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같이 읽고, 읽고자 노력한다. 그 가운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개역개정)
의 말씀이 믿는 자들에게는 강한 도전을 주곤 한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를 우리 자신(의 삶)에게 적용함과 동시에 강한 의문점 혹은 궁금증이 나타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부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해 보자.
갓난 아이에게는 "뜨겁다"라는 말의 이해가 없다. 그래서 눈에 보기 좋은데로 그들은 손을 뻗어서 만지고자 한다. 이때 현명한 부모는 "아이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뜨거움"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건 뜨거운 거야"라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이해(각성)할 수 있게끔 한다.
"뜨겁다"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인지(이해, 각성)할 수 있는 아이는 (뜨거운 것을 겁 없이 만지려던) "삶의 방식"을 정확하게 바꾸게 된다.
마찬가지다.
갈2:20의 말씀을 삶 속에 정확하게 적용하고 싶다면, 그 말씀이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영향력을 받지 않기 위해 혹은 그 영향력을 받기 위해 삶의 어떤 부분을 돌이켜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자신의 모습 또는 그 믿음의 형태가 삶의 어느 부분에 작용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부분이 어떤 현상으로 내 삶에 나타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나는 못 박혀 죽었는데, 대신 예슈아께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자신이 옳게 살아가는지 혹은 그릇되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하여 헤매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물론 필자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 속에 깃든 모든 영적 의미를 다 안다고 주장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내 삶에서 내가 깨달은 바에 한정해서는 이 부분을 함께 나누어, 그로 인하여 삶의 자유한 부분을 조금씩 넓혀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의 나눔 역시 만화 "열혈강호"의 한 장면을 소개함으로써 진행하고자 한다. 성경의 거룩한 진리를 만화와 같은 내용으로 소개하는 것에 불편한 마음이 드실 수도 있겠으나,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의미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말씀을 먼저 드림으로써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분명 나는 살아 있다. 그런데 내가 죽었다고?
죽는다는 그 의미는 무엇일까?
다소 철학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틈만 있다면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열혈강호" 속 한 장면은 너무나 분명한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열혈강호의 한 장면 |
위 장면에서 우리는 어떤 하나의 동작에 대해 "고수"의 입장인 할아버지와 "하수"의 입장인 손녀 딸의 해석(이해)에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대개 하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 분별하려 하기 보다는 "유사한 것은 같은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게으른 입장을 주로 갖는다. 그래서 "99.9%는 100%와 같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고수는 다르다.
사소한 것조차도 분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유사하다는 말과 같다는 말"을 동일하게 여기지 않는다. 즉 "99.9%와 100%는 거의 유사한 수준이지만, 같지는 않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밝힐 수 있다.
위에서 하수의 입장은 "힘을 거둬들이는 동작"이라 이해한 반면, 고수는 "힘을 뺀다"고 표현한다. 사실
힘을 거둬들이는 것 Vs. 힘을 빼는 것
에 특별한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고수는 두 부분에 대해 명확히 다른 행동을 취해 보임으로써, 다른 의미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하수는 생각은
이해를 못한다. 하지만 진정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 라면, 자신의 무지함에 머물러선 안 된다. 반드시 질문을 해서, 자신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하면 "자상하고 자비로운 분"은 필히 "이해할 수 있는 답변"을 던져 준다.
언뜻 보아선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 단순한 현상에 대해, 고수(지혜자)는 "커다란 차이"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여러분. 고수가 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위 말의 본질 또는 의도에는 다른 것이 없다. 그저 간단함으로 귀결된다.
의도된 행동과 (의도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동의 차이
"힘을 거둬 들인다"는 부분은 내가 내 뜻대로 행하는 의도된 행동인데 반해,
"힘을 뺀다"는 부분은 내 뜻과 다르게 몸 또는 상황이 이끄는대로 따르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뜻이다.
이 상황을 실제적인 삶의 내용으로 설명해 보면 이렇다.
