


(+)와 (-)라고 불리는 전기의 두 극성이 그것이다.
이 둘은 너무나 달라서 심지어 둘이서 만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금지된 만남을 무시하고 (+)극성과 (-)극성이 서로 만나려하면, 둘 사이에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불길"(esh; אש)이 일어나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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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어난 불은 온 세상을 태워버릴 기세다. 어느 누구도 그 불길을 품을 수 없다. 그 결과 온세상을 태우고 난 그 불은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 자신 혼자만 남게 된다.

하지만 (+)와 (-)극 사이에 노역(Load;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로서 저항(Load; resistance)을 놓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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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가 다스려진다.

그 다스려짐은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유익함을 제공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우리들)은 (두 극성을 가진) 전기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극명하게 다른 두 존재(극성) 사이에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중재(중보)를 나서게 됨으로써, 공존할 수 없는 세상을 능히 공존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존재를 신앙의 측면에서는 중보자로 칭하는 반면, 과학기술에서는 Interface(인터페이스) 기술이라 말한다. 극명하게 다른 두 지역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서 공존하는데, 이 경계를 Interface(계면; 경계면)이라고 말한다. 인터페이스 기술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진영 사이에 놓여서, 둘 간의 정보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다.
정보교환은 다른게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의 인간으로 합쳐질 수 없다. 그러나 둘 사이에 정보교환을 할 수 있다. 음성으로.

이러한 정보교환은 쉬운 말로 "대화"다.




중보자의 역할은 결국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자다.

하나가 될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에 "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이가 중보자다. 인터페이스 기술은 무생물과 생명체 사이에 정보교환(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다.

자동차와 인간 사이에 대화가 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인터페이스 기술은 센서(sensor)를 통해 상방간의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창조주 야훼 하나님과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세례를 통해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 (벧전 3:21b)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세례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선한 양심(con-science)에 응답"(the answer of a good conscience)하였다. 선한 양심을 따르는 자들은 어떤 이들이 될까?
  •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우리가 참말을 하는지 아니하는지, 성령 안에서 두 증인 곧 "나와 내 양심"이 증거한다.
이렇듯 선을 행할 수 있는 이는 "연단을 통해 성숙하게 자라난 자"에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 (히5: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믿음의 성숙지각(sense)을 훈련받는 연단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에서 인터페이스 기술과 공통적인 내용이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sense 또는 sensor다.

결국 성경에서도 장성한 믿음은 'sense를 훈련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듯, 세상은 진리로 나아가는 삶을 'sensor를 이용한 인터페이스 기술'을 통해서 이루려 한다. 인간의 sense는 몸 밖에 있지 아니하고, 몸 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와 같이 인터페이스 기술도 결국에는 몸 밖에서 몸 안으로 sensor를 옮겨 놓으려 함이 옳다.

그래서 현재 응용 단계에 있는게 베리칩이다.

베리칩을 몸 안에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전기를 흐를 수 있는 유기물(재료)"의 개발이다. 그런데 그 기술이 점점 실제 삶에 적극적으로 응용되고 있다.

한 예로 유기물을 사용하는 전기전자 제품이 있으니, 그것은 OLED다.

몇 년전에 손담비라는 가수가 홍보하였던 "아몰레드(AMOLED) 핸드폰"이 기억날 것이다. 이는 OLED 기술을 작동하는 전기공급방식의 이름 중 하나인데, AMOLED와 PMOLED라는 전기공급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이 기술은 투명전극 또는 투명한 터치스크린 기술을 가능하게 한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차세대 기술"로 분류되던 이 기술이 이제는 생활 속 깊은 곳까지 제품으로 응용되고 있다.

이 기술은 현재까지는 베리칩이라는 하나의 응용 제품으로 개발되고 있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제품화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베리칩"이라는 그 이름을 거부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베리칩이라는 이름을 거부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인체 안에 시도하려고 하는 "인터페이스 기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의 기술은 결국 제품을 통해 실제 삶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을 예로 들어보자.

굴러가는 쇳덩어리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이름으로 명명되어 우리 삶에 적용된다.
이처럼 "인체 안에 적용될 인터페이스 기술"도 능히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름으로 바꾸어서 우리 실생활에 들어올 것이다. 물론 베리칩이라는 그 이름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이름으로.

베리칩이라는 인터페이싱 기술을 없앨 순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셨을 줄 믿는다.

그래서 베리칩의 삽입 여부에 귀추가 집중되어서, 베리칩이라는 그 이름에 강한 반감을 가져선 안 된다. 어느 순간 이름은 전혀 색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실체를 알아야 한다. 인터페이스 기술이라는 그 사실을.
그럴 때 장차 인체 내에 장착될 수 있는 기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을 줄 안다.

믿음의 주체들은 "인간이 만든 기술"에 인터페이스 기술을 맡겨선 안 된다.

우리의 인터페이스 기술은 오직 예슈아를 센서로 삼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한다.

예슈아께로 부터 오는 것 외에 "사람"에게서 오는 것들은 결국 거부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신호를 참(true)이라 여길 때가 오나니, 그 신호를 받는 이는 속는 자가 된다. 이것도 인간이 만든 인터페이스 기술이기 때문이다.
  • (렘 29:8b~9a.새번역)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오직 예슈아로부터 오는 신호 곧 예슈아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 외에 다른 센서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슈아라는 유일한 센서를 통해서만 신호를 분별하는 그런 여러분들 되시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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