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을 세울 수 있는 자 그리고 세운 자의 차이

콜럼버스의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다.


pixabay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성과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린 자리에서 그의 발견을 아주 냉소적으로 비난하듯 평가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저 바닷가의 해류를 따라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가기만 하면 찾을 수 있는 땅인데, 그딴 일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호들갑일까”



잔치 분위기를 차갑게 만든 그들의 말에 콜럼버스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이 달걀을 세울 수 있습니까? 나는 할 수 있습니다. ”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은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제안으로서 “어느 누구도 이 달걀을 세울 수 없다”고 항의하듯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할 뿐이다.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세운다'는 보편적인 생각으로는 절대로 세울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보편적인 생각을 벗어난다면?

즉 달걀의 한쪽을 깨뜨리겠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생각"을 당당하게 벗어나는 있는 자는 너무나도 쉽게 달걀을 세울 수 있음을 보였다. 허무하다 할 만한 이 상황에 맥이 빠진 듯 쳐다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콜럼버스는 짧지만 의미있는 말을 던진다.

알고 나면 간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여주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 시대는 무척이나 힘든 시대입니다.

무엇 하나 해 볼려고 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경제활동은 어쩔 수 없이 레드오션(red ocean) 안에서 벌어지는 각축전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러한 상황들이 "사회 또는 현시대의 보편적인 생각"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자에게는 어떻게 보여질까?

나도 어렵고 모두가 어렵다고 말하는 그 분야에서,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있다. 서로의 상황과 형편이 다른데, 그 상황 속에 있는 우리들은 "하나의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공통적으로.

나만 새로운 생각을 창안해 냈다고 기뻐하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해 보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보편적인 생각" 안에 모두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일화는 우리 삶에 큰 도전 정신을 안겨준다. 특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더더욱 중요하다. 신대륙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축하받을 만한 일이며, 국가적으로도 고무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단순하다.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이론을 대단한 성과로 실체화 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시대적 생각 또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블루오션(blue ocean)이 만들어진다.



블루오션이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그 사실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세울 수 있는 자"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세운 자"라는 극찬은 극소수의 "보편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자"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여러분은 "가능성을 가진 자"로 만족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가능성을 실현시킨 자"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그냥 대충 사는 거지. 머"
라고 생각없이 살아가는 인생보다는,

"나는 왜 살지?"
"내가 하는 이 일과 저들이 하는 이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는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진정한 블루오션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기 때문이리라.

출산의 고통 없이 생명(아이)이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창조적 아이템인 블루오션은 고통으로 뒤덮혀 있는 레드오션에서만 태어난다.
레드오션 그 안에서 보편적인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이들을 통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 한마디의 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놀라운 가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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