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Do it) 그리고 하지 마라(Don't it)는 계명
하라(Do it) 그리고 하지 마라(Don't it)는 계명
성경은 66권으로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주님의 뜻하심과 계획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당시 누군가가 '나와 함께 저 정복자들을 쳐서 그들의 보물을 빼앗자'라고 제안을 해 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와 함께 도적질을 하는 게 옳은 것일까? 아니면 그의 제안을 거부하고 도적질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일까?
도적질을 하게 되면 식민 통치자들에게 항거한 애국자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도적질을 거부하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일삼는 부도덕한 일로 양심의 질책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막막한 상황이다.
조언을 구해 본다.
한 사람은 말한다.
"성경 속에 기록된 그 말씀을 기억해 보세요. 그 말씀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힘쓰라고 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정복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옳은 일이라 했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육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일은 죽음에 이르는 일입니다."
애국지사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신분을 떠나 모든 이들에게 정당한 일을 행하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할까?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고민하던 중에 두 사람에게 각각 이렇게 질문을 하여 보았다.
"성경 속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힘쓰라는 내용 그리고 육신의 유익을 도모하는 일은 죽음에 이른다는 각각의 말씀들을 제외하고 나면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또다른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은 어떤 경우를 지지할까요?"
에덴의 동산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과실수들이 있었다.
원없이 먹는다 할지라도 그 많은 종류를 다 맛보기란 쉽지 않을 터, 그렇다면 그것들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은 부족하고 역시 1년 12달도 부족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이 하신 말씀, 곧 '중심에 있는 저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는 명령을 듣게 된다. 즉 '저것은 하지 마'라는 명령을 듣게 되면, 사람의 관심은 그 즉시 중심에 있는 나무에게서 다른 곳으로 그의 관심이 완벽하게 떠날 수 있을까?
결혼한 남자들이 소위 자신의 아내만을 사랑해야 할진데, 이를 위해 다른 여자들을 바라보면서 '저 여인을 사랑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상에는 사랑해야 할 대상은 단 한 명인데 반해 사랑해서는 안 되는 존재는 셀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여인들을 바라보고서 '사랑하면 안 돼'라고 다짐을 한다고 해 보자. 과연 하루에 얼마의 시간을 소요해야 그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셀 수 없을 정도로 여인들의 수가 많은데, 하루 24시간인들 충분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 남자는 사실 하루 종일 다른 여자들만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자가 된다. 물론 마음 속으로는 '저 여인을 사랑하면 안 돼'라고 다짐을 하겠지만, 그의 시선은 항상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에게만 향한다.
by pinterest |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다. 아울러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다. 눈으로 보게 되면 내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평소 재미로 할 때에는 늘 자신감 있게 잘한다. 하다가 틀려도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미로 할 경우에는 부담감이 없으니, 늘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직업, 곧 잘못될 경우 책임을 물어야 하는 심적 부담감이 주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 번도 평균대를 건너본 적이 없는 50대 아주머니에게 바닥에 놓인 평균대 위를 걸어보라 권하면, 가다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재미있게 도전에 도전을 거듭할 수 있다. 평균대에서 떨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부담감이 없는 경우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균대를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넓은 절벽 사이에 놓고 그 위를 걸어보라 권했다. 그 아주머니가 잘 걸을 수 있을까? 아니다. 평균대 위에 오르기도 전부터 그녀의 두 다리는 사시나무가 떨리듯 덜덜 떠는 중에 평균대 위에는 오르지도 못한다. 평균대에서 떨어지면 두 번 다시는 살아있을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심적 부담감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다.
마찬가지다.
'하면 안 돼'의 경우는 '실패할 경우 처벌이 주어진 부담스런 상황'을 의미한다. 반대로 '하라'는 경우는 실패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저 열심을 내어 시도만 하면 된다. 그래서 심적 부담 자체가 전혀 없는 경우다.
어느 경우가 더 안락하고 편안한 플레이를 가능하게 만들까? 어느 경우를 더 추종하게 될까?
당연히 '하라'는 경우다.
그래서 다른 여인들을 보면서 '사랑해서는 안 돼'라고 다짐하기 보다는, 자신의 아내만을 바라보며 '내가 이 여인을 늘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하는 게 남자들의 실족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책이 된다.
그렇기에 앞서 거론된 이야기, 곧 식민 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복계층민을 향해 도적질을 하는 게 옳으냐 혹은 하지 않는 게 옳으냐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만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려 지켜 행하기란 너무 어렵고 힘들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 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 그가 하루 종일 그 일에 집중하게 하면 어떨까?
"내 아내만 사랑해야 겠다면서 아내 옆자리만 지키다 보니, 다른 여자를 볼 시간이 없더라구."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이토록 짧고 단순한 고백 한 마디만으로도 쉽게 지켜낼 수 있음이 증명되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요즘 우리는 백신이나 휴거, 그리고 신세계 정부의 탄생과 종교 탄압이 시작되는 것 같다는 등의 많은 우려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때 믿음의 조언자들이 주로 하는 말은 어떤 말들이 있을까?
"당신이 그 일을 하면 지옥에 갑니다. 그 일 하지 마세요."
대부분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주로 조언하고, 그런 조언들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펼쳐나가고 있다. '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과연 몇 명의 신앙인들이 '마땅히 행할 바'를 지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대신에 '주님이 이러이러한 일을 바라십니다. 그 일을 해 보세요'라고 하면서 '해 봐'라는 조언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눈길을 둘 시간 조차 없을 정도로 '해야 할 일'에만 전념할 경우, 우리는 하루 24시간 동안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였다는 그런 아름다운 평가를 듣기에 합당하지 않을까?
그런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
댓글 쓰기