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것을 세상의 전부로 여기지 말자.

배우지 못한 자는 배운 자를 대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된다.
그래서 배운 자 또한 자신도 모르게 시종일관 "가르치는 입장"으로 배우지 못한 자를 대한다.

부하 직원이 직장 상사를 대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된다.
그래서 직장 상사 또한 자신도 모르게 시종일관 "가르치는 입장"으로 부하 직원을 대한다.

가르치는 이의 말을 듣다 보면 느끼는 점이 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양 이야기 한다.

자신의 아는 바가 세상의 전부일까? (물론 그렇지 않는다고들 이야기 한다. 하지만 대화 중에는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만일 자신의 지식이 세상의 전부라면, 그 세상은 얼마나 커야 할까?


필자 본인만의 견해이지만 함께 나누길 원한다.

사람이 서서 돌아 다녀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의 지식이 전부"가 될 세상의 크기는 "그의 두 발이 딛고 있을 만큼"이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자리에 앉아야 할 순간이 오면,
"그의 지식이 전부"가 될 세상의 크기는 "그가 앉기에 충분한 방석 만큼의 크기"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사람이 죽어야 할 순간이 오면,
"그의 지식이 전부"가 될 세상의 크기는 "그 시신을 담을 관 만큼의 크기"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크기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그 크기의 최고 정점은 "관의 크기"일 뿐, 그 이상은 되지 못하리라.
이후에 시신이 썩어서 흙이 될 즈음이면, 그때는 관 조차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없어질 테닌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자신감있게 거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겨선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그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즉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생각 위에 올려 놓기 위한 "분쟁과 다툼"은 사라지고, 서로간에 진정한 토론과 회의가 진행될 수 있으리라.

2 사람이 모인 회의장에서 (유대인의 모습처럼) 3개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겠고,
10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11개의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반면 자신의 세상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는 곳에서는
10 사람이 모여서 각자의 생각 10개를 나누었지만
결국에는 1개의 결과만이 얻어진다.


우리의 사회는 "내 생각이 세상의 전부가 아냐"라고 자신있게 말하면서도, 실제의 모습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대표적인 모습이 앞서 설명했던 것같이, 우리는 토론하는 사람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늘 1개의 결과만 도출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의 생각에 (생각이 다른)모두가 "동일하게 생각"할 때, 우리는 그런 이들은 "존경스러운 자"로 여겨야 한다고 교육했고 그렇게 여겨왔었다.




또다른 아인슈타인 Genius 중 한 장면. by youtube




그러나 그런 교육은 "다양한 생각과 창의력을 형성해야 할 젊은이"들을 결국에는 죽은 자로 만든다.


특정한 하나의 결과를 얻기에 열중하지 말자.

대신 서로를 인격을 가진 이들이라고 존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각자의 생각들을 다양하게 나누고 들어주는 그런 삶의 모습을 갖춰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는 지식의 영역은 더더욱 넓어지지 않겠는가?
사람의 지식에 만물의 지식이 더하여 진다면? 

예슈아의 행하셨던 것처럼, "막힌 담"을 허물고, 서로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위해 믿는 우리들은 힘써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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