발목 부분까지 차 오른 물 속에 들어간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자.
물의 흐름에 따라 나도 함께 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된 행동"이다.
하지만 내 키보다 훨씬 깊은 물 속에 들어갔을 경우는 어떨까?
물의 흐름에 따라 내가 함께 가는데, 이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된다.
물살의 흐름(current)에 나의 의도된 행동이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래서 내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멈춰서야 하는지는 오직 물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그런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항상 "분석"함으로써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는 이것이 "분별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 보라. 그 분석은 무엇을 기초로 하는지. 우리는 "타인의 간증 또는 신앙 서적"등에서 분석을 위한 기초 데이터를 수집하곤 한다. "A라는 성도가 B의 상황 속에서 C와 같은 행동을 했더니 D의 결과를 얻었다"라는 명제를 세워 놓고서는 A 항목에는 간증이 있는 성도들의 이름을 기입하고, B에는 그들이 체험했던 상황들을 넣으며, C에는 성도들이 했던 행동방식들을 채워 넣는다. 그리고는 어떤 결과들이 나타났는지 D의 항목을 살펴보고는 자신이 원하는 바와 유사한 결과가 어떤 경우인지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는 자신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유사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 기대한다.
예로 다니엘이 하루에 3번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그리하면서 다니엘과 같은 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현실에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고 말한다.
그럼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내 생각과 전혀 다른 길로 펼쳐지는 삶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까?
내가 어떤 계획을 세움으로써 주님의 인도함에 수긍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루를 새벽 예배로 시작하면 주님은 기뻐하실거야!
하루에 3번, 30분씩 기도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거야!
매일같이 성경을 읽어 1독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거야!
등등
이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계획은 누가 세운걸까?
위의 계획은 여러분이 세운 건가요? 아니면 주님이 세워서 여러분에게 알려주신 건가요?
후자의 경우를 택했다면, 당신은 이미 주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시는 분이 맞습니다. 고로 당신은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행하시던 그 모습을 앞으로도 지켜 행하실 수 있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하지만 전자와 같은 경우라고 답변을 하신다면,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회사 사장이 종업원을 채용했는데, 그 종업원은 매사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함으로써 업무를 진행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회사의 사정이 나빠지자 종업원은 난데없이 사장을 향해 고함을 치며 "당신 때문에 회사 사정이 나빠졌습니다. 모든 책임을 담당하세요"라고 말했다.
여러분이 사장이라면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너는 왜 네 마음대로 하는거야!"
라고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을 드렸다고 해 놓고선, 이미 드렸던 삶에 대해 아직도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일부분만 주님께 할애하고선 나머지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계획하고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리곤 자신이 원하던 결과가 삶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주님을 향해 원망하는 탄식의 목소리를 듣게 한다.
나는 당신을 위해 살았는데.
나는 당신이 원하는데로 살았는데.
왜!
왜!
이런 결과가 내 삶에 나타납니까?
필자는 "미로"에 대해 몇 번의 나눔을 게재함으로써 함께 나누었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뻥뚫린 길이 어느 한 순간 가로막힙니다. 그때 "분석"함으로써 주님의 의중을 물어야 한다면 그건 옳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가로막힌 담을 뚫어버리려는 계획"을 세우고자 "분석"을 시도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심각하게 돌이켜 보아야 할 줄 압니다.
그 의도는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미로 속을 여행하는 자에게 상식은 무엇입니까?
미로가 만드는 흐름에 따라 행동하는 것
즉 막힌 담 앞에선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미로와 같이 설계하도록 모든 권한을 내어드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 않을까요?
이해가 어렵다 할지라도, 그 내용은 훗날 여러분의 삶에 큰 변화가 요구되는 때에 깨달음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이미 과거에 경험했던 사실"(역사)에 대해
"그것의 참 모습(본질)"을
보게 되는 것
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의 과거 또는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 소중한 일이 됩니다.
자녀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그 역사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은 부모의 몫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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