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생을 살아 오는 가운데 "후회"없이 지나올 수 있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군가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살아온 이 또한 한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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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따지고 보면 모두가 상처를 껴안고 살고 있는 삶이 인생이고,
그 상처가 주는 고통의 굴레에 갇혀서 버겁게 살아가는게 우리네들의 인생이다.
하지만 상처가 주는 고통을 언제까지 겪어야 할까?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양심을 예로 들어보자.
주변 사람들 몰래 나쁜 죄를 저지른 그는 주변의 시선을 늘 예의주시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범죄자 취급하지 않음에도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마치 자신을 해하려는 이로 여기면서 산다. 그래서 그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만 가고 급기야 사람들이 없는 어둡고 칙칙한 곳을 찾아 스스로 들어가게 된다.
그 안에 들어가면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안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그 눈은 어둡고 칙칙한 곳에 숨어있는 그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한다. 마음의 무게를 더 하여 커다란 바위에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에 시달리게 한다.
그러자 그는 결단한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자신이 지난 날에 저질렀던 잘못을 세상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죄 값을 달게 받길 스스로 청한다.
그 결과 이전에는 두렵게만 느껴졌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제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로 바뀌었다. 그러자 그에게 평강이 임하였다. 그의 몸은 (죄의 대가를 위해) 비록 감옥에 가야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는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올지라도 그는 요동치 않고 강한 자의 눈으로 담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같게 되었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자의 모습을 소설과 같은 예화로서 담아 보았다.
이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이 있을까?
죄를 범하기 전의 모습은 거론하지 않고 있다. 죄를 범한 이후의 모습에만 집중하고 있다. 죄를 범한 이는 세상을 상대로 "두려움을 느끼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인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떳떳하게 죄 값을 받기로 스스로 결정한 이후, 세상을 대하는 그의 마음과 삶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곧 세상을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바라봄으로써, 마땅히 겪어야 하는 (감옥에서의)고통스러운 삶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자"로 바뀌어 버렸다.
이렇게 되기 위한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두려움을 대면하는 순간"에서 그가 (자유의지로) 취한 결정이다. 죄는 자신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로 다가왔다. 그 상처는 이전의 좋았던 모든 삶을 송두리째 피폐한 모습으로 바꿔 버렸다. 그러면서 죄는 "세상은 너무나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그런데 "그토록 두려운 존재"를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대면"(encounter)하겠다고 결단하고 그 자리에 힘겹고 무거운 발을 들어서 옮겨 놓자, 두려웠던 상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죄를 범하였던 "그 세상"은 두렵다.
상처를 준 "그 사람" 또는 "그 사건"은 매우 두렵다.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그 세상"을대면할 수 있는 장소로 힘겹게 걸어가자,
"그 사람"을
"그 사건"을
두렵던 그 세상은,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두렵던 그 사람은,
두렵던 그 사건은
그리고 대신에
"나를 사랑으로 품어주는 세상"이내 앞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긍휼하게 여겨줄 수 있는 그 사람"이
"나를 성숙하게 이끌어준 그 사건"만이
우리는 상처의 굴레 안에서 노예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상처만 바라보는 신앙"은 사실 과녁이 정확하게 맞춰진 신앙이라 하기 어렵습니다.나를 힘들게 하는 순간으로서 "질병만을 바라보는 신앙"은 그 마음에 주님을 맞이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그 존재를 피하지 마십시오.
그가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압니다.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에4:1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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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는 자칫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가 될 수 있는데, 어찌 쉽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에4:16a)
그곳에 나아가는 일은 "규례를 어기는 일"에 해당한다. 그래서 마땅히 죽어야만 하는 자리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예슈아를 통해 얻은 자들이다. 그래서 예슈아께서 밤낮 삼일을 요나가, 그리고 예슈아께서 땅 속에 있으셨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그래서 우리가 그 자리에 나아가고자 할 때에는 배부른 상태로 나갈 순 없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육신의 소욕을 금하는 자세"로 나아가야만 한다. 바로 에스더가 시녀와 더불어 스스로 금식을 했던 것처럼.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에4:11b)
왕의 규례를 어기는 그 자리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에스더는 안다. 하지만 그녀의 현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다. 30 일 동안 에스더 자신을 찾아 주지 않았다. 그 사실은 "그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을 더더욱 줄여준다. 왕의 여자로서 그 상처가 얼마나 컸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준 상대를 대면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나아갔다. 상처 때문에 죽던지 혹은 왕의 규례를 어긴 것 때문에 죽던지, 죽는다는 것이 그녀의 안중에는 더 이상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그랬더니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보라.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에5:1~2)
Bible Characters |
나를 죽일 것만 같던 그 두려운 상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나를 지극히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인자한 이가 그 앞에 서 있다.
여러분.
상처는 모두가 있습니다.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본을 보이고자 예슈아는 "더 큰 상처"들을 받으셨었습니다.죄가 없었음에도 "모함"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토록 밉고 이들과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예슈아는 힘겨운 발걸음으로 대면하고자 나아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27:31b)
어느 누가 예슈아를 강제로 끌고 갈 수 있겠는가?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고로 예슈아는 아버지에 의해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이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 자리에 서게 되니, 그토록 밉기만 하던 이들이 이제는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이들로 바뀌어 보인다. 능히 용서를 베풀 수 있는 마음이 마음의 중심에서 피어나 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던 예슈아의 눈이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자의 눈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죽음을 대면했다. 그래서 영원한 죽음의 늪으로 들어갈 것만 같았으나, 영원한 죽음이 서려있는 늪에 영원한 생명의 손길을 초청하는 계기를 만들어 버렸다. 그 손길에 이끌려 예슈아는 생명의 부활로 일어서게 되셨다.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예슈아.
그가 왜 그토록 모질고 험한 상처를 경험했어야 했는지, 우리는 깨닫게 되길 원한다.
우리는 상처에 사로 잡힌 인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누군가 나를 위하여 밤낮 삼일을 먹고지 않고 마시지고 않고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상처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그 계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창1:28.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